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주관_갤러리피그
2010_0303 ▶ 2010_0317 초대일시_2010_030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피그 청담_GALLERY PIG 서울 강남구 청담동 93-11번지 KOON 빌딩 B1 Tel. +82.2.545.7082 www.gallerypig.com
2010_0309 ▶ 2010_0326 작가와의 대화_2010_0303_수요일_03:00pm 관람시간 / 09:00am~04:00pm
외환은행_평창동 지점 서울 종로구 평창동 323-4번지 Tel. +82.2.395.8160 www.keb.co.kr
2010_0312 ▶ 2010_0328 관람시간 / 10:00am~10:00pm
백암아트홀_BAEKAM ART HALL 서울 강남구 삼성동 170-5번지 Tel. +82.2.559.1333 www.baekamhall.com
2010_0515 ▶ 2010_0521
길상사_KIL SANGSA 서울 성북구 성북2동 323번지 Tel. +82.2.3672.5945 www.kilsangsa.or.kr
옴(옴 : 불교의 진언(眞言)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음절.) 우주의 문이 열리면서 순수한 정신 푸루샤(purusa)(푸루샤(purusa) : 인도 베다교(Veda敎)의 원인(原人)을 상징하는 인도철학상의 개념.)가 빛을 잃어버리고 그 빛이 사라진 자리에 본질적 욕망의 파라크리티(prakrti)(파라크리티(prakrti) : 물질적 원리.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sa)와 대치(對置).)가 역동적으로 일어나면서 순수의 시대가 끝나고 욕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잠들어 버린 순수한 영혼들은 대지 속으로 숨어들어 나무의 정령이 되고 새로운 꿈을 꾸면서 긴 기다림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또한 욕망의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에 길들여져서 동질적 이성을 잃어버리고 파괴적 본성으로 자신의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어도 욕망의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길을 걸어가는 작가 지노. 그는 이상향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작가다. 이 메마른 대지위에서 인간의 순수정신이 상실된 이 시대에 욕망의 어두운 뒤편에 숨어있는 니르바나(nirvana)(니르바나(nirvana) : 열반(涅槃)의 원어.)를 꿈꾼다. 그의 마음은 이미 타클라마칸의 사막(타클라마칸의 사막 : 중국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 서부, 타림 분지에 있는 사막.)을 지나서 천산산맥(천산산맥 : 중국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에서 키르키스탄에 걸쳐 동서로 뻗은 산맥.)의 설산을 넘었으며, 그의 앞을 막고 있는 그 어떠한 난관도 그의 구도적 열정을 막지 못한다. 그는 지금 그곳으로 그의 영혼적 메시아 달마를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나고자 했던 달마는 이미 그곳을 떠난지 오래 되었으며, 인간의 욕망세계로 들어와 있어 그가 찾는 순수의 정신 달마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만난 달마는 이미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탐욕에 눈은 튀어나왔으며, 귀는 세상의 혼탁한 소리를 쫓아서 이미 떠났으며, 입은 달콤한 꿀맛에 취하여 더 이상 다른 맛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미 순수의 달마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노 그의 몸과 정신은 이미 지쳐서 그의 육신을 잘게 잘게 쪼개어서 대지에 버리고, 그의 붉은 피를 뽑아서 강물에 띄워도 그는 달마를 볼 수 없었다. 단지 그 앞에 놓인 것은 더 아픈 현실과 더 깊은 고통만이 그의 벗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지금까지의 기나긴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그 옛날 인도 붓다가야(붓다가야 : 인도 북동부 비하르주(州)에 있는 마을.)의 깨달음의 나무 아래에서 만난 수행자를 생각하면서 깊은 명상에 잠긴 것이다. 마음은 바다처럼 고요하고 저 하늘에 순백의 달이 떠있는 깊은 밤에 그는 한 송이 꽃을 보면서 달마를 만난 것이다. 그것은 환희이며, 기쁨이었다. 그는 달마를 만난 것이다. 그곳에 더 이상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얼굴의 백호 미간에는 한줄기 서광이 비치며, 일그러진 눈 속에는 순수의 정신이 깃들었으며,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일어나고, 머리 위로는 수많은 대지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욕망의 시대에 순수정신 맑은 미소를 만난 작가 지노. 그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작가이다. 현실의 온갖 욕망 속에서 그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고 태초에 잃어버린 순수한 영혼을 찾아서 길을 다니던 그는 이 시대 끝에서 달마를 만난 것이다. 그가 만난 달마는 세상의 끝없는 욕망과 집착과 아집을 벗어버린 모습이다. 이미 달마의 얼굴에는 더 이상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세계를 비추는 꽃이 피었으며, 그의 눈은 깊은 호수보다 고요하며, 그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순수 정신과 합일한 상태이다. ● 그곳에 지노가 서 있다. 붓다가 깨달음의 나무 아래에서 고요한 니르바나를 성취하신 후 달마가 양자강을 갈대로 건너서 어머니의 땅 대륙으로 들어온 그 대지 위에서 맑고 순수한 정신을 알아차린 지노. 마치 아침의 이슬 같고, 물거품 같으며, 환상처럼 다가오는 아지랑이처럼 스쳐 지나가는 삶 속에서 잃어버린 정신을 찾아낸 그의 뜰 앞에 한그루의 잣나무가 서 있다. 그 잣나무를 통하여 그는 자연과 소통하며, 우주와 합일되는 순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나의 정신이 이 우주와 하나임을 알아차린 순간 더 이상의 욕망도 없는 그 속에 달마가 있고, 이미 하나가 된 그 자리에 한그루의 나무만이 남아있다. 그곳에 더 이상 지노는 없다. ■ 명본 스님
달마 ●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보리다르마]이기에 音寫해 [보리달마], 줄여서 [달마]라 한다. 인도 향지국 왕자로 인도 불교의 석가모니부터 28대 조사로 중국에 이주, 포교함. 중국 선종의 初祖로 9년 면벽 후 바로 2조 혜가에 전법하고 사망했다. 중국에서 활동한 인도인이라는 특이한 이력과 용모 덕분인지 달마에 얽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서역에서 중국으로 갈 때 갈댓잎을 타고 강을 건넜다든지, 면벽수련 중에 졸음을 피하려 눈썹을 잘라냈는데 그것이 자라나서 차나무가 되어 스님들이 차를 즐겨마시기 시작했다는 등의 여러 일화가 있다. 이런 일화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달마의 용모에 얽힌 내력일 것이다. 달마도에서 보듯 달마는 무섭게 생긴 것이 특징이지만, 전설에 의하면 달마는 원래 아주 잘생긴 미남자였다고 한다. ● 달마는 젊은 나이에 이미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몸과 영혼을 자유자재로 분리할 수 있었는데, 한 번은 영혼이 빠져나간 달마의 몸을 발견한 아수라가 자신의 몸을 버리고 달마의 몸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몸을 도둑맞은 달마는 하는 수 없이 아수라의 몸을 빌어 살게 되었고, 그 후로 달마는 악귀들이 보이는 족족 때려잡았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귀신들은 달마의 얼굴만 봐도 멀리 달아나기 때문에 달마도는 축귀의 효력이 있다고 한다. ●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달마는 악마의 몸에 깃든 성자인 것이다. 내가 달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2007년부터 「다이달로스의 일생」이라는 큰 제목으로 다이달로스를 중심으로 그리스 신화의 여러 일화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달 아래 이카로스'를 시작으로 「투우장의 미노타우로스」까지 두 가지 이야기를 끝냈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는 다이달로스의 아들인 이카로스 세대의 이야기였고, 그 다음으로 할 이야기는 다이달로스 본인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자니 다이달로스의 모습을 형상화해야 했다. ● 내가 본 다이달로스는 '사람으로 살아남은 자'이다. 그는 신과 짐승의 사이에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그것을 지켰다. 미노스, 파시파에, 아리아드네, 이카로스, 미노타우로스 등은 얼핏 다이달로스 때문에 변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 신과 짐승, 선과 악,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것. 그것이 다이달로스라고 느꼈고, 그것을 그리려 했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던 차에 달마도를 접하게 되었다. 미추와 선악이 공존하는, 악마의 몸에 깃든 성자. 나는 곧바로 이 주제에 빠져들었다. 달마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꽃, 바람, 보석 등의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그렸다. 달마의 얼굴이라는 종착점은 정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정하지 않은 채 그저 꽃밭으로, 숲으로, 강으로 의식을 옮겨 떠오르는 것들을 그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엄혹한 죽음의 얼굴을 한 달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즐거운 그림 그리기를 끝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살고자 할수록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숙명을 지닌 인간처럼. 어쩌면 다이달로스의 얼굴이 달마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린 달마는 이렇게 생겨났다.
달마나무 ● 잠을 잔다는 것은 작은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잠에 들고, 죽고, 날마다 우리는 깨어, 살아납니다. '사람'은 '삶'을 다르게 발음한 것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살기위해 애쓰지만,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깨어날 수 없게 됩니다. 꿈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작은 죽음 속의 작은 삶입니다. 꿈을 꾸는 것은 살려는 것이고, 가끔은 그 꿈에 놀라 깨어납니다.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생생함에 놀라합니다. 나쁜 꿈, 악몽에는 그런 생생함이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악몽을 그려왔습니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보이는 순간의 그 생생함을 담으려 했습니다.
오랫동안 어둠 속을 들여 보다 만난 것이 '달마'입니다. 달마는 제게 어둠과 밝음,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의 경계로 여겨졌고, 그것을 그리기 위해 저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진 악인의 초상'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이 시도를 통해 아주 오래간만에 '밝음'과 '색깔'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나무에 점점 빠져들어 지금은 나무만 그리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한 뒤, 제가 그리는 나무들은 앙상한 겨울나무들입니다. 이 곳 팬실바니아는 '팬의 나무'라는 그 지명처럼 나무가 많습니다. 산에는 완만한 경사를 이룬 언덕을 따라 어지간한 이층집은 가볍게 내려다볼 만큼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델라웨어 강가에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 또한 장관입니다. 차를 타고 강변을 달리면, 도로를 뒤덮은 나무그림자에 햇빛이 눈부시게 깜박이고, 길가의 나무들이 춤추듯 크게 팔 벌려 몸 뒤트는 모습에 몽롱한 기분이 들 정도 입니다. ● 집에도 나무가 많습니다. 제가 묵으며 작업하는 별채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본채로 가는 중에도 수시로 멈춰 서서 나무를 우러러보곤 합니다. 나무는 보면 보면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납니다. 천변만화하는 선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성상을 버틴 그 생명력은 경이롭기조차 합니다. 나무는 늘 살아온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세월이 새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태양을 향해 솟구치듯 자라던 시절, 울창하게 잔가지를 뻗으며 차양처럼 넓게 나뭇잎을 펼치던 시절, 가장 푸르고 울창하던 시절,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에 맞서 싸우던 일. 결국 그 힘을 견디지 못해 바람에 팔을 내밀어 큰 가지 하나를 꺾어낸 일, 힘을 잃고 곤두박질치던 가지에 새로 여러 줄기를 내던 시절, 그 줄기를 덩굴이 타고 오르던 일, 마침내 다시 잎을 맺고, 가지 끝에 새들이 둥지를 틀던 날.... 이런 모든 삶의 변천사를 그래프처럼 꼼꼼히 그려 넣은 것이 바로 나무입니다.
제가 만난 나무들 중에는 잊혀지지 않는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의 날개처럼 꺾어진 가지를 가진 나무. 날렵한 붓놀림으로 그린 듯한 나무. 삶의 의지의 화신인 것처럼 하늘로 수많은 가지를 올려붙인 나무. 비현실적인 초록색으로 요정처럼 눈밭에 선, 수만의 연두빛 잎새를 팔랑거리던 나무. 강물 속에 쓰러져가는 나무. 산비탈에 꺾여 넘어진 채 말라가는 저 많은 나무둥치들. 그 허벅지뼈를 닮은 것들. 큰 바람 분 다음 날 아침, 바람을 그려 놓은 듯이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누운 수천의 가는 버드나무 가지들... 이렇게 다양한 나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끝내지 못할 겁니다. 한 줄기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치듯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입체를 이루고 서 있는 살아 숨 쉬는 서사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루고자하는 '다면서사조형체'의 모형입니다. ● 나무를 그리는 동안에는 능률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무처럼 천천히 그려나갑니다. 능률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행위를 노동으로, 벗어나야 할 고통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적어도 나무를 그리는 동안에는 능률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나무는 능률적으로 자라지 않으니까요. 나무를 그리는 것은 첫 눈 쌓인 벌판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길이 없으니 지도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해를 따라 뽀드득 뽀드득 걸어가면 길이 생겨납니다. 천천히 한발 한발 눈밭을 걸어가듯이 점을 찍고 선을 그어나갑니다. 나무를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나무를 행위하는 것입니다. 나무를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그리거나 틀리게 그릴 일도 없습니다. 나무를 그리는 일은 나무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만났던 나무를 기억하고, 그 나무가 보낸 시간을, 그 세월을 상상하는 것이 제가 나무를 그리는 법입니다.
우선 어긋나기 건, 마주나기 건, 나무가 자라는 방식을 상상합니다. 규칙에 따라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을 그립니다. 잔가지가 늘어날수록 가지는 점점 휘어지고, 가지가 휘어지면 어느 순간 그 가지에 바람이 입니다. 바람은 다시 새로운 규칙이 되어 그 뒤에 그려지는 가지는 바람에 의해 흔들리고, 휘어지고, 꺾여나갑니다. 가지가 늘어날수록 바람도 세게 불고, 바람이 불수록 구름이 밀려옵니다. 이리 저리 변하는 구름을 따라가다보면, 그 뒤로 해가 뜨고 달이 집니다. 별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렇게 한참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나무 한 그루가 종이 위에 서 있습니다. 달마나무입니다. ■ 지노
Vol.20100303d | 지노展 / JINO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