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자라다 draw & grow

정경희展 / JUNGKYUNGHEE / 鄭璟熹 / painting   2009_1209 ▶ 2009_1215

정경희_또 다른 기억 another memory_ 캔버스에 유채, 연필, 목탄 oil, charcoal, pencil on canvas_160×160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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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0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갈라_GALLERY GALA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3-35번지 Tel. +82.2.725.4250 blog.naver.com/joychamm

하나의 얼룩으로부터 피어오른 기억의 실마리 ● 물먹인 종이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트리면 얼룩이 생긴다. 얼룩은 잉크와 같은 단색의 색면을 중심으로 점차 가장자리로 번져나가면서 희미해진다. 가운데는 짙고 가장자리는 흐릿해지는, 가운데는 모여 있고 가장자리는 흩어지는, 이 한 점의 얼룩에 내포된 강도와 밀도의 편차가 수많은 생각들을 불러온다. 혹, 그 종이가 기름종이라면 잉크는 종이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응집해 크고 작은 기포들을 만든다. 이처럼 모든 일은 한 점의 얼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속에 존재가 들어있고, 우주가 들어있고, 내가 들어가 있다. 얼룩을 만든 것은 필연이지만, 얼룩이 만드는 형상은 우연이다. ● 그 꼴은 꼭 기억의 꼴을 닮았다. 즉, 기억을 만든 것은 필연이지만, 기억이 만드는 형상은 우연이다. 기억은 어떤 사건에 의해 심어지지만, 정작 그 기억이 재생해내는 상은 결코 최초의 기억에 일치하지는 않는다. 최초로 기억이 각인되어지는 순간은 사건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지만, 사후의 기억(사건이 일어난 한참 이후에 재생된 기억)은 그 자체의 자족적인 생리를 획득해, 그 사건, 그 순간으로부터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그 사건이 일어나던 순간에 가까이 있을 때 기억은 짙어지지만, 그 순간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사건은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마침내는 완전히 지워지고 만다. 아니,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여하튼 그 사건이 잊혀진 이후에 조차, 그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그 사건이 낳은 기억은 그대로 남겨질 것이므로. 여하튼 사건이 없었다면 기억도 없을 것이므로. 여하튼 사건이 지워진 자리, 사건은 없고 그 사건이 만든 결과만 오롯한 자리에서 기억은 마침내 사건과 완전히 결별해 자족적인 존재를 획득하고, 순수한 상상력으로 변질된다. 기억은 처음에 사건과 맞물려있지만, 사후에는 상상력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 기억의 앞쪽에 사건이 있고, 그 뒤쪽에 상상력이 있다. ● 기억을 복원한다는 것, 기억의 생리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모두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결국 자의식의 소산일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정경희의 기획은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전형적인 사례를 예시해주고 있다. 더불어 기억을 형상화하는 일은, 결국, 기억이 비가시적이고 비감각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이므로, 이 비가시적이고 비감각적이고 비물질적인 기억을 가시적이고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층위로 끄집어내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층위에 속해져 있던 것을 의식의 층위로 끄집어 올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작가의 작업에서 각각 라인 시리즈, 번짐 시리즈, 그리고 공간 시리즈로 변주된다. 이 시리즈들은 저마다 고립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다.

정경희_그리고 자라다 draw&grow_ 캔버스에 유채, 연필, 목탄 oil, charcoal, pencil on canvas_130.5×80.5cm_2009
정경희_또 다른 기억들 another memories_ 캔버스에 유채, 연필, 목탄 oil, charcoal, pencil on canvas_130×242cm_2008

라인 시리즈. 사슴의 머리 위에 뿔 대신 잠자리 날개가 돋아나 있다. 웬 사슴? 꼭 사슴이어야만 했을까? 지레,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슴이라는 선입견이 없다면, 그것을 사슴으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저 애매하게, 아마도 일부로 암시적으로 그려진 것이니까. 더욱이 이 몸통 역할은 꼭 사슴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 역할은 주로 사슴에게 주어지지만, 이따금씩은 서있거나 웅크리고 있는 사람으로,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로, 달팽이로, 심지어는 긴 코를 늘어트리고 있는 코끼리로 변태되는 것이며, 한마디로 다른 그 무엇으로도 변태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몸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작가의 주제가 기억을 재생하는 것이며,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기억의 비가시성을 가시성의 층위로 불러내는 일임을 생각하면 이런 변태성은 쉽게 이해가 된다. 정작, 오히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변태성 자체이다. 이 자유자재한 변태야말로 그대로 기억의 속성을 닮아있다. 변태성과 비결정성, 그리고 모든 이질적인 차이의 간극을 건너뛰고 아우르는 이접성과 연접성이야말로 기억의 속성이며 특성이다. 그리고 그 특성은 그대로 의식의 특성이기도 하며(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에 의해 뒷받침되는), 존재의 특성이기도 하다. ● 몸통이 그렇다면, 사슴의 뿔을 대신하고 있는 잠자리 날개는 어떤가. 흔히 뿔은 이상을 상징하며, 그 상징적 의미가 기억의 변태적이고 비결정적인 성질을 표상해주기에는 너무 견고하고, 더욱이 권위적이기 조차 하다. 이에 반해 잠자리 날개의 투명하고 수많은 망조직으로 이루어진 하늘거리는 구조는 몽환적이고 우연적인, 자기변신과 각색에 능한 기억의 속성을 표상하기에는 최적인 것 같다. 더욱이 날개에 내재된 수많은 망조직은 마치 주체의 방들 같다(질 들뢰즈는 주체와 의식을 천개의 고원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기서 천개의 고원은 주체가 깃들고 생성되는 천개의 방에, 사실상 무한정한 방에 비유된다). 그 방들은 외관상 어슷비슷하지만, 그 크기나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차이를 내재한 반복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잠자리 날개의 망구조는 기억의 속성을 떠올려주고, 또한 그 기억은 주체를 형성시켜준 수많은 의식의, 혹은 무의식의 방들로 확대 재생산된다. 기억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의식이며, 주체와 맞물리는 것이다.

정경희_오래된 미래展_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_2009

번짐 시리즈. 라인 시리즈에서 사슴의 뿔이 잠자리 날개로 대체되고 있다면, 번짐 시리즈에서 그 뿔은 나무로 변신한다. 나무 역시 머리속에서 생장하고 생육하는 생각과 기억을 표상하는 적절한 유비가 되어준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머리속에 저마다의 나무를 키워내고 있고, 사슴의 머리 위로 자라난 나무는 바로 그 나무, 아마도, 생각의 나무, 기억의 나무, 존재의 나무를 상징한다. 그렇게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온갖 이질적인 생각의 계기들이 모여 의식을 형성하고, 주체를 생성시킨다. 나아가 그 숲은 생각의 단편들이, 기억의 불완전한 조각들이 무슨 먹구름이나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피어나는 작은 덩어리들은 그대로 잠자리 날개에서의 망들에 해당하며, 기억의 방, 의식의 방, 존재의 방이 변주된 것이다. ● 한편, 작가의 다른 그림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시리즈 그림들이 전통적인 먹그림과의 친근성을 엿보게 한다. 작가의 그림이 대개 흑과 백이 대비되는 모노톤의 화면을 보여주고 있고, 더욱이 번짐 효과가 먹그림에서의 농담을 떠올리게 하는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와 함께 이런 먹그림과의 친근성으로 치자면, 여백을 빼놓을 수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여백은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 암시하기 위해 할애된 충만 공간이다. 여백은, 말하자면, 작가에게 속해져 있다기보다는 관객에게 주어진, 의미론적으로 열린 공간이며, 비결정성의 공간이다. 해서, 그 빈 공간을, 그 비결정성의 의미를 관객의 참여로 채우고 결정화하게끔 할애된 공간인 것이다. 말하자면, 여백은, 특히 작가의 작업에서의 여백은 이런 비결정성의 의미들이 쟁여있는 기억의 저장고를 표상한다.

정경희_기억이 자라다 grow grow_ 캔버스에 유채, 연필, 목탄 oil, charcoal, pencil on canvas_160×160cm_2009
정경희_기억이 자라다 grow grow_ 캔버스에 유채, 연필, 목탄 oil, charcoal, pencil on canvas_181.5×228cm_2008
정경희_기억을 만들다 assembling_ 캔버스에 유채, 연필, 목탄, 금분 oil, charcoal, pencil,gold dust on canvas_130×130cm_2008

공간시리즈. 라인 시리즈(이따금씩 라인 시리즈는 공간에다 라인 테이프를 부착하는 식의, 공간설치작업으로 유형화되기도 한다)와 번짐 시리즈가 흑과 백과의 대비가 두드러져 보이면서 비교적 뚜렷한 실체감을 얻고 있다면, 공간 시리즈에서 그 실체감은 상대적으로 더 희박해진다. 그런데, 그 희박한 성질,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감이 오히려 덧없고 무상한,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기억의 속성을 더 잘 표상하는 것 같다. ● 이 작업들은, 말하자면, 단순히 그린다기보다는 일종의 공작성을 수반하는데, 얇은 종이를 가늘게 잘라 세로로 긴 띠를 만든 연후에, 벽이나 캔버스와 같은 지지대 위에 그 띠를 직각으로 세워 덧붙여나가는 방법으로써 잠자리 날개 형상을 재현한다. 그 실체감은 현저하게 희박한데, 이를테면 하얀 벽면 위에 하얀 종이조각들로 섬세하게 축조된 구조물이 그 실체를 쉽게 간과하게 만든다. 무슨 무색 엠보싱 같기도 한, 그 형상은 흡사 벽면 안쪽으로부터 표면 위로 스며 나와진 기억의(혹은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의식의 표층 위로 스며 나와진 무의식의) 질료적 형식을 보는 것 같다. 작가의 작업 중 비현실성, 비결정성, 비실체감을 가장 강력하게 떠올려주는 작업들이며, 다른 작업들에 비해 기억의 표상으로는 가장 흡사한 작업들이 아닐까 싶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허름한 벽체에 난 얼룩으로부터 세계를 보고, 우주를 보고, 존재를 보고, 자기 자신을 본다. 이처럼 얼룩 속에 담겨진(사실은 암시적인) 세계를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상상력이 매개가 되어져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기억의 앞쪽에 사건이, 필연이, 얼룩이 있고, 그 뒤쪽에 상상력이, 우연이, 그 얼룩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생각이 있다. 기억의 생리와 생태를 재구성하는 작가의 작업은 그 두 축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상호작용성을, 상호내포성을, 그리고 상호간섭성을 보여준다. 이로써 종래에는 기억과 의식과 존재가 서로 별개의 영역이며 범주가 아님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된 계기에 의해 작동되어지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 고충환

Vol.20091216b | 정경희展 / JUNGKYUNGHEE / 鄭璟熹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