바라보는 숲 Forest

김선희展 / KIMSUNHEE / 金宣希 / sculpture.installation   2010_0521 ▶ 2010_0530 / 월요일 휴관

김선희_바라보는 숲_향나무, 전나무, 괴목, 플라타너스, 참나무_가변설치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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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00pm~08: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눈 ALTERNATIVE SPACE NOON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32-3번지(보시동 3길 15) Tel. +82.31.244.4519 www.galleryartnet.com

끊어져 버린 존재의 연쇄 ● 나무나 비누로 깍은 구들이 흩어져 있거나 줄줄이 꿰어져 있는 김선희의 작품은 세계와 사회에 대한 은유이다. 『바라보는 숲』은 다양한 종의 나무로 이루어진 서른 여 개의 구들이 숲을 이루며, 숲으로 상징되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이 있다. 참나무, 향나무, 전나무, 플라타너스 등 질감과 색감이 다른 나무들은 지름 17-60cm 사이의 다양한 크기로, 굳이 특별한 구성과 연출이 아니어도 개체와 전체는 조화를 이룬다. 비슷한 형태가 여러 개 모여 있는 방식은, 이미 자체 내에 움직임을 내포하는 구의 잠재성 운동성을 극대화한다. 표면에 작가의 손길이 남아 있는 작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날 것이고, 숲처럼 빽빽하게 채워질 것이다. 작품에 내재된 시간성은, 단번에 보여지기 보다는 숲속을 거닐 듯 어슬렁거릴 관객의 동선을 감안한다. 좀 더 무른 재료인 비누로 만들어진 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바닥도 벽도 아닌 어중간한 공간에 걸쳐 있다. 서로 연결되고 지지되고 있으면서도 나무 구에 비해 불안정한 느낌이다. 역설적이게도 김선희의 작품은 흩어져 있는 단독의 존재들이 더 자연스럽고 안정감을 준다. 그것은 단지 재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비누구들에서 존재들을 잇는 줄은 매우 취약해 보이며, 줄이 끊어지는 순간 확 흩어져 버릴 것이다.

김선희_바라보는 숲_비누_가변설치_ 총길이 346cm_2010

작가는 이 둥근 형태들에 대해 '멈춰있지 않고 움직임을 앞두고 있다'면서,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삶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존재를 연결하는 끈은 안정감보다는 무질서로 해체 될 상황을 예견하게 하면서, 더욱 긴장감을 준다. 작가는 비누 덩어리를 과일 깍듯이 커터 칼로 다듬는다. 누런 비누 덩어리는 제조 시 기름의 성분 때문에 달라지는 미묘한 색조의 차이를 가지며, 표면에 지문이 남겨질 정도로 작가와 교감할 수 있는 재료이다. 나무는 더 단단하긴 하지만, 비누의 색상 및 형태와 비교하여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 둘 다 식물성 재료로, 작업실 뿐 아니라 생활공간에서도 용이하게 진행할 수 있다. 집중하여 구를 만드는 반복적인 작업 과정은 수행하듯이 진행되는 예술의 몰입성을 예시한다. 이러한 몰입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을 정리하거나 반성하게 한다. 2008년의 첫 개인전 『room of memory』가 나무로 만들어진 기억의 공간을 연출했다면, 이번 전시는 삶의 불안정성에 대해 성찰한다. 불안정한 삶이라는 작품의 메시지는 벽에 걸린 드로잉들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드로잉은 기울어진 좌대, 다리가 셋 뿐인 탁자에 불안하게 얹혀 있는 크고 작은 구의 연쇄, 허공에 힘없이 걸려 있는 사슬을 보여준다. '떨어진 공은 이내 여기저기로 흩어져버렸다'같은 문장과 파편화되어 읽을 수 없는 단어들이 적힌 원들도 보인다.

김선희_바라보는 숲_비누, 물푸레나무_93×34×34cm_2010

나무구로 상징되는 자연은 보다 안정적이다. 바닥에 깔아 놓은 나무 구들은 원래의 재료에 있는 무늬나 결이 살아있고, 구의 갈라진 틈마저도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을 포용하고 있는 듯하다. 김선희의 숲은 원이나 구라는 매우 인공적인 형태이면서도 동시에 야생성을 간직하고 있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sauvage이란 단어가 숲을 뜻하는 실바silva에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김선희의 작품에서 상징의 숲은 자체의 자율성과 균형을 유지하는 고유의 체계와 살아있는 야생적 영혼을 가지고 있다. 크고 작은 구들은 숲 뿐 아니라, 소립자로부터 별에 이르는 우주의 풍경을 가시화한다. 자연 속에 깃든 기호들은 다양한 차원으로 의미의 메아리를 울려 퍼지게 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문명과 관계된 숲의 두 가지 속성을 대조한다. 그는 루소를 인용하면서, 역사의 시작은 숲이라는 모형 위에서 사색되었다고 말한다. 루소적 관점에 의하면 나무들은 서로가 격리되어 있으며, 각자 생존하기 위해 땅에 뿌리를 박고 대기 속에서 호흡한다. 나무는 교양 없는 투박한 사람처럼 살아간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의 상태는 '생업도 없이, 말도 없이, 주거지도 없이, 전쟁이나 관계도 없이' 사는 삶이다. 숲으로 회귀하는 삶이란 이러한 비친교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흩어짐은 모든 역사적 가능성에 족쇄를 채우는 비관여의, 무관의 상태인 것이다. ● 이러한 역사 이전의 원초적 상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신화적, 종교적, 예술적 인간에게는 세속적 일상을 고리를 끊고 반복적으로 회귀하고 싶은 그때 그곳이라는 원형적 시공간에 가깝다. 김선희의 작품에는 식물적 삶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 동물학자들이 관찰한 바와 같이, 그것은 집단적 협동과 그 산물인 사냥감을 나누어 먹는 사냥꾼보다는, 채집이라는 개별적 활동에 몰두하는 인간 영장류로서의 면모이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사회적인 축제꾼이자 육식동물, 사냥꾼이 협동을 위한 도구와 언어를 발전시켰다면, 채집자로서의 초식동물은 개별적이면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물질적 삶과 금욕적인 삶의 대조를 낳는다. 동물적 삶이 집단주의 속에 극도의 이기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면, 식물적 삶은 단지 개인주의적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가란 개인적이며 금욕적인 삶을 통해 상징적 교환이라는 또 다른 축제적 삶을 준비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나무에 가하는 행위만큼이나 나무는 단순히 재료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이테나 옹이 자국에 감추어진 생태적 기록처럼 기억을 간직한다.

김선희_바라보는 숲_2010_부분

첫 개인전에서는 나무로 만든 책에 글자들을 새겨 넣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나무가 겪어왔던 총체적인 생태의 내력을 살려내고, 아울러 작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그녀의 나무구는 수정구처럼 투명하지는 않지만, 비추고 보여주는 것이다. 김선희의 숲은 단단한 존재감이 있지만, 대지에 뿌리를 박은 부동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가변적으로 배치된 둥근 형태들은 유목의 수단이 된다. 그것은 바람과 다른 동물의 매개를 거쳐 널리 퍼져 나가는 씨앗이나 열매 같은 이미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의 항상성의 유지를 위해, 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하는 개체이자 총체적인 우주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다양한 크기와 재질을 가지는 나무 구들은 개별적 존재이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그 점에서 그것들은 '존재의 대연쇄'(아서 러브 조이)라는 근대의 철학적 사고로부터, '생명의 그물망'(프리초프 카프라)이라는 현대의 생태적 사고에 이르는 관념과 친숙하다. 나무 구의 경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성분상으로 인간과 더욱 공통점이 많은 비누 구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연결망에 의해 개체들이 근접되어 있다.

김선희_바라보는 숲_2010_부분

김선희의 존재의 연결망에 대한 상상력은, 우주의 체계와 구조에 대한 관념의 하나인 존재의 대연쇄로서의 우주관을 떠오르게 한다. 아서 러브 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거의 비존재에 가까운 가장 미소한 종류의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완전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수의 연쇄의 고리들로 구성되어 있는 연결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손으로 일일이 깍은, 크기가 다른 단순한 개체들은 공허와 진공의 공포를 극복하는 충만한 형태를 이룬다. 점점 개체수를 늘리고 있는 그녀의 작품이 은유하는 바는, 자연은 어디에서나 생명으로 꽉 차있으며 이 모든 생명은 어느 정도의 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아서 러브조이에 의하면 18세기에 정점을 이룬 존재의 대연쇄라는 관념은 '자연은 비약을 하지 않는다'는 라이프니츠는 사고에서 전형적이다. 자연이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양성의 극대화이며, 논리적 가능성의 한도에 이르기까지 종과 아종과 상이한 개체를 증식시킨다. 개체들은 어느 것도 똑같은 것이 없고, 차이로 이루어진 개체들의 총체를 이룬다. 이러한 사상은 완전한 존재인 신을 제외한 만물이 그 내부에 어느 정도의 결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모든 종에 특유한 성질, 즉 본질 속에는 존재의 일정한 상황에 있어서는 실현되지 않고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김선희_바라보는 숲_종이에 연필_각 20×29.8cm_2010

존재의 끝없는 연쇄 속의 한 고리인 인간은 충만과 결핍을 동시에 내재한다. 김선희의 작품에서 수다한 개체의 모델이 되고 있는 원이나 구는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유출된 듯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에게 18세기의 이성적이고 낙관적 세계관은 낯선 것이 되었다. 드로잉과 비누조각에서 드러나듯이, 이제 존재의 연쇄를 이루는 끈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개체들은 본질과 필연성, 그리고 중심을 잃고 흩어져 버린다. 여기에서는 안정된 공간적 구조가 아니라, 시간성이 적극 개입된다. 아서 러브조이는 영원한 합리성의 표출인 우주관인, 존재의 대 연쇄가 이미 그 정점에서 시간화 과정을 밟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정적이며 영원히 완전한 존재의 연쇄는 그자체의 무게 때문에 붕괴했다. 실재의 합리성, 완전함, 정태적 완전성, 질서와 조화 등에 대한 믿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착상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사고는, 필연적 진리에 의해 도처에서 단번에 최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사물의 구조, 즉 폐쇄적 세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시간화 과정은 존재에서 생성으로 중심을 이동시킨다. 모든 가능한 것들은 실현을 요구하지만, 그 요구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 아서 러브 조이에 의하면 플라톤주의적 우주관, 즉 처음부터 완전하고 불변하는 존재의 연쇄는, 단계적이지만 단지 시간적으로 방대하고 완만한 전개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운명을 가진 생성으로 전환된다. 생성은 다양성을 낳는다. 이러한 사상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김선희의 작품에서 끈이 풀어진 채 취약한 토대 위에 놓인 존재의 구조,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불안정성은 정태적인 다양성이 아니라, 다양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존재의 연쇄는 시간화 되었고, 그 연쇄가 명시하는 것은 변화와 생성 그자체이다. 그것은 존재의 대연쇄라는 사상을 근대에 맞게 변화시킨 낭만주의자들처럼, 가능한 우주 중에서 최선의 우주란 가장 변화무쌍한 우주라는 것을 알려준다. 구의 상징성과 그것의 시간화는 또한 자아의 차원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상징주의에서 구는 완벽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고, 천구(天球)로 대변되는 우주의 구성단위이자, 자아의 상징이었다. 그것이 가지는 완전한 모양새와 자기 충족성은 궁극적인 완전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던 것이다. 각자 나름의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을 다시 잇는 작업은 종교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religio에서 알 수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종교의 몫이지만, 예술 역시 또 다른 방법으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세계와 자아의 통일이라는 이상은, 중심이 상실된 현대에 와서도 인간의 여전한 희망사항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선영

Vol.20100518h | 김선희展 / KIMSUNHEE / 金宣希 / sculpture.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