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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1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봉산문화회관 BONGSAN CULTURAL CENTER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길 77 2층 Tel. +82.53.661.3081~2 www.bongsanart.org
송영욱은 유년시절이나 이사 등 자신에게 특정 기억을 야기 시키는 대상들을 한지로 떠낸다. 대상을 떠낸 종이를 합성수지로 코팅하여 만들어진 조각들을 다시 접착하여 원래 형태로 재조합한다. 캐스팅의 형식이지만, 대상에 대한 완전한 조각적 재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적절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온전히 서 있기도 버거운 사물의 껍질들은 실재를 원형으로 삼아 복사한 생산물이라기보다는, 알맹이가 빠져나가버린 무엇으로 남아 있다. 대상이 가졌을지 모를 흠집들을 그대로 떠내서 뿐 만 아니라, 여러 단계의 작업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거친 편린으로 남아 있는 외피는 조각적이기 보다는 회화적이다. 작은 종이들을 붙여 만든 껍질들은 거듭해서 칠해진 붓 터치 같은 효과가 있다. 2000년대 초반의 작업인 중 자동차에 톱밥을 붙이거나, 변기에 벨벳을 붙이는 등의 작품 등에서도 사물의 거친 표피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대상의 표피만을 남기는 방식은 대상과의 도상적 유사성을 약화시킨다. 대상으로부터 직접 떠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래 대상이 가졌을 법한 생산물로서의 매끈한 표면이 대상과 무관한 자체의 둔탁한 물성을 보유하는 또 다른 사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허상의 느낌을 강화한다.
이들 껍데기는 변태한 성충의 흔적처럼 형해로만 남아서 지나간 시간을 반추한다. 설치할 때 내부 조명을 함으로서 껍질의 느낌이 더욱 강조된다. 껍질들은 거칠고 단단하지만, 외곽선이 잘 맞추어지는 식의 물질적 견고함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보존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반추를 위한 일회용 사물 같은, 마치 촛불의 존재방식 같은 한시적 양태를 지닌다. 소파나 의자처럼 잠시 머무는 장소나 문, 목마, 가방, 용달차 같이 이동을 상징하는 사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설치작품과 함께 전시하곤 하는 그림에서도 의자나 목마 등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림이 설치에 대한 부연설명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흑과 백만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는 그림보다는 드로잉에 가까우며, 재현된 대상들은 명확한 형태와 색채를 잃고 한쪽부터 휘발되거나 바람에 불려 날아가는 형상이다. 캔버스 위에 고착된 형상 역시 설치작품처럼 시간의 흐름을 탄다. 그 작품 속에 내재된 시간성은 작품의 주요 내용인 기억과 밀접하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예술작품 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펼쳐져 전개된 시간, 즉 흘러가는 계속적인 시간, 잃어버린 시간 일반과 대립되는 시간이다. ● 송영욱의 작품에서 기억을 야기 시키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의 외피들, 즉 그것의 기호이다. 기호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대상과 달리, 거듭되어 해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에 방점을 찍어주는 지각이나 표상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에 의해 전개되는 감각적 기호들이다. 작가는 추억을 상기시키는 대상들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외피들을 통해 기호들을 해독하게 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의하면 예술의 세계에서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그 기호는 우리에게 되찾은 시간을 준다. 기호는 기호를 방출하는 대상보다 심오하지만 여전히 그 대상과 관련되어 있고 대상 안에 절반쯤 감싸여 있다. 그의 작품은 대상을 명확히 재현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대상과 무관한 채 주관적인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에 있지 않다. 설치나 회화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불완전한 도상들은 표상의 정합성으로부터 조금씩 어긋나는 이심(異心)적인 원환을 통해 회귀한다. 반복적인 회귀는 동일자가 아니라, 차이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상(시뮬라크르)에 가깝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에피쿠로스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물체들 자체 또는 원자들의 복합체로부터 극히 섬세하고 유동적인 원소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고 말한다.
이 이차적인 복합체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한 종류는 물체들의 심연으로부터 방출되며 다른 한 종류는 표면에서 떨어져 나온다. 이러한 피부, 막이나 섬유조직, 껍데기, 껍질 등을 루크레티우스는 시뮬라크르라고 부르며, 에피쿠로스는 모상(模像, eidôla)들이라 부른다. 소리, 냄새, 맛, 열 등은 심연으로부터의 방출물과 관련되며, 반면 시각적 모양, 형태와 색 등은 표면의 시뮬라크르와 관련된다. 심연으로부터의 방출물은 표면을 통과하며, 표면의 껍데기들은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서 이미 묻혀 있던 층들과 대체된다. 허상에 관한 논의는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을 실체(중심)로부터 가상(표면)으로 옮겨놓는다. 기억의 시작은 진주의 핵심처럼,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어떤 결정체이든 이후에 부가된 분비물의 지속적인 축적이 중요한 것이다. 송영욱의 작품은 대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작품이 도달하는 지점은 탈물질적이며, 다양한 표면효과를 통해 기억의 의미를 말한다. 대상 본래의 색과 형태를 잃은 희끄무레한 형상들은 사실보다는 환각phantasme적인 효과에 가깝다. 깊숙이 은폐되어 있던 기억들은 내부 조명의 지원을 받으면서 모조리 위로 올라온다. 이렇게 떠오르는 것은 가라앉는 것과 달리,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그리고 응집이 아니라 분산을 향한다. 안과 바깥이 이어져 있는 표면들은 뫼비우스 띠처럼 표면과 가장자리의 다른 쪽을 따라간다.
『의미의 논리』는 안과 바깥의 연속성이 심층의 모든 층위를 대체한다고 말한다. 심층으로 파고들어감이 아니라, 이 미끄러짐 덕분에 다른 편이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능해 진다. 송영욱의 작품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한 여정은 심층이 아니라, 사물의 표면을 따라서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들뢰즈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이전의 깊이는 납작하게 눌려 넓이가 되었다. 그리고 한계지어지지 않은 생성은 이제 이 넓이 안에 완전히 수용된다. 갈라진 틈과 주름이 잡힌 표면을 따라가는 여정은 침투가 아닌 미끄러짐의 연속이다. 신비는 이 도약,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의 이행에 있다. 깊이가 추방된 표면에서 사건들이 펼쳐진다. 깊이에서 표면으로의 이동은 의미의 차원에서 본다면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의 이동에 해당한다. 송영욱의 작품은 실재의 깊이(리얼리즘)나 형식적 깊이(형식주의)가 아니라, 오래된 상형문자처럼 거듭해서 읽어내야 하는 의미의 불투명성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회화나 조각이 아니라, 오브제나 사물의 양태와 더 근접한 것으로,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현대 조각의 흐름』에서 현대미술의 방향으로 설정한 바 있는 '이성에서 상황'으로의 중심 이동이다.
그것은 주어진 한순간에 핵심을 관통하는 투명성 대신에, 실제 시간의 지속적인 흐름에 의존하는 불투명성으로의 변화이다. 회화나 조각과 달리 오브제와 사물은 은유적 의미가 작품의 표면상에서 만들어진다. 송영욱의 작품 역시 고정된 구조적 핵심이 없이 속이 텅 빈 입체라는 느낌이 있다. 이러한 작품은 논리적인 인과관계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실제literal 공간의 짜임 속으로 밀어 넣어진 낯선 실체이다. 논리적 추론과 달리, 예측하지 못한 경험이 느리게 전개되는 과정은 무의식과 꿈의 언어,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통해 찾고자 하는 시간(기억)과 가까운 것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되찾아지는 것은 특정한 시공간대의 명확한 재생이나 재현이 아니라, 미지의 것을 향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이고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에 의하면 현대조각은 프루스트가 과거를 발견한 방식으로 현재를 경험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성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곳에, 그리고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혹은 그러한 대상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각 안에) 존재한다. 이 대상과의 만남은 전적으로 우연에 맡겨져 있다'. ■ 이선영
* 출전 | 금호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워크샵
Vol.20091222d | 송영욱展 / SONGYOUNGWOOK / 宋永煜 / installation.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