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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119_화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10_0126_화요일_03: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Insa Art Space of the Arts Council Korea 서울 종로구 원서동 90번지 B1, 1, 2전시실 Tel. +82.2.760.4722 www.arkoartcenter.or.kr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 근 몇 년간 미술 전시에도 활발히 참여함으로서 사진의 외연을 확대해 온 정강은 사진과 미술의 공통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주체의 재현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룬다. 전시부제인『Face, Face, Face!』는 얼굴이라는 단어를 3번이나 겹쳐 쓰면서, 가장 확고한 실체처럼 보이면서도 불가해한 그것을 찾아 나선다. 전시는 사진 작업인 「얼굴 없는 초상」시리즈와 영상 및 사진 작업인 「Looking at yourself」로 나뉘어 진다. 「얼굴 없는 초상」은 시각적 관습에서 화면 중앙에 놓일만한 주인공들의 얼굴을 프레임 밖으로 추방한 역설적 초상들이고, 「Looking at yourself」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이미지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그 자신의 실재를 찾게 한다. 사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진의 존립 근간이 되어왔던 초상 사진은 더 이상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스타일로 찍히고, 소통되어 왔다. 일찍이 인간은 신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그 행복한 시대의 유비의 그물망은 찢어져 버렸다. 얼굴은 손바닥만한 작은 공간 속에 매우 많은 것을 담아왔지만, 이제 얼굴은 그 깊이를 잃고 표면화되었다.
수없이 찍혀지고 수없이 휴지통에 버려지는 사진의 대중화와 오락화가 가능해진 디지털 시대에,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얼굴에 대해 우리는 지나치게 쿨cool 하게 대한다. 현대인은 몇 가지 전형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이모티콘 처럼, 순간순간 대처해야할 몇 개의 가면들을 소지하고 다닌다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강은 여전히 인간의 얼굴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더 이상 이전 시대의 방식은 아니다. 실제보다는 실제를 재현하는 장치들이 더 중요해진 시뮬레이션의 시대에, 정강은 장치의 새로운 배치를 통해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진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졌던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를 소멸시키지만, 순간적인 시공간의 고착을 통해 찍히자마자 향수의 대상이 되는 초상사진은 나름대로 아우라를 보존해 왔다. 초상사진의 이러한 예외성은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인해,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해야 하면서 같은 족속들을 관찰하는데 소홀히 할 수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사물화, 코드화 되어 가는 시점에서 아우라의 상실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제 코드화 될 수 없는 개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사진이 흔해질수록, 인간을 파악하기는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수잔 손택이 『사진론』에서 말하듯이, 사진을 통해 이해 가능한 것이 가정된다할지라도 사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것의 매력과 흥미를 야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강의 「얼굴 없는 초상」은 얼굴을 제외하고 인물을 찍는다. 수많은 복제물을 통해 닳아빠진 얼굴을 제외한다면 어떤 것이 시야에 들어오게 될까. 작품들은 가혹하게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난 얼굴 대신에 그 인물을 이루고 있는 세세한 것들을 부각시킨다. 「얼굴 없는 초상」에서 12점의 사진들은 얼굴이 함께 있었으면 자칫 평범하게 보일 법한 사람들의 일부를 보여준다. 1x1m 사이즈의 정방형 사진은 가로가 잘림으로서 배경이 덜 나오고, 인물에 집중하게 한다. 실내이거나 실외인 배경, 옷차림, 피부의 상태, 소품 등은 대략 찍혀있는 사람의 성별과 나이, 계층 등을 추측하게 한다. 그러나 '힘없고 가난한 노파', '세련된 도시의 여자', '가사 노동하는 주부' 등으로 유형화 되지는 않는다. 대략 예상은 되지만, 특정한 역할자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인물이 유형화 된 사진에 비한다면, 얼굴이 생략됨으로서 관객은 더 많은 것을 읽게 된다. 「얼굴 없는 초상」은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인 머리를 괄호 침으로서 얼굴을 감추지만, 그렇게 재현된 개인을 파악하는데 큰 지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주변에 집중함으로서 얼굴이 있었으면 간과했을 그 사람의 소소한 취향, 그리고 우연히 포착된 독특한 사물의 배열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준다. 작품 「looking at yourself」는 자기의 이미지에 대해 묻는 영상작업이다. 이를 대여섯 점의 대형 사진으로도 담아 1층에 전시한다. 이 작품은 대상을 반영하는 사진 매체가 가지는 거울로서의 측면을 활용한다. 인터뷰에 초대된 28명의 사람들은 비디오카메라, 카메라, 거울, 모니터들이 입체적으로 장치된 곳에 앉아서 30분 정도 자신의 이미지에 관련된 질문에 대답한다. 인터뷰 내용은 '너는 너를 어떻게 보는가?',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 이미지의 차이는 무엇인가?', '거울 봤을 때 또는 모니터를 봤을 때 너의 모습은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등 대 여섯 가지의 공통된 질문이 주어졌다.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모니터와 거울은 질문에 답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재현하는 과정은 적지 않은 심리적 압박이 야기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가령 그것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곳에서의 독백이나, 매우 공적이거나 사적인 공간에서 말하거나 대화하는 식과는 전혀 다른 피드백을 야기한다. 아무리 그들이 인터뷰를 자청한 것이고, 작가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려고 노력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터뷰 대상자를 고문하는 유별난 장치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현대에 인간이 재현되는 방식이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이든 디지털 방식이든 반영의 기구가 아니면 결코 자신의 온전한 모습조차 볼 수 없는 인간은 반영된 자신의 분신과 상호 작용할 수밖에 없다. 피실험자의 실재는 거울이나 전자거울(모니터)같은 환영의 장치들에 반영된 모습이나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 의해 굴절된다. 인터뷰의 결과는 연령이나 성별, 직업 등에 의해 다양한 양상을 띄기는 하였지만, 대체로 자신을 일관성 있고 논리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다는 점으로 모아진다. 인터넷을 통해 프로젝트의 지원자를 모은 이 작업은 그것은 표본추출에 의한 유형학적 접근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는 개인의 개성과 분위기를 자연스러운 한 컷으로 뽑아내는 이전 시대에나 가능할 법한 인물 초상과도 다른 것을 낳는다. ● 정강은 통계적인 추상과 고유한 개인성이라는 신화 모두를 피하고자 했다. 반영의 장치와 언어를 통해 주체는 상상과 상징을 매개로 하는 소통체계에 진입하게 된다. 라깡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심리학이 예시하듯이, 실재는 그자체로 온전하게 만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교감이나 우연한 행운이 따른다면 모를까, 예외는 없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실재는 양자의 틈을 통해 분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것이 개인의 실재를 만나려는 시도에 다양한 층위의 거울을 배치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녹음기를 통해서 들려지는 목소리가 때로 낯설듯이 거울, 특히 모니터 같은 전자거울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반영에도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측정 불가능할 만큼의 차이이긴 하지만,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령 실험 장면을 최종적으로 찍은 사진작품을 보면, 모니터와 나란히 있는 피실험자의 각도에 약간의 차이가 발견되는데, 이 약간의 차이로 전체 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 기계로서 명확하게 확인되는 시차들은, 차이의 체계가 총체적으로 가동되는 거울반사와 언어적 재현에 존재하는 차이에 상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실재가 아니라 상상을 만난다. 또한 자신을 언어로 설명하면서 자신이 창안했다고 할 수 없는 상징을 빌린다. 그 어느 것도 직접적인 실재를 만나게 하지 않는다. 대신 정강의 작업은 종잡을 수 없는 실재를 만나기 위한 긴 우회로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 가장 극적인 인터뷰는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끝에서 생각이 바뀌는 경우였다. 그는 균열과 틈이 많은 상상과 상징의 장치들에 깊이 반응하면서, 이러한 장치들이 종합되어 만들어지는 주체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곧 얼굴의 고정된 재현이 불가능함을 동시에 말한다. 얼굴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얼굴은 자아의 상이나 주체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매순간 여러 가지 역학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순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정강의 작품은 순간적으로 고정되는 타인의 인상으로 그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폭력(또는 기회)의 시대에 긴 우회로를 설정하면서, 이 전체적인 과정 자체가 그의 주체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주체라기보다는 과정 중의 주체이다. ● 조각난 신체를 가상적으로 통합시키는 상상적 거울에는 자아의 이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요구가 내재해 있다. 또한 사회적인 교환체계인 언어적 상징을 통해 나를 주어의 위치에 놓는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 있다. 라깡의 심리학은 이러한 요구와 욕망이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만큼이나 인간에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타자들에게 의존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정강의 작품은 거울, 언어, 모니터, 실물, 사진 등등 작가가 동원한 장치들에서 결과한 것들의 차이들을 보여준다. 그 빠른 셔터 스피드를 통해서도, 줌zoom만을 가동시키는 비디오카메라의 고정성에도 불구하고 약간 다른 각, 다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인터뷰 과정을 찍은 스틸 사진은 모니터로 재현된 얼굴과 나란히 놓인 실물의 차이를 파악하게 한다. 그것은 분명히 맞추어진 초점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정확한 모습을 고정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정강의 작품이 인식론적 허무주의나 불가지론 등을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상상적, 사회적 인상이 결정되는 체계적 과정들을 인정한다고 해서, 개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반영의 장치를 동원해서 인간을 구조적으로 탐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 탐구에서 작가가 각 단계의 차이를 포착하여 관객에게 드러내는 것은, 인간이 보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보여 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보는 주체와 보여 지는 주체 사이의 차이는 여러 차이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이 차이로부터 인간의 수많은 드라마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정강의 작품에서 거울과 전자거울은 보는 주체와 보여 지는 주체가 얽히는 시각의 그물망이 짜여지거나 해체되는 장으로 주목된다. 거울은 나르시시즘과 관련된 심리적 장치로, 고대 신화로부터 영상이 지배하는 현대까지 그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특히 모니터에 반영되어 피실험자와 관객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보게 되어 있는 영상 이미지는 전자거울이 가지는 나르시시즘의 미학을 드러낸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비디오, 자기애의 미학]이라는 논문에서 비디오 모니터를 하나의 거울로 파악한 초창기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실험을 소개하고 분석한 바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비디오 예술은 초창기부터 인간(작가 자신, 또는 관객)의 신체를 중심적인 도구로 사용해왔다. ● 비디오가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녹화와 동시에 투사를 할 수 있는 즉각적인 피드백이라는 메커니즘 때문이다. 카메라와 모니터라는 두 기계 사이에 끼어 있는 몸은 복합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특히 비디오라는 매체는 심리적 상황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을 고무한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돌고 도는 거울 반사는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에 혼란을 야기하며, 당장 확실해 보이는 현재 속에 주체를 고립시킨다. 그 자신에게만 둘러싸이게 하는 비디오의 순환적 이미지는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시각적 메아리를 발생시키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 간의 선적인 인과관계를 해체시킨다. 크라우스는 탈출할 곳이 없어 보이는 이 감옥이 붕괴된 현재라는 감옥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의미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현재의 시간이다. 자기 반사 상황을 극대화시키는 정강의 장치들 역시 시간적 인과성으로부터 분리된 자아의 표현을 낳는다. 그것은 전자 거울 역시 거울이 가지는 주체의 분열성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울이 가지는 반영성은 예술의 형식과 내용 간의 간격, 그리고 사고와 존재 사이의 간격을 드러낸다. ● 자아나 주체가 이러한 간극들을 상상이나 상징을 통해 메우려고 애쓸수록 간극은 더 벌어진다. 모순은 봉합되지 않는다. 하이퍼 리얼리티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이 간극들은 최대한 그럴듯하게 메꾸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나르시소스의 신화가 예시하듯, 투사된 이미지와의 완전한 합일은 곧 죽음이다. 실제를 완벽하게 베껴낸 지도가 전 영토를 덮는다는 우화의 교훈처럼 말이다. 정강의 작품은 자신의 가상적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상상의 거울을 깨고 실재로의 복귀를 촉구한다. 실험실을 연상케 하는 장치들은 분석의 과정들은 거울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냄으로서 자아와 주체에게 차이를 감식하도록 한다. 거울은 지옥으로의 추락과 천국으로의 고양을 오고가는 나르시시즘의 상황을 야기하지만, 거울의 균열을 발견하거나 깨는 것 역시 바로 거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자신의 실재를 알고자 하는 탐구는 조금씩 진전된다. 그 실재가 비록 당장은 불가능한 것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포획할 수 있는 인식론적 그물망을 정교화 하는 일을 멈추어선 안 될 것이다. 여기에 정강을 비롯한 현대 예술가들의 도전이 놓여있다. ■ 이선영
Vol.20100116a | 정강展 / JUNGKANG / 鄭江 / photography.video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