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409_금요일_05:30pm
참여작가 강영민_김성진_김진_노준_박정혁_안두진 유진영_이다_이태경_임태규_장승효_정해윤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Lack of Being 결핍된 주체 ● I.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 짐짓 거룩하게 들리는 이 문장은 국내의 한 대기업이 2010년 자사 슬로건으로 내건 무시무시한 광고 카피이다. '~리라'라는 일본 특유의 문체를 사용한 것도 거슬리지만, 무엇보다도 미래를 확신하는 듯한 단정적인 어투는 마치 '기술이 인간을 지배한다'라는 공상과학영화의 소개글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광고 카피는 먼 미래에 대한 수식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보다 윤택해 졌음은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기술에 의해 구속을 받기 시작했고, 급기야 더 이상 그것의 도움 없이는 살아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묵과할 수 없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은 마치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처럼 촌스럽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사회는 우리가 IT 강국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전 국민이 얼리아답터화 되어가는 것을 성급하게 종용했다. 기술력만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이며,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일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정책임을 전 국민에게 주입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결과는 개인의 삶 속에서 웃지 못할 헤프닝으로 발생하곤 한다. 무반주로 노래를 불러본 기억도 이젠 희미하고, 후렴구 외에는 생각해 내는 가사가 없다. 네비게이션의 기계음 없이 집 밖을 나선 다는 것은 큰 모험이 되어버렸다. 새로 출시될 스마트 폰을 몇 달 전부터 줄 서 기다리는 오타쿠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반 전화기로 가족들의 핸드폰에 전화를 넣을 경우에는 번호를 한참이나 생각해 보고 눌러야 한다. 그마저도 틀리기 일쑤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이러한 상황들은, 그런 이유로 기억력의 감퇴와는 무관해 보인다. 현대인의 삶 속에 기계나 정보처리 장치 등은 더 이상 물질적 대상으로 서가 아닌 독립적인 타자로 존재한다. 합리성을 핑계로 기계에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서 기계는 우리의 삶 속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것들을 내 신체의 일부, 혹은 생활의 일부라 여길 지언 정, 나와는 다른 차가운 기계나 컴퓨터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도리어 스스로를, 혹은 주변 사람들을 기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 마저 든다. 죄의식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들이 난립하고 게임에 중독되어 끼니도 거른 채 며칠밤을 컴퓨터 앞에서 꼬박 세우는 세상. 세계 최고 수준의 낙태율과 아동 성범죄율, 끔찍한 존속살해와 부정 부폐가 아침뉴스와 마감뉴스를 장식하는 사회. 인간은 없고 기계와 돈과 욕망만이 난무하는 사회. 자제력과 통제력을 잃은 발전 일변도의 사회는 더 이상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 다양한 공급 속에 주체는 수요를 직접 선택해 나간다. 과잉된 공급은 주체들에게 인위적인 수요와 잉여의 욕망을 부추기기에 이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인간의 다양한 욕망들이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사회이다. 자본과 인간, 그로 인한 무절제한 욕망의 발생은 결국 산업화, 자본화, 기계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무색화 시키게 되었다. 시대는 다시금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기를 선전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마치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살아 가는 방식이라며 자극한다. 시대의 지속적인 프로파간다는 주체의 생활과 이념을 마비시킨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네오 나치즘 휘하에서 우리는 유태인이 되고 폴란드인이 되었다. 네오 나치즘은 갯벌과 우거진 숲을 살리는 활동을 사회발전에 반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법이라는 잣대를 근거로 자신의 이익을 침범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위선적인 도덕이라고 지적한다. 스펙을 보지 않는 아날로그식 순애보를 대중들은 촌스럽다고 비웃는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빌려 온 자연을 빼앗겼고, 윤리와 도덕을 약탈당했으며, 순수한 에로스를 박탈당했다. 특권의식으로 물 든 엘리트계층 때문에, 그리고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는 1%의 욕망 충족을 의해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한 채 조정되어지고, 이용 되어진다.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세상을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II. 인간의 욕망은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결핍에서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욕망이 존재 하는 이유는 주체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어 그것을 채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역설로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느끼게 되는 시점이야 말로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 중에서도 대표적인 욕망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 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헤겔의 경우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습성을 인간의 대표적인 욕망으로 규정 지었고, 프로이트는 상실된 성적 대상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를 욕망이라고 말했다. 또한 라캉은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욕구 사이에 놓인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을 획득하려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학자들간의 강조점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인간의 욕망을 결핍으로, 그리고 결핍된 것을 획득하려는 심리적인 활동으로 규정해 왔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에는 오히려 반대의 입장을 피력한다. 그에 따르면 주체에게 결핍된 부분이있기 때문에 욕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에게 욕망이 이미 존재해 있기 때문에 결핍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에 대한 욕망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돈이 진정으로 부족한 자에게는 필요한 수준의 돈만 정확하게 생기면 더 이상 욕망은 증식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단순히 추상적으로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불필요한 욕망들을 토로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사회는 정상적으로 주체들의 욕망이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불필요한 욕망들을 양산하며, 급기야 이러한 과도한 자본주의적 욕망은 당사자를 파멸로 이르게도 하며, 혹은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놓치는 오류를 범하게도 한다. 권력과 물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공익광고성 멘트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들을 대체할 새로운 맹목적 대상을 만들라는 지시뿐이다. 근대화 이후 지금까지 대부분의 종교 갈등이나 세력간 무력충돌이 개인이나 집단의 불필요한 욕망과 결핍으로 인해 발생되었듯이 이성의 한계, 욕망의 폭발은 헤게모니를 부추기고, 이것은 결국 전쟁으로 표출된다. ● 그렇다면, 잃어버린 감성, 나아가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금 인간 본연의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뿐 이다. 일찍이 노자는 인위적인 것은 오히려 인간 본래의 자연적 성품을 잃게 하고 순수성을 더럽히는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은, 법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나 지식에 의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개조되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에 상실하게 될 인간 고유의 품성에 대해 미리 경고한 것이다. 노자의 경고는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III. 12인의 참여 작가들은 결핍된 주체의 세속적 욕망으로 인해 정작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짚어 나간다. 그것은 연인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자아를 되찾는 노력이기도 하다. 혹은 욕망을 자극하고 세뇌시키는 사회와 미디어의 횡포를 고발하는 적극적 행위이기도 하고, 나아가 이상적인 사회의 본질에 대한 냉소나 푸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현대사회가 나날이 산업화 되어 가고, 디지털화 되어 가며, 자본 위주로 변질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잊고 지내는 소중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참여 작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피지배계층에게 스스로가 느끼는 끊임없는 결핍이 혹시 지나친 욕망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를 되묻는다. 더불어, 무절제한 욕망으로 인해 일그러져 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감성의 회복과 역동에 기대를 거는 또 다른 형태의 욕망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지금 여기, 2010년의 세상은, 우리가 왜 이곳에 놓여졌는지 그것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행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곳이다. 물론, 이 여행을 12인의 작가들과 함께 할 것인지, 관둘 건지의 판단은 온전히 그대의 몫이다. 여행에 동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은 계속 된다. 다만, 죽음만이 충족시켜 줄 그대의 결핍된 욕망만이 남겨질 뿐이다. ● "자세히 들여다봐. 천천히 읽어 보라구.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런거야. 중간에 보거나, 건성건성 보면 재미가 없어. 그곳에서 나와서 보려고 하면 흥미가 없는 법이야. 들어가봐. 신발을 벗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요량으로 들어가봐."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 ■ 윤상훈
Vol.20100410c | 결핍된 주체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