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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09_수요일_06:00pm
청계창작스튜디오 2기 입주작가展
주관/주최_서울시설관리공단 후원_서울시
관람시간 / 10:00am~07:00pm
청계창작스튜디오 CHEONGGYE ART STUDIO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37번지 관수교 센추럴관광호텔 1층 Tel. +82.2.2285.3392 artstudio.sisul.or.kr
균형(Balance) - 자기애도, 예술시민서비스, 세계의 묘사, 이 셋 사이의 불경한 균형 ● 꽃무늬 바탕의 한복이 청계천 수표교와 관수교 사이에서 휘날리고 있다. 몸빼 원단을 사용해 만든 한복들이다. 빨래를 널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김정표는 이 설치 작업에 「Secret Garde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설치 기간 동안 사람들이 몸빼 한복을 직접 입고 사진도 찍어볼 수 있도록 이벤트도 마련해 두었다. 그는 우리네 어머니의 삶을 닮은 몸빼 원단을 매개로 청계천 일대의 토박이 문화가 새로이 향유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삶과 청계천의 문화를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동일시하려는 몸짓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사적인 상처를 봉합하려는 한 개인이다. 그 몸짓은 우리에게 그 상처가 어머니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삶을 옆에서 지켜봐 왔던 김정표 자신의 것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준다. 사적인 상처에 매달리는 개인의 모습은 그 상처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의 깊이와 근거를 상상하도록 만드는 강한 원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별 주체가 무언가 맞지 않은 은유의 옷을 입자, 살아있는 인간의 삶이 구체적 삶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증발하고, 작가(아들)의 독백만이 남았다. 저 바깥의 세계가 개인에게 스며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그들이 얼마만큼 망가졌는지, 혹은 아무렇지 않다고 여겼는지,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상대했는지, 그것들을 위한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작가(아들)의 독백과 어머니의 삶 사이에 거리가 놓인다. 그 거리가 불경함을 연상시킨다. 작가의 섣부른 봉합에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그 거리를 짚으며 쓸쓸한 기분을 느낀다고 해도 우리는 그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상처와 치료법의 조합 앞에서, 그의 작업을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일, 그래서 인간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라고 말하며 돌아서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김정표의 시선은 그동안 자신의 노부모, 그리고 노숙자, 1995년 운행이 중지된 수인선(水仁線), 명학시장, 청계천 등을 좇아 왔다. 해(害) 없는 사회의 잔여들이다. 시선의 궤도가 애상(哀想)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애상은 사회와 개인을 특정한 프레임을 통하여 응시하도록 만든다. 김정표는 자신이 사는 세상을 "균형(Balan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내게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모순이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지속되어 왔다고 말한다. 한편 그에게 있어 개인은 사회의 피해자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작업이(작가가)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회복(기억) 하라고, 그리고 웃으라고, 소통하라고, 향유하라고 말한다.
김정표는 「명학시장 프로젝트」(2008)를 통해 소통과 향유를 작동시키려고 했었다. 명학시장은 그의 부모님이 평생 일해오신 곳으로 지금도 그곳은 그들의 일터다. 명학시장은 여느 재래시장처럼 우리에게 어떤 전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경쟁력을 점점 상실해가는 물건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미리부터 향수가 끼어든다. 그는 부재중이라 받지 못한 택배를 시장 내에 설치된 보관소에 들러 찾아가는 과정에서 시장 내부와 외부 사람들이 자연스레 만나 소통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영정 사진을 찍기 위해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새 단장을 하고 계시는 그런 풍경을 상상했던 것 같다. 명학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김정표의 시나리오를 어떻게 전유했을까 상상해보았다. 향유라는 단어가 명학시장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각자의 이익에 맞게 소비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넘치는 개념인지 혹은 모자란 개념인지, 개념의 잉여 부분을 가늠해보았다. 그 차이는 만남을 미리 성공적으로 기입해버리는 공공미술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화로운 향유만을 꿈꿨기에 보지 못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실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실재를 목격하는 일에는 시나리오에 주어진 독백을 읊다가 연기할 기회를 몽땅 빼앗긴 배우를 볼 때 느껴지는 낯 뜨거움과 같은 것이 감초처럼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나(우리)처럼 어떤 불경스러움을 느끼시진 않았을 것 같다. 무대 위로 호명되었다고 해서 좋을 것도 변할 것도 없지만, 왜 정작 너는 거리를 두고 우리를 관찰하느냐며 예술 하는 아들에게 캐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프로젝트는 예술 하는 아들이 자신의 노부모를 무대 위로 부르는 행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정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청계천을 의미화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병환이 그에게 바깥과 만나는 것에 어떤 회의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오랜만에 캔버스에 배경 묘사 없이 몸빼 한복도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친 대상들도 그렸다. 느낌이 좋아 모아 놓은 것을 비슷하게 옮겨 그린 것도 있고, 사연이 담긴 정물도 있다. (만 원짜리 지폐가 감긴 대파 그림은 어머니가 용돈으로 주신 돈에 배어 있는 파 냄새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는 내게 작은 테두리 안에 몸빼 원단을 옮겨 그리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림 그리는 일이 주는 즐거움에 매료된 자의 어떤 만족감이 느껴졌다. 매일 보고 만지고 돌아다니는 동네의 개들, 풍경들을 작업의 언어로 다루기에는 왠지 그것들에 미안하다고 말한 한 작가의 고백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몸에 다가와 부딪히는 그것들을 그림 그리면서 다시 한 번 몸으로 부딪히는 것이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작업을 한다는 것이 주는 쾌락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바깥을 놓지 않는 일의 어려움을 짐작케 해준다. 그 고백을 김정표의 작업에서도 들어 보려는 순간 웃음소리가 들린다. 웃게 하기 위해 먼저 웃는 그런 웃음소리다. 지하철 내부 창문에 스마일 에어 쿠션을 설치하는 「하하하 하~ 프로젝트」는 시트콤과 개그 프로그램에 삽입된 웃음소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출근길, 옷을 전부 벗은 채로 신호등에 묶인 그네를 타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치기 어린 사회 비판을 대할 때처럼 아주 방어적일 필요는 없는 그런 경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업과 작업 사이를 이동하다 보면, 사회의 잔여로 호명된 개인을 위한 자리는,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타자와 만나 향유하라고 김정표가 마련해 놓은 자리 이외에는 없음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의 작업 안에서의 개인은, 사회로부터 어떤 숭고한 본질과 본성을 빼앗긴 주체에 가깝다. 그리고 그 본성은 개인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네」(2002, 비디오)에서처럼 작가만이 예술적 퍼포먼스를 통해 사회 구조를 비판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이 인습 파괴를 주창하는 자유주의자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옥상에 설치됐었던 그네 위의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면 「그네-예술학교 놀이터 만들기-1, 2004, 설치), 자유주의자의 이면이 곧 그 옥상 위 익명인 임을 쉽게 그려볼 수 있다. 그건 마치 불안이라는 기분이 자유에 부착된 미망(迷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수에서 물 대신 하얀 우유가 뿜어져 나오는 「아주 상스럽고 상서로운 유혹」과, 우유를 쉬지 않고 뿌려대는 자동차의 도심 드라이빙을 촬영한 「밀크드라이빙」을 목격하는 순간, 김정표의 작업에서 느꼈을 법한 낯 뜨거움, 약간의 분노, 약간의 인간적인 공감을 의미화 하려던 노력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 전시에서 이 작업은 관람객이 가장 먼저 보도록 설치될 예정이기 때문에, 관람객의 경험이 그의 개별 작업들을 이리저리 연관 지어 의미화 하고 있는 나의 경험과는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의도대로 우유의 뿜어져 나오는 형상과 소리의 조합에서 상스러움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될지, 그리고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볼 수도 있는 그 이면의 조합을 미묘한 균형으로 이해하게 될지 역시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작업을 보고 작업이 표현하려 한 그 모순을 알아보고 어떤 기묘한 기분에 빠졌다고 해도, 어쩌면 그 경험은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능력과 개성을 목격하는 즐거움 혹은 피로감을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른다.
김정표는 이번 전시 제목으로 "균형(Balance)"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는 내게 청계천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이곳저곳의 기울어짐, 편협함, 망각을 해결하기 대안으로서 균형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기울어진 채로 유지되는 세상을 묘사할 때에도 "균형(Balance)"의 형상을 빌려온다. 하지만 "균형(Balance)"이야말로 이번 전시에서 보일 그의 개별 작업을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적합한 개념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는 세상(의 기분)을 재현하려는 열망과, 향유를 작동시키려는 열망, 이 둘을 갈등과 요동 없이 각각 적당히 충족하려 했기 때문이다. ■ 임은경
Vol.20091217c | 김정표展 / KIMJUNGPYO / 金正標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