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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주말_12:00pm~04:00pm
The Gippsland Art Gallery-Sale Port of Sale Civic Centre 68-70 Foster Street Sale 3850 in Australia Tel. +61.3.5142.3372 www.wellington.vic.gov.au
작업은 작가의 삶에 확장의 네트워크로서 기능하는가, 혹은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작업에 의하여 작용 하는가. 여기에서 작업이란 작가가 만나는 환경, 사람, 매체 그것들과의 소통과 감각적 감응, 구상, 그리기 혹은 렌즈로 보기, 읽기, 사유하기 등의 총체적 과정으로서의 그것을 의미한다. 작가의 일방적 주체에 의한 작업이 아닌, 반대로 작업에 의하여 작가의 몸이 무한공간으로서 변용하는 역량을 가진 신체-기계의 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나 자신 스스로를 누구에겐가 맡기는 '애희를 부탁해(Caring for Aehee)'라는 프로젝트는 서울과 부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바 있다(2005~2008). 나를 (나로부터) 위탁 받아 일정 기간 동안 보살핌을 한 사람들을 'Adult-sitte'라 칭 했으며 그들은 교육이나 훈육의 형태로, 혹은 정서적/육체적인 보살핌으로 나의 몸과 생활을 관리 하였다. 그 기간 동안 나 자신과 그들에게 있어 스스로 어느 정도의 번거로움이나 거부감 또는 인내심 등의 고통을 수반한, 그러나 애정을 받고/주는, 상호-쌍방향적 운동의 흐름은 수년간 수 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이미 진행(2003~ )되었다. 나는 '되기'작업의 일환으로 '핀업 걸-되기(2003~2004)'에 이어 스스로 '아이-되기' 혹은 '애물-되기(2005~2008)'라는 배치 안에 밀어 넣고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이 원하는 '다른 아이-되기' 혹은 '다른 애물-되기'의 과정을 포착하였다. 이 작업은 슬쩍 다른 환경으로 넘어가서 호주에서(2009) 다시 한 번 또 다른 모드로 진행된다.
애희_쓸모 없음이 백치를 통해 구멍을 찾다. Cowwarr Art Space에 레지던시 작가로 입주하자마자 처음으로 든 생각은 과연 이런 제약적인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었다. 도시생활에 맞추어 매뉴얼 된 내 몸에 있어서 한적한 시골 마을은 그저 제약적인 환경일 수밖에 없다. 도시 안에서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관계함에 있어서만이 유용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한 순간 환경의 이동이 기존의 유용했던 모든 내 몸 쓰기의 사용법들을 겁탈, 해제시키는 상황을 만든다면. 혹은 그것들을 써 먹을 장소가 애시 당초에 아니었다면 그 사용법을 달리하거나 일단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 익숙한 언어로 수다 떠는 즐거움을 참고 잘 안 터지는 핸드폰의 울림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으며 누군가 운전 할 때를 기다렸다가 시장에 가고, 사람구경을 한다. 또는 이 공간이 개방되는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인터넷 게임이나 메일확인은 어쩌다 가끔씩만 하면 된다. 갑갑함이 족쇄를 채우듯 수족을 묶고 내 스스로 쓸모 없음의 깨우침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게 만든다. How have you been? 숲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없나 보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새로운 환경과의 접속을 위해 그리고 새 사용법을 취득하기 위해 기존의 것들과의 청산이 필요하다. 자발성도 주체성도 없이 백치가 되어 그 환경을, 숲을 마주할 때, 그때 그 구멍이 보인다. 바로 새 플러그를 꽂을 구멍이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타이머를 작동시켜 멀찍이 떨어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를 그보다 조금 더 멀리서 Clive가 촬영하고 있다. 셀카 놀이중인 나를 찍고 있는지 나를 향해 삼각대에 의지하여 홀로 서있는 저 찍는 자 없는 무인카메라를 찍고 있는지 그 둘을 포함하는 전체를 포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그저 그의 카메라를 테스트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다시 말해 나와 내 카메라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는 그의 대답이 나를 진동시킨다. 그 공명의 물결이 넘쳐흘러 이리저리 나와 이 환경 사이사이를 흐른다. 플러그를 꽂고 사용법을 알아낸 것이다. 이제 작동 시키는 일이 남았다. ● Art Space는 주말마다 개방이 되는데 가족단위와 그들의 친구들, 미술 관련자들, 여행자들이 주된 방문객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놀이(작동)를 제한한다. 한 사람은 모델이 되고 한 사람은 사진가, 또 다른 한 사람은 캠코더-맨-되기다. 예를 들어 방문객들 중 어느 아저씨는 사진가가 되어 모델을 사진 찍고, 그의 아들은 사진가가 된 아버지를 캠코더로 촬영하는 방식인데 어떨 때는 친구들, 가족들끼리 역할을 바꿔가며 진행할 때도 있었으며. 주말마다 방문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혹은 동네 이웃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사진가는 스냅 카메라로 모델을 촬영하고 캠코더-맨은 그 모델을 찍는 사진가를 영상으로 촬영한다. 모델은 포즈를 취한다. 여기서 Photographers(모델을 촬영하는) - Model(사진가의 연출에 따라 포즈를 취하는) - Camcorder Men(모델에게 주문하고 있는 사진가를 다시 촬영하는), 즉 이 세 항의 계열화에 정의되는 혹은 구성하는 최초이자 단 하나의 룰(나를 조작하는 매뉴얼)이 적용/배치된다. - 사진가는모델에게주문을할수있다. - 이 한 가지의 룰로 인해 세 항간의 놀이가 발생/촉발된다. 나름 진지하게 각도를 보고, 공간을 선정하고 빛을 보고, 모델에게 포즈를 주문한다. 그 진지한 지시(direction)는 고스란히 비디오에 담긴다. 모델은 사진가들의 지시에 따라 포즈를 취하느라 연신 정신 없다. 여기서 모델은 바로 나이다. '핀업 걸(Pinup-girl)-되기' 프로젝트와 두 번에 걸쳐 진행된 '애희를 부탁해(Caring for Aehee)' 프로젝트 등 '무엇-되기'수행을 이미 몇 차례 경험하였던 나의 몸은 그저 그들에 의해 기능/작동 할 뿐이다. 이번에는, 기존의 내 스스로 기능/작동하였던 '무엇-되기' 라는 배치마저도 제거해 버린다. 훨씬 자유롭다. 총을 들고 서 있는 전사도 되고, 시골언니도 되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을 법한 연출 속 주인공도 되고, 호주의 전통적인 풍경화 앞에서 웃음을 짓는 동양여자도 되고, 온갖 I.T기계들에 홀려있는 문명인에, 나무꾼에, 아이가 되어 뛰고, 텀블링을 하고, 꽤 분위기 있는 여인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사진가들의 주문에 의한 끊임없는 '-되기becoming'의 과정 ● 애희_Look at me! Smile! That's it…! 사진가…그들이 나의 몸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나는 그들과의 접속을 통해 무엇이 되고자 하였는가. 그도 아니면 그 두 항 사이에 위치하는 어느 지대를, 제 3항을 통해 포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는가…….왜. 국적, 연령, 성별, 전문/비 전문 관계없이 구성된 작업 속의 사진가들은 내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간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다. 15명의 각기 다른 사용법들과 접속된 내 몸은 새로운 모든 가능성을 허용하고 '나'를 변용 시켜 수없이 많은 '나'를 창출한다. 매 순간마다 그리고 조건마다 달라지는 '나'들로서 스스로의 삶을 확장시키길, 그리고 새롭고 다양한 이질성들을 창출하기를 바라며 그 변화무쌍한 접속들과 회로들에 신체를 개방한다. 사진가들의 다양한 판타지만큼이나 다양한 배치가 요구하는 대응성을 수립하기 위해 모델-나는 부지런히 몸을 만들고 움직이며, 순응/훈련을 한다. 그것은 나의 익숙한 몸짓과 습관, 기능, 성격, 위치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모델-기계로서 필요한 조직상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신체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작용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며, 다채로운 배치들 속에서 주체이길 멈추고 사건(혹은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다시 사진가들이 내 몸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던, 그들이 포착한 결과물들 안에서 '예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양단되어 무시되고 버려지거나 억압/배제되어 선택되는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지대, 즉 무한 한 외부로의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무시되고 버려질 것들이 '버려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애희_Fail photo… 멍청이 사진이라고 하는 것들에 관하여. ● 사진가들은 촬영이 끝난 후 자체 평가를 하였는데 이것은 빛이 엉망이고 저것은 포커스가 엇나갔으며, 또한 그들의 의도와 동떨어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며 나름의 분류를 하였다. 흔히 말하는 fail photo- 좋음/나쁨의 판단을 이미 내포하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나쁨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예를 들어 사진가의 전적인 의도와 지시가 그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 갖가지 이미지가 관념적이고 고정적인 이미지의 존재방식에 따른 올바른 포커스, 각도, 빛의 세기...등의 양적/질적 수준에 못 미치는 것들을 의미했다. 사진가들의 선택에서 유감스럽게도 열외 되어 버린 그 멍청이 사진들이 한데 모여 뒤죽박죽 섞여 있는데, 바로 여기, 즉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부터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을 목격한다. 그리고 버려질 멍청이들을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고정적이고 관념적인 동일화로 포획될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주의 힘을 획득한다. 혹여나 그 코드에 포획되었다 할지라도 그것마저도 넘어설 수 있는 욕망. 사진 속 그것이 나든 아니든 상관없다. 다양화의 차이를 실험하였던 내 몸은 그들이 의도한 올바른 사용법만 담아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어떤 하나의 중심에 포섭되거나 동일화되지 않는 이질성들을 구축하는 바로 그것을 향해 일탈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고 아무것도 기호화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
4. 작가와 접속하는 환경, 이미-있는(그러함, 무엇임) 그것을 슬그머니 뒤집어서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꾸기. ● 또한 나 스스로의 '무엇-되기'는 그저 작가 한 사람의 일방적인 접속이 아니다. 그 모든 매개 환경이 나와 더불어 같이 '무엇-되기'로 변용됨을 포함한다. 이는 '어떤'환경 조차 작가와 접속하게 되면 '다른'환경으로, 이미-있던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Cowwarr Art space는 호주의 빅토리아 주 내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에 위치한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새로운 환경에 대하여 내 자신 스스로 이전 환경의 플러그를 뽑고 '백치-되기'를 수행하며 그 환경에 나를 개방하고 다시 익숙해짐과 동시에 여러 가지를 실험하고 접속하여 나의 외부들을 찾아낸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가끔 자동차 소리, 새 울음소리, 작은 소음들과, 조그마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흔적들이 내가 활동하는 건물 안에서 커다랗게 울려 퍼진다. 특별하게 지각하지 못했던 혹은 쉽사리 지나쳐 버렸었던 소리와 사건의 흐름들을 포착한다. 그것들을 서로 통접 시킨다. 거기에다 너무나도 조용하여 지루한 공간들 그 사이사이에 틈틈이 배우고 있는 드럼 비트를 섞어 넣고, 개 짖는 소리를 일정한 리듬을 갖는 소리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 리듬들을 따라 익숙하지 않았던 언어가 박자를 맞추어 노래를 하고 그곳은 어느새 쿵짝쿵짝 리듬을 타는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그 공간은 이질적인 나와 접속하여 엉뚱한 어떤 곳으로 말려들어가 이전과 다른 공간으로 변환된 것이다. ●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미 그러한 무엇'에서 '다른 어떤 무엇'으로 넘어가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 과정을 관찰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화 하는 삶을 촉발하는 것. 따라서 '무엇이 되-어가-기'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중간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수 기간 동안 엉뚱한 것들과 흔쾌히 짝하고 그것들에 따라 변이되어 온 내 몸과 함께 이웃된 것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변화의 흐름을 함께 갖는다. '무엇-되기'로 산다는 것은 변환과 창조를, 새로운 것의 탐색과 실험을 추구하는 것이다. ■ 애희
Vol.20100206d | 애희展 / AEHEE / 朴愛熙 / 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