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2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갈라_GALLERY GALA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3-35번지 Tel. +82.2.725.4250 blog.naver.com/joychamm
미래의 산책자에게 ● "플라뇌르는 다채로운 풍경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맛보는 방관자이다. 동요하는 것이건 움직이는 것이건 덧없는 건이건 영원한 것이건 무엇이건 좋다. 집은 아니지만 어디서나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모든 사람을 바라보고 당신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지만 정작 자신은 그 모두에게 숨어 있다." ● 『악의 꽃』으로 유명한 19세기 시인 보들레르의 말이다. 플라뇌르(flaneur)는 '산책자'를 의미한다. 보들레르의 잠언을 따라 몸소 파리 산책을 실천했던 한 에세이스트는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사소한 사건들이나 우연한 장면들을 구경하며 자기 내면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걷는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걸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느끼고, 삶을 고민한다. 어느 인문학자는 "걷는 사람에게 절망은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은 곧 걷기가 찬란한 행복은 아니더라도 소박한 행복은 안겨준다는 말일 것이다. 기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걷다보면 사는 게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세상이 달리 보이고, 다르게 느껴진다.
'그린다'는 것도 곧 생각하는 것이다. 그림은 사유와 성찰의 결과물이다. 무언가를 그림으로써 세상을 재현하고, 존재를 고민하게 된다. 기실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남다른 일이다. 그리기를 업(業)으로 삼은 사람치고 남의 손에 떠밀려 그리게 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오롯이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다. 이 세상에 그림처럼 자신과 내밀하게 연결된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까닭이다. 그것은 운명이라는 말로 치환되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세상은 얄궂은 법. 그 선택이 고통과 환희의 순간이라는, 서로 다른 것들이 담쟁이덩굴처럼 딸려 나올 줄은 미처 몰랐으리라.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원망할 필요도 없다. 원래 운명이란 그처럼 가혹한 법이니까, 피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 그림이란 누군가의 생생한 삶의 저장소이다. 그곳에는 한 사람의 이성과 감성, 감각과 취향이 얼기설기 엮어 있다. 세상이 '예술가'라고 칭하는 사람만이 그림을 매개 삼아 그림 '속' 세상과 그림 '밖' 세상을 볼 수 있다. 마음 가는 대로 걷다보면 그림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게 된다. 아니, 그림을 보는 법과 세상을 보는 법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예술가는 자신이 갖지 못한 인문적 관점으로 예술을 보고 세상을 보게 된다. 예술을 만나고 세상과 만나게 된다.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림이란 본능으로 그리는 것이다. 전시 마감에 닥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느라 작업실에 처박혀 있는 게 힘에 겨운 건 이 때문이다. 자신의 본능에 이끌리는 게 아닌, 암묵적인 강요에 의해 그림을 그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인식과 사유의 벌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녀야 할 작가들이 세상이 정해 놓은 공식에 감금되어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려면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 『소설가의 각오』를 쓴 마루야마 겐지가 강조했듯이 무언가 새로운 발견이 있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이에 새로운 무언가와 만날 것 같은 농후한 기대감을 심어줘야 한다. 물론 그 발견과 기대감이란 각자의 살아온 모양새처럼 다르겠지만 말이다.
누구나 예술가라면 완성된 예술을 꿈꾼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많은 이들이 이미 완성된 다른 이의 예술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다른 이의 시선에서 자신의 그릴거리를 찾는다. 유행과 시류에 휩쓸려, 또는 평론가의 취향에 은근슬쩍 묻어가려 한다. 그동안 서툴게나마 미술현장과 강단에서 목격한 바에 따르면 이 땅의 많은 젊은 작가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 듯하다. 하나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미 자신이 하고픈 얘기를 제한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원하는 그림을 재현하고 반영하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는 잠재력을 간취하기란 요원해진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붓을 놓고 잠시나마, 아니 오랫동안 내 안의 나를 찾아 어디론가 떠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예술가만의 여행을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숨어서 자신이 선택한 장소를 헤치고 다니는 관찰자로서의 예술가로 말이다. ● 빈곤의 시대다. 물질은 풍요로울지언정 정신은 공허한 시대다. 예술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통의 방법 위에 새로운 방법을 얹히는 것을 고민하기보다 설익은 개념을 서둘러 이식하는 게 옳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림을 직업이자 소명으로 삼은 이들이 내놓은 작품치곤 그 고뇌의 정도가 마뜩치 않다. 예술의 언어들이 대상을 찾지 못하고,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그림이 사고 팔리는 험한 바닥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미술의 실상이다. 미(美)와 추(醜)로 세계의 근본을 마주하는, 미술의 가장 보편적인 기능은 상실의 시대를 지난 지 오래다. 이럴 때 화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떠남과 머묾뿐이다. 예술의 공간을 떠나 삶의 공간으로 잠시 처소를 옮기는 것이다. 그곳에 한동안 머무는 것이다.
붓을 든 사람치고 노마디즘(유목주의)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노마디즘의 전성시대이자, 과잉시대이다. 국가와 지배, 억압에서 '탈주'하는 삶의 궁극의 상태는 모든 예술가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이다. 작가 김잔(Kim Jan)도 유목에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김잔의 작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회귀하기를 반복하는 답답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떠나고 싶은 '욕망'과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갈등'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잔이 그려내는 이미지의 종착점이 '여행'이라는,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를 향한 본능으로 그려지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에게 그리기란 평범한 일상과 그것을 벗어난 어딘가를 산책하는 운명 같은 출발점이다. 초록이 지배하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아슬아슬 오가는 작가가 만들어낸 풍경은 왠지 신비롭다. 일상에서 접하는 이런저런 매체들이 만들어내는 상징적 이미지가 조합되었기 때문이리라. 그에게 여행이란 세상과 자신의 삶의 범주에 속해 있지 않은 공간에 스스로를 내어놓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영특한 작가는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간파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의 그림은 여행지의 낯섦과 친숙함, 그 어딘가에 자리한다. 우리가 낯선 곳으로 가방을 꾸릴 때 가슴이 두근거리듯이 그가 붓으로 찾아가는 미지의 여행은 기대와 두려움이 포개어 있다. 김잔은 바로 그 순간을 사랑한다. 시점이 바뀌고, 살아가는 방식조차 다른 낯선 세계에서 우러나는 어색한 희열을 그리워한다. 그의 작품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질감으로 우리의 망막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한 점의 작품으로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린다는 행위로 고통스러워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0과 1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이때에 붓과 캔버스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씨름하는 모습은 순진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유행하는 이미지를 나열하고, 그 속에 인간의 본질을 물리적으로 구겨 넣으면 만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시대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여전히 고민하는 화가의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내가 보아온 김잔이 그런 작가이다. 그는 늘 예술이라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아도 되는지 노심초사해 한다. 그는 육감으로 세상을 유혹하기보다 자신 안에 숨쉬던 기억들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소리에 안타까워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이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에 소리 없이 통곡한다. 그리고 그 소리의 조각이 흩어진 곳을 찾아 나선다. 세상 사람들이, 심지어 예술가들조차 그 소리에 등을 돌릴 때, 자신만은 잊을 수 없다며 먼 길을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세상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나서는 일은 서러운 일이다. 하지만 김잔은 알고 있다. 귀를 틀어막아도 사라지지 않는 그 소리에 침묵하기란 더더욱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본인도 알 수 없는 그곳으로. 김잔에게 여행이란, 아니 그림이란 어디를 돌아보아도 절망뿐인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절절한 몸부림이다. 나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이 짧은 글이 어딘가로 홀연히 떠날 작가 김잔을 위한 작은 노잣돈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직 반환점을 채 돌지 않은 그의 여정을 기운차게 응원하는 진심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의 발길이 닿는 어딘가에 세상이 방기한 진정한 아름다움이 홀로 빛나고 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난 후, 김잔의 기분은 지금보다 한결 후련해져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돌아오는 길의 그의 미소가 그리워진다. ■ 윤동희
Vol.20100217h | 김잔展 / KIMJAN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