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428_수요일_11:00am
2010 아트서울展
관람시간 / 11:00am~08: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HANGARAM ART MUSEUM 서울 서초구 서초동 700번지 Tel. +82.2.580.1300 www.sac.or.kr
형상과 화해하는 물질적 상상력 ● 이미애의 작품들은 '나의 나무(my tree)'라는 명시적인 명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 명제가 함축적이어서 서정적인지 서사적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언명을 슬쩍 대입해보자면 이미애의 작품은 자연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화면에서 어떤 특정한 풍경을 발견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사실적 재현과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 실상 풍경이라고 시각적으로 인식할 만한 이미지는 거의 없다.그렇다면 이미애가 제시한 이 명제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명제에 대해서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는 우리의 정신과 작품 앞에서의 시각적, 망막적 경험의 상호작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의문은 '형상적인 것(figural)'에 대한 '담론적인 것(discursive)'의 억압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작품을 감상하고자 할 때마다 부지불식 간에 작품의 밑이나 오른 쪽에 붙어 있는 사각 틀 속의 명제에 시선을 뺏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우리의 지각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만 시각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억압하게 된다는 점을 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해 노만 브라이슨의 지적처럼, '기존 예술 형식의 관계가 의문시되고 새롭게 형성되는 오늘날까지도 거의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는 관습은 이미지의 실마리로써 제목을 다는 행위'는 여전하다. '무제(untitled)'같이 명제의 상용적인 의미가 해체된 경우에도 이런 습관은 당연시 된다. 때때로 명제가 이미지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제안하고 가정하는 것에 상응하는 재현을 인식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명제가 없더라도 이미애의 전작을 기억하는 감상자들에게 근작이 과거와 동일한 문맥으로 자연에서 받은 영감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만약 처음으로 그의 그림을 대면하는 감상자에게는 망막의 진실보다는 이런 명제에 의한 해석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명제의 기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 이 경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예컨대 화면 상의 나무는 재현의 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으면서도 담론에 의해 구축된 대상의 리얼리티와 관념화된 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한 존재가 된다. 하여 우리는 주문에 홀린 듯 이미애의 작품에서 이종적 결합의 풍경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풍경은 단지 재현의 물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관념적 차원, 즉 생장과 소멸의 순환을 지속하는 생명적 차원에서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미애의 그림은 단지 작품의 명제에 침몰하여 단순히 이미지를 번안하고 있지는 않다. ■ 유근오
Vol.20100425a | 이미애展 / LEEMIAE / 李美愛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