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The Secret Forest

최나무(최지현)展 / CHOINAMU / 崔나무 / painting   2009_1212 ▶ 2009_1228

최나무(최지현)_The Red Valley Deep in the Forest_캔버스에 유채_65.2×91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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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9_1212_토요일_05:00pm

갤러리 담 신진작가 기획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 12월 28일_11:00am~03:00pm

갤러리 담_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자연의 에너지, 나무, 그리고 오키나와의 숲 ● 작품의 테마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연의 에너지'이다. 여행하면서 만난 자연, 나무, 숲, 비, 강, 바다 등 모든 요소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서로의 기운을 주고 받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나무와 숲'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자연과 나(사람)를 연결 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작은 나무 인간들은 그 상징물로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의 분신이 되어 뛰어다니고 춤추며 놀기도 한다. ● 열대의 오키나와에서 만난 식물들은 매력적이다. 성장 속도는 눈부실 정도로, 늘 지나가는 길가의 작은 잡초가 1주일 사이에 무릎 위 까지 자라기도 한다. 태양은 맹렬하며 하늘의 움직임은 스펙터클 그 자체이다.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이 곳은 늘 밝은 에너지만을 뿜어내는 곳은 아니다.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희생자는 오키나와의 사람들이었다. 무모한 지상전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섬의 여기저기에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동굴이나 숲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주위에 누가 있는 것 같은 한기를 느낀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그저 거기에 있으면서 차곡차곡 기억을 쌓으며 지금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옛날부터 자연을 섬기는 신앙을 가지고 있던 오키나와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신의 장소가 많이 있다. 누가 법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지만 근처에 다다르면 마치 선이 그어져 있는 양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게 된다. ● 울창한 열대의 숲의 안쪽은 어쩌면 어두운 에너지로 꽉 차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흑과 백처럼 극명하게 다른 에너지라고 해서 나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새로운 생명력을 품고 있는 품고 있는 자연의 중요한 힘일 것이다.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숲이 누군가에게는 낙원이 된다. 그늘이 있기에 양지가 있다. 오키나와는 밝음과 어두움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아주 강렬하고 독특하게 보여 준다. ● 2년간 이곳에 머물며 만났던 인상적인 나무와 숲의 공간을 그림에 담았다.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은 사람 같기도 하고, 가지에서 무수한 뿌리가 내려와 다시 땅에 박혀 줄기가 되는 바냔나무(banyan tree)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자연의 기운은 무지개 모양의 선과 점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최나무(최지현)

최나무(최지현)_Hidden Pond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09

원시적 자연이 품고 있는, 비의적 풍경 ● 어릴 때,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는 길가에 당집이 있었다. 매일같이 그 당집 앞을 지나칠 일이 두려웠고, 당집을 머리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곧잘 긴장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가까스로 당집 앞을 지나칠 때면, 알 수 없는 기운이 덮쳐, 까무러지게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작 더 무서웠던 것은, 무슨 수호신처럼 당집 앞에 버티고 서있는, 당집보다 몇 배나 더 큰 당나무였다. 지레 질려, 당나무를 올려다보며 그 키를 가늠해보지도 못했던 것 같다. 더욱이 그 당나무에는 새끼줄과 함께 온갖 울긋불긋한 원색의 조각 천들이 매달려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가 살아있는 것 같고, 춤을 추는 것 같았다. ● 나무에는, 숲에는, 자연에는 영이 깃들여 있다는 믿음이 물활론이고, 범신론이며, 샤머니즘이고, 토테미즘을 낳았다. 세속적인 권력과 내세의 권력이 합치되는 신정일체의 시대(당시의 권력주체는 무당이었다)에 자연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그런가 하면, 마을에서 멀찌감치 동떨어진 외진 곳에는 성소가 있었는데, 도둑이 그 속으로 숨어 들면 사람들이 마음대로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세속적인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자연신이 거하는 신령스런 장소였기 때문이다. 옴파로스(세계의 배꼽)와 세계수(세계의 중심에 심겨진 나무)로 나타난, 세계의 기원과 관련한 상징은 이런 성소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최나무(최지현)_Screw Pine 01_캔버스에 유채_91×72.8cm_2009

그러나 인간이 역사시대(인간이 세계의 주역으로서 등장하는 시대의 분기점이 되는)로, 문명시대로 진입하면서 신령스런 자연은 미신으로 치부되고 억압된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을, 고향(지정학적 의미가 아닌, 일종의 뿌리의식)을, 원형(존재가 유래한 근원의식)을 상실하고 만다. 현대는 곧잘 상실의 시대로 기록되곤 한다. 자연신과 인격신(인격을 투사한, 문명시대의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한스 제들마이어)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정체성 혹은 자기정체성)마저도 상실하고 만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상실된 것들은 인간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과 숭고의 감정이, 비록 빛 바랜 사진처럼 흐릿하지만, 막막한(그 실체를, 그 실체의 깊이와 폭을, 가늠할 수 없는) 그리움과 격렬한 파토스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이다. 해서, 이처럼 흐릿해진 사진을 뚜렷하게 하고, 자연을 부각하는 일이 예술가에게 과제로써 주어진다. 상실된 자연을 암시하고,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을 부각하고 나면, 고향도, 원형도 저절로 되찾게 될 것이다. 자연과 고향과 원형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최나무(최지현)_Screw Pine 02_캔버스에 유채_91×72.8cm_2009

최지현은 이런 자연을, 고향과 원형의식을 그린다. 문명화 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상실한 것들이며, 억압한 것들이다. 오죽하면 예명을 나무라고 지었고,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 속엔 나무와 숲과 자연이 자주 등장하고, 나무와 사람이 한 몸을 이룬 나무인간(머리에 뿔처럼 자란 나무로부터 그의 생각을, 상상력을, 이상을 키워내는)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나무에게 자신을 투사한 것인데, 그런 만큼 나무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일종의 인격적 대리물이며, 자화상이다. 작가는 누구나 마음속에 저마다의 나무를 가지고 있고,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실한 것들이 상실되면서 심어놓은 흔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작가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결여와 결핍의식(상실감)은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계기이며, 그 계기 없이는 예술도 없다(토마스 만). 적어도 작가에게서 나무는 그렇게 상실된 것들, 억압된 것들, 결여되고 결핍된 것들을 상징하고, 자신을 도구화 하려는 인간의 기획에 내몰려 어둠과 침묵 속으로 숨어 들어간 자연을 상징한다(자연은 이처럼 언어의 권역으로부터 배제된 탓에, 자연을 말할 때면 언제나 신비주의적으로, 불구의 언어로 말해진다).

최나무(최지현)_Screw Pine 03_캔버스에 유채_60×72.8cm_2009

그 자연은 감각적 자연이 아니라, 감각적 자연을 넘어서, 감각적 자연을 가능하게 해준, 감각적 자연의 모태이며, 자연성이다. 그 속에 야생과 야성, 동물성과 식물성, 그리고 신성을 여실히 품고 있는 원초적 자연이며, 자연의 원형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며 숲이며 자연은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선다. 자연의 영을 그린 것이고, 자연의 원형이 내뿜는 에너지를, 아우라를, 파토스를 그린 것이다. 자연과 내가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그린 것이고, 자연과 내가 서로 교감하는 감동(환희로, 호기심으로, 두려움으로, 그리고 경외감으로 다가오는)을 그린 것이고, 자연과 내가 경계를 허물면서 서로에게 스며들고, 동화되고, 일체화되는 경험을 그린 것이고, 자연의 존재원리(자연다움 혹은 존재다움)를 그린 것이다. ● 작가의 근작은 일본의 남쪽 끝에 있는, 아열대 기후의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나무와 숲 등 일련의 풍경화를 그린 것인데, 오키나와의 풍경은 작가가 그리고 싶은 자연,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자연, 자연성, 자연의 원형 그대로를 옮겨 그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되어준다. 그 풍경은 다분히 초현실적인데, 풍경 속에 들어있는 초현실과 작가 속에 들어있는 초현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특유의 화면을 일궈내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도구화되고, 축소되고, 가꾸어진 자연(애완자연?)이 아닌, 자연 그대로를, 살아있는 자연을 만나기 위해, 초현실적 풍경을 바라보아야 한다. 현실적인 풍경(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현실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초현실속에서(혹은 초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발견해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지구에는 그 속에 초현실적 풍경을 품고 있는 현실적 풍경이 있는데, 화산이나 용암지대, 문명과 자연과의 투쟁을 암시하는 장면(이를테면 앙코르와트 유적의 사원을 거대한 뿌리로 칭칭 감고 있는 나무)이 그렇고, 그리고 원시적 자연 그대로의 야성과 야생이 여실한, 오키나와의 풍경이 그렇다.

최나무(최지현)_The Red Mangrove Swamp_캔버스에 유채_65.2×91cm_2009

그 풍경 속엔, 뿌리가 땅 밖으로 나와져 있는 screw pine(screw pine(스크루 파인): 판다누스(Pandanus)과. 열대, 아열대 기후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다. 주로 늪지와 숲, 해안을 따라 자란다. 줄기와 가지로부터 식물체를 지지하는 공중 버팀 뿌리를 하여 특이한 모양을 하고, 원뿌리는 사라진다.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일반적으로 タコノキ(문어 나무)로 불린다. 잎은 좁고 뾰족하며, 가지 끝에서 나선형을 이루며 줄지어 나는 모양에서 screw pine이라는 일반명이 붙었다.) 이 있는데, 작가는 그 뿌리로부터 사람들의 뒤엉켜있는 다리를, 서로 어우러진 삶을 본다. 그리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늪지대를 형성하며 숲을 이룬 mangroves(mangrove(망그로브): 간만의 차가 있는 강어귀를 따라 빽빽한 잡목림 또는 삼림, 염습지, 진흙투성이인 해변 등에서 자라며, 독특하게 버팀뿌리[支持根]를 가지고 있다. 망그로브라는 말은 이들 식물이 이루는 잡목림과 삼림을 일컫기도 한다. 줄기와 뿌리에서 많은 호흡근이 내려와 습지를 숨 쉬게 한다.) 숲에서는 산이 품고 있는 숲과는 또 다른 숲을 본다. 인근에는 일종의 죽은 자를 위한 성소(암묵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사자들의 땅)가 있는데, 생명을 상징하는 바다와 죽음을 상징하는 금지된 땅과의 대비로부터, 그리고 특히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모든 사물현상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오키나와의 환경적 조건으로부터, 작가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존재의 양면성을 읽어낸다. ● 그런가 하면 나뭇가지에서 뿌리가 자라는, 그 뿌리가 땅으로 내려와 또 다른 나무로 자라는, 그렇게 옆으로 옆으로 무한정 확장되는, 하나의 나무이면서 그 속에 무한한 다른 나무들을 품고 있는, banyan tree (banyan tree(바냔 트리): 뽕나무과의 무화과나무 속 상록교목이다. 가지는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줄기에서 수많은 기근이 자라나 땅 속에 박히면 다시 뿌리가 된다. 그 때문에 줄기는 계속 굵어지고 오래된 나무는 울퉁불퉁하며 불규칙적이다. 인도의 옛 경전에는 인도보리수를 반얀나무(Bayan)라 하고 그 나무의 습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인도보리수는 어릴 때는 꼿꼿이 자라지만 주위에 큰 나무가 있으면 줄기를 기대며 그 나무를 타고 오르는 성질이 있다. 게다가 줄기에서는 기근이 계속 자라기 때문에 나중에는 주인 나무를 옭아매 결국 그 나무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살모수(殺母樹)로 부르기도 한다.) 에서는 삶과 죽음이 끝도 없이 반복되고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를 발견해낸다. 이와 함께 작가의 그림에는 빛 줄기(빛은 이처럼 줄기 형태 이외에, 반복되고 중첩되는 비정형의 점들의 집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와 물줄기, 그리고 무지개와 같은 다발 형태의 모티브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다발은 일종의 끈에 대한 유비로써, 강과 하늘을, 나무와 숲을, 존재와 존재를 하나의 띠로 연이어주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또 다른 형태로 풀어낸 경우라 하겠다. 이를테면 처음과 끝이 따로 없는 뫼비우스의 띠나, 입으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주 뱀 우로보로스의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며, 그 자체 불교의 연기설에도 연동된다.

최나무(최지현)_The Secret Forest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09

이로써 작가는 말하자면, 현실 속의, 초현실적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유비적 자연에 마주한 것이다. 자연이 진정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은 이처럼 자연이 유비가 될 때이다. 이는 인간적 자연과 인문학적 자연을 넘어, 원초적 자연과, 자연의 원형과, 자연 자체(존재 자체)와 맞닥트려지는 감동적인 순간의 사건이다. 내가 유래한 모신, 지신의 원형적 자궁과 만나지는 가슴 벅찬 순간의 기록이다. 이와 함께 작가의 그림에는 숲이나 산맥과 같은 가장자리 화면에 둘러싸인 원형의 형상이 곧잘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계곡이 그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연못이다. 이 연못은 말하자면 세계의 배꼽이며, 성소며, 원형적 자궁의 또 다른 버전에 속한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 속에 이렇듯 원형적 자궁과 만난, 그 감동적이고 가슴 벅찬 순간의 경험을 고스란히 옮겨다놓았다. 여기서, 풍경 자체는 현실 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 풍경으로부터 감동을 끌어낸 것은 작가의 몫이다. 아니, 엄밀하게는 풍경과 작가가 각자의 경계를 허물어 서로 삼투되는 경지와 차원에서 나와진 합작품이다. ● 작가는, 이처럼 풍경과 작가가 그 경계를 허물고, 그렇게 허물어진 경계가 열어 보인 풍경을 '비밀의 숲 '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말하자면 풍경을 일종의 비경으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비경이란, 풍경이 그 감각적 피막을 찢고 열어 보인 풍경이다(존재자를 넘어, 존재 혹은 존재 자체로의 도약을 주문하는, 하이데거의 존재의 비의와도 통하는).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살아있는 자연, 신성한 자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경외감을 자아내는 자연,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고 요술을 부리는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명명하기 위해 다가오는 모든 언어를 집어삼켜, 침묵 속으로 밀어 넣는 자연에 마주하게 한다. ■ 고충환

Vol.20091215b | 최나무(최지현)展 / CHOINAMU / 崔나무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