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mestic Era

신동원展 / SHINDONGWON / 申東媛 / ceramic   2010_0511 ▶ 2010_0605 / 일요일 휴관

신동원_Domestic Era展_갤러리 선컨템포러리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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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원 홈페이지_www.dongwonshin.com

초대일시 / 2010_0511_화요일_05:00pm

후원 / 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GALLERY SUN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82.(0)2.720.5789, 5728 www.suncontemporary.com

가정시대, 소시민의 삶의 질감이 감촉되는 ● Domestic Era. 신동원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는 가정시대를 뜻한다. 아마도 자신의 사사로운 경험과 신상에 연유했을 이 주제는 사실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을 넘어 보편적인 개념에 닿아있고, 특히 문화사회학의 문제의식과 통한다. ● 무슨 철지난 여성지의 제호를 떠올리게 하는(실제로 그런 제호의 잡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주제는 공동체적 이상과 이념을 중시하던 것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한 개인주의가 부각되는 것으로 변화해온 패러다임의 변화와 관련이 깊고, 미술사적으론 본격적인 소비자 계급의 출현과 함께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가 그 이해관계를 같이하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출현한 팝아트와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무슨 상품 카탈로그를 연상시키는 리처드 해밀턴의 포토콜라주 작품「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가정생활과 소비 지향적 문화생활에 대한 반응을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가정시대란 주제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관련이 깊고(물론 여성과 가정을 결부시키는 것에 대해, 성역활론의 허구성을 겨냥한 공공연한 반론이 없지 않지만), 국내적으론 특히 어머니 세대의 규방문화와 관련이 깊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생산주체로 여겨져 왔던 영역들, 이를테면 바느질과 자수, 노리개와 인형 등의 물품(지금까지 사실상 공예로 범주화돼온)에 반영된 여성 고유의 미의식과 섬세함에 대한 반응이랄까 그리움 같은 것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런가하면 Domestic은 익숙한, 길들여진, 이라는 의미도 있고, 이로부터 보수적인, 이라는 의미가 파생되기도 한다. 이로써 이 주제는 무슨 거대담론보다는 소시민의 소소한 생활감정과 경험을 중시하는 한편, 일상을 자신의 성역으로 보는, 현대인의 소박하면서도 왜소해진(?) 삶의 초상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가정시대란 주제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그 주제는 특히 근대사의 사회학적 인식과 관련이 깊다). 작가가 가정시대란 주제를 생각해낼 때 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의미를 덩달아 떠올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여부가 중요하지는 않다. 주제란 의식적인 층위에서 생각해낼 수도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작용하는 법이며, 그 경우가 의식적인 경우에 비해 그 중요성이 결코 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적어도 외관상 매번 전시 때마다 주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내용 면에서 볼 때 진정한 주제의식으로 부를 만한 경우는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을 작가의 작업이 보다 깊어지고 심화되는, 혹은 현실성을 얻는 계기 내지는 전기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신동원_the last supper, porcelain, birch plywood_MDF, 페인트_115×210cm_2010
신동원_tea party, porcelain, birch plywood_MDF, 페인트_116×96×12cm_2010

도자와 조각 사이. 도자와 조각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태를 단순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도자가 기능성을 중요시한다면, 조각에서는 관상이 중요하다. 이 차이는 공예와 예술의 차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공예라는 말 속에 기능성과 함께 관상의 의미가 함축돼 있듯 도자를 그저 기능성의 소산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기능성과 관상의 스펙트럼 중 기능성 쪽으로 기울어지면 도기가 되고, 관상 쪽으로 쏠리면 조각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도자와 조각은 그 장르적 특수성에 대한 선입견을 제하면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고, 신동원의 작업은 그런 관점에서, 이를테면 장르적 특수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탈장르와 탈경계의 실천논리가 수행되는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부연하면, 신동원의 작업은 외관상 도자에 속한다. 특히 재료와 소성과정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도기를 제작할 때처럼 물레를 사용하는 대신, 조각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빚어 형태를 만든다. 물론 조각처럼 주형을 사용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조각이 좌대가 사라지면서 공간과 상호 간섭하는 설치미술로까지 그 영역과 범주가 확장되었듯, 작가의 작업에서도 좌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도자나 조각에서의 좌대는 현실공간과 그 위에 놓여진 것을 구별하고 절연시키는 미학적 장치며, 특히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미학의 장치다. 그 장치가 사라진다는 것은 도자나 조각의 존재의미가 현실공간의 맥락 속에서 읽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도자는 그것이 본래 속해져 있던 현실공간으로 재차 복귀하는 것이고, 조각은 순수한 관상으로부터 삶에 연장된 영역(이로부터 오브제와 레디메이드 개념이 나온다)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 일반적으론 그러한데, 작가의 경우에는 좀 특이하다. 즉 좌대가 사라진다고 해서 작업이 현실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작업이 진즉에 현실공간에서의 기능이 아닌 관상에 초점을 맞춘 탓이다. 이를테면 작가가 만든 주전자는 납작해서 물을 따를 수가 없고, 컵은 막혀있어서 물을 담을 수가 없다. 도기처럼 보이지만, 도기가 아니다. 더욱이 평면으로 압축된 오브제가 도기보다는 조각처럼 보이고, 특히 납작한 조각인 부조처럼 보인다. 실제로 작가는 이렇게 만든 오브제를 부조처럼, 나아가 무슨 그림처럼 벽면에 걸기조차 한다. 보기에 따라선 벽면을 캔버스 삼아 도자로 그림을 그리는, 무슨 벽면 드로잉 같기도 하다. 현실적인 모티브(이를테면 주전자나 컵 같은)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의 공간적 조건에 제약받지는 않는 자유분방한 판타지를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이를테면 조각이나 도기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사물은 중력의 제약을 받기 마련인데, 작가의 작업에서와 같은, 벽 위에 얹혀진 낱낱의 모티브들은 마치 무중력 속을 떠다니듯 부유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선 중력에 배치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우선 그림처럼 벽 위에 걸리는 구조가 그렇고, 탁자의 모서리 끝에 기우뚱하게 서 있어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모티브가 그렇고(나아가 아예 탁자 자체가 기울어진 경우도 있다), 아예 공중에 부양하듯 떠 있는 오브제가 그렇다. 현실을 닮았지만 정작 현실원칙에 구속받지는 않는, 일상을 닮았지만 사실은 이상(이를테면 일상으로부터 일탈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겹치고, 일상에 이상이 오버랩 되는 것에서 일종의 극적 긴장감이 감지된다. 그러면서도 무겁다기보다는 가볍고 발랄한 감각(그 자체 재치에 가까운 감각)으로 현실원칙에 대한 도발(가벼운 반란?)이 감행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도자이면서도 조각에 흡사한 생리를 내재하고 있고, 부조나 평면회화처럼 벽 위에 걸리는가 하면, 나아가 설치작업이나 공간 드로잉마저 아우른다. 편의상 도조로 명명하고 범주화할 수 있을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도자와 조각,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상호 삼투되는 제 삼의 어떤 지점을 예시해준다.

신동원_dinner table, porcelain, birch plywood_MDF, 페인트_120×120cm_2010
신동원_rice wine party_MDF, 페인트_100×50cm, 60×90cm_2010

일반적으론 그러한데, 작가의 경우에는 좀 특이하다. 즉 좌대가 사라진다고 해서 작업이 현실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작업이 진즉에 현실공간에서의 기능이 아닌 관상에 초점을 맞춘 탓이다. 이를테면 작가가 만든 주전자는 납작해서 물을 따를 수가 없고, 컵은 막혀있어서 물을 담을 수가 없다. 도기처럼 보이지만, 도기가 아니다. 더욱이 평면으로 압축된 오브제가 도기보다는 조각처럼 보이고, 특히 납작한 조각인 부조처럼 보인다. 실제로 작가는 이렇게 만든 오브제를 부조처럼, 나아가 무슨 그림처럼 벽면에 걸기조차 한다. 보기에 따라선 벽면을 캔버스 삼아 도자로 그림을 그리는, 무슨 벽면 드로잉 같기도 하다. 현실적인 모티브(이를테면 주전자나 컵 같은)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의 공간적 조건에 제약받지는 않는 자유분방한 판타지를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이를테면 조각이나 도기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사물은 중력의 제약을 받기 마련인데, 작가의 작업에서와 같은, 벽 위에 얹혀진 낱낱의 모티브들은 마치 무중력 속을 떠다니듯 부유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선 중력에 배치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우선 그림처럼 벽 위에 걸리는 구조가 그렇고, 탁자의 모서리 끝에 기우뚱하게 서 있어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모티브가 그렇고(나아가 아예 탁자 자체가 기울어진 경우도 있다), 아예 공중에 부양하듯 떠 있는 오브제가 그렇다. 현실을 닮았지만 정작 현실원칙에 구속받지는 않는, 일상을 닮았지만 사실은 이상(이를테면 일상으로부터 일탈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겹치고, 일상에 이상이 오버랩 되는 것에서 일종의 극적 긴장감이 감지된다. 그러면서도 무겁다기보다는 가볍고 발랄한 감각(그 자체 재치에 가까운 감각)으로 현실원칙에 대한 도발(가벼운 반란?)이 감행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도자이면서도 조각에 흡사한 생리를 내재하고 있고, 부조나 평면회화처럼 벽 위에 걸리는가 하면, 나아가 설치작업이나 공간 드로잉마저 아우른다. 편의상 도조로 명명하고 범주화할 수 있을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도자와 조각,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상호 삼투되는 제 삼의 어떤 지점을 예시해준다.

신동원_ tea time, porcelain, birch plywood_MDF, 페인트_55×64×7cm_2010
신동원展_갤러리 선컨템포러리_2010

가정시대와 여성적 감수성. 작가의 작업은 한눈에도 여성적으로 다가온다. 주전자와 물 컵, 술상과 찻상 같은 일상적이고 가정적인 생활용품들이 소재로서 차용되고 있으며, 이로부터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삶의 기쁨이나 희열 같은 것이 감지된다(그 자체 이상적이고 기념비적인 인상과 비교되는). 그 자체 소시민적인 삶을 떠받치고 있을, 그 쾌감은 도자의 표면에 전사된 무슨 섬세한 레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자잘한 꽃문양에서 배가되고, 특히 근작에서 더 과감해진 원색의 도입으로 인해 증대된다(원색의 도입은 장식미를 더 뚜렷하게 부각하기도 한다). 여성적 감수성으로 치자면 특히 스티치의 도입을 간과할 수가 없는데, 작가는 도자를 무슨 천 소재나 되는 것처럼 바느질로 기워서 이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화병과 화병, 주전자와 컵, 주전자와 탁자 등 모티브를 기워놓고 있는 생생한 바느질 자국은 그 기교도 예사롭지가 않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면에서 작용했을 일종의 연금술적인 상상력(그 자체 물질의 변성 내지는 변질에 바탕을 둔)이 흥미롭다. 경성의 소재를 연성의 소재처럼 다루고 있는가 하면, 시각적 이미지에 촉각적인 이미지를 더한다. 일종의 촉각적인 시각 내지는 만지는 시선 같은 것이 수행되어지고 있다고나 할까. ● 근작은 전작에 비해 눈에 띠게 다소곳해졌다. 거의 바로크를 연상시킬 만큼 역동적인 화면 배치나, 마치 무중력 상태 속을 떠다니듯 부유하는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분방함, 그리고 때론 이로 인해 일종의 심리적 불안정성마저 불러일으키던 것에 비해 보면 상대적으로 더 정적인 느낌이 강조된다. 무중력 속을 떠돌다가 재차 중력에로 안착한 느낌? 현실에서 일탈했다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느낌? 여하튼 중요한 것은 중력이나 무중력,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이상, 이 모두가 작가의 자산이며 역량이란 점이다. 작가의 그동안의 작업이 그 자산과 역량을 확인시켜줬다고 본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제며 주제의식이다. 일단 주제가 서면 이제 그 갈래는 어디든 뻗어갈 수가 있고 연장될 수가 있다. Domestic Era, 가정시대. 소시민의 소소한 삶의 기쁨이 감촉돼오는 작가의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 고충환

Vol.20100511b | 신동원展 / SHINDONGWON / 申東媛 / ceramic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