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의 미학

인더박스갤러리기획展   2010_0515 ▶ 2010_0615

초대일시_2010_0515_토요일_05:00pm

참여작가_김선두_강석문_백진숙_이구용_이길우_이동환_임만혁_임태규_장현주

관람시간 / 12:00am~07:00pm

인더박스 갤러리 GALLERY IN THE BOX 서울 강남구 신사동 657번지 B1 Tel. +82.2.540.2017 www.galleryinthebox.com

『겹의 미학』전은 오늘날 현대예술에서 '장지(壯紙)'의 표현매체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해보고자 하는 전시이다. 근대이전까지만 해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의 존재였던 장지는 우리의 의식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매체였다. 장지의 이러한 매체적 속성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기계화로 대변되는 싸고 편리한 신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김선두_느린풍경-다시보다_장지에 먹, 분채_120×160cm_2008

미디어들로 인해 전통적 미디어들은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촌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갔다. 장지는 우선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손이 많이 가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그 성질이 배어나온다는 점에서 사용이 불편했다. 기록매체로서의 장지의 기능은 신속하게 세련된 이미지로 포장된 대량생산의 목재펄프 종이로 대체 되었고, 표현매체로서의 기능도 제한적으로 살아남았다. 장지는 이제 몇몇 한국화가들의 손에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강석문_친구들_한지에 먹채색, 호분, 아크릴 채색_99×259cm_2010

이처럼 장지가 겪어온 쇠락의 세월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모든 전통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걸어온 세월의 모습과 같다.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해야만 하던 시기, 모든 가치의 기준은 '양'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물 건너온 것에 있었다. 모든 가치를 내 모습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구하려고 했던 시도는 당시 세계적 정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하는 것을 본 순간 당시 동북아시아 지식인들이 느꼈던 충격은 바로 서구인들이 이룩한 그 위대한 물질문명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문명이 단순히 문명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 배후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유 방식임을 이해하게 된다. 제도와 문물은 형식이지만 형식의 구현은 사유에서 나온다. 의식이 바뀌면 삶의 방식이 바뀐다. 삶의 방식이 바뀌면 삶의 도구가 달라진다. 근대이전 우리의 인식과 표현에 결정적 매체로 작용했던 장지가 신속하게 새로운 서양종이로 대체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자기부정의 역사가 숨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 또한 구시대의 틀을 깨고 새롭게 세계를 바라보고자 했던 삶에 대한 성찰과 처절한 반성의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다.

백진숙_untitled_장지에 먹, 채색_96×119cm_2010

이러한 자기부정의 역사 속에서 다시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내적, 외적 사건이 일어난다. 서구의 체계를 이식하고 모방하는 동안 우리는 이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 즉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며 건설하려고 하는 근대는 스스로의 자각 속에서 이룩되는 속성을 지닌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를 자각하는 것은 타자를 의식하는 일이고, 근대란 결국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살펴보면 이 과정이 선명히 드러난다. 일본에서 서구적 시스템을 자국에 이식하기 위하여 초빙하였던 페놀로사가 정작 일본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의 전통을 재창출하는 일이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일본화라는 개념도 만들어진다. 오늘날 일본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실상은 19세기 말 페놀로사나 그의 제자 오카쿠라 덴신에 의해 재창조 된 이미지들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근대의 시선을 전통으로 돌리는 내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데 그것은 나를 규정하는데 있어 남의 자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역사적 발전과정으로서 근대화를 서구화와 동일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구용_산-숨결_장지에 수묵채색_163×130cm_2009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전통을 돌아보게 하는 외적 요인은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가시화된 서구문명이 이룩한 과학문명이 조화로운 삶이나 행복을 이루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며 무한 경쟁과 자원의 낭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결국에는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불안의식이다. 모든 것이 눈에 드러나는 단순 명쾌한 과학적 사유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알 수 없음으로 가득 차있다. 때론 명료해 보이는 현상들조차 그 본질은 불명확하다. 조화로운 삶의 조건을 물질적 풍요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문적 사유에서 찾아야 한다는 반성은 서구문명 지향의 일방적 태도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전통적 가치를 되묻는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이길우_舞嬉自然_순지에 인두, 장지에 채색, 배접, 코팅(2rayers)_190×120cm_2009

우리가 오늘날 다시 장지의 속성과 그 미디엄작용에 대해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장지는 전통적 사유가 배어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도구는 단지 내용의 전달과 무관한 도구로써의 역할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의 쓰임 자체에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가치관과 의식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장지는 시간 속에서 표현을 성숙시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채색의 경우 장지의 특성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채색이 쌓여 그 깊은 맛을 밑에서부터 우려내야 한다. 두터운 겹으로 이루어진 장지는 채색을 단순히 투과시키거나 반사시키지 않음으로써 그 존재를 드러낸다. 만약 한 번의 붓질로 원하는 색을 내기 위해 장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도구의 선택이 될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유화나 아크릴의 표현에 뒤떨어지기 때문에 한 번에 원하는 색을 표현하여 그 즉물성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다른 미디엄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가 장지를 표현의 도구로 선택했을 때 우리는 이미 장지가 지닌 매력과 동시에 그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장지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써 우리는 장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장지는 마치 슬로우 푸드와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인스턴트 음식에서 맛볼 수 없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만, 급하게 그 효과를 낼 수 없다. 오랜 시간 발효가 되어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된장처럼 장지기법 또한 인내와 시간이라는 노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동환_story-지혜, 심장, 용기, 모험_장지에 수간채색_60×72cm×4_200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장지는 기계적으로 대량생산 된 미디엄 속에서 잃어버린 수공의 섬세함과 깊이를 느끼게 해줄 수 있겠지만 현대문명이 지닌 극단적 강렬함을 표현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된장이 모든 맛을 다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된장은 된장만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된장에서 자장면의 맛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장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장지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장점들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오늘날 다시 소환해내는 장지가 모든 시각언어의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물신(物神, fetish)주의를 경계한다. 분명 물질은 의식을 구성하고 의식은 물질에 투영된다. 우리가 장지를 선택하게 되는 순간 장지는 그 자체로 이미 많은 말을 하고 또 그 어느 정도 어법이 정해진다. 우리는 장지에서 강철의 표현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임만혁_가족이야기_한지에 목탄채색_169×135cm_2008

정작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생각이다. 미디어가 아니다. 예술적 가치는 어떠한 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에 있지 않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형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 아서 단토가 앤디워홀의 「브릴로상자」를 예로 들어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부터 서양미술에 있어서 형식논리에 의한 미술 담론은 더 이상 그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64년 뉴욕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열린 앤디 워홀의 전시에 출품된 「브릴로 상자」에서 당시까지 서양미술의 핵심논리였던 '모방'과 '재현'의 원리를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이 작품으로부터 미술은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한다. 단토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 예술 가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과 '재현'의 역사로 이루어진 서양미술사에서 미술개념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형식이나 역사적 패턴으로 예술의 발전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일어나는 예술행위란 탈역사적이라고도 한다.

임태규_erehwon#3_한지에 수묵채색, 먹물_173×138cm_2010

이것을 근거로 사람들은 오늘날은 무엇이나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단토 이야기의 핵심을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여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일상의 용품이나 단순한 사물 등 이전에는 미술의 영역에서 그 가치를 논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미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때, 여기에는 예술에 대한 더욱 본질적인 질문이 내재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는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상점에 있는 「브릴로상자」와 전시에 놓인 「브릴로상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워홀의 행위는 예술의 형식을 허물었을 뿐이지 예술과 예술 아닌 것과의 경계를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니다. 아니 형식적 차이가 없는 것에서 내용의 차이를 발견해야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무엇이나 예술이 될만큼 쉬어진 것도 없고 또 어려워진 것도 없다. 워홀은 자신의 눈높이에서 예술의 역사를 창출했고, 단토는 예술 본질의 문제를 워홀의 작업을 통하여 제기했을 뿐이다. 그 이전의 역사에서도 '모방'이나 '재현'을 했다고 모든 그림이 예술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현주_산 I_장지에 채색_150×107cm_2010

이러한 점에서 장지의 소환 역시 우리가 지닌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예술적 가치가 발생하는 지점이 미디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겹의 미학」전이 제기하는 장지의 소환이 지니는 의미는 장지의 소환 그 자체가 오늘날 삶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 때문에 장지는 단지 대상화된 물질이 아니라 인문화 된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겹의 미학」전은 서구문명과 아시아 문명의 충돌로부터 나타난 근대의 여러 문제들, 즉 전통적 가치관의 상실로부터 오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근대 자본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나타나는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 인간 소외화 현상과 서구적 세계관의 반성이라는 거대 담론을 장지의 소환을 통하여 제기하고 있다. 물론 장지를 매개로한 거대 담론을 통해 펼쳐지는 작가 개개인의 소회는 물신주의적 세계관을 넘어서 예술본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 김백균

Vol.20100515c | 겹의 미학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