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공간 Space of Memory

권경엽展 / KWONKYUNGYUP / 權慶燁 / painting   2009_1211 ▶ 2010_0103 / 월요일 휴관

권경엽_Bleached Memory1_캔버스에 유채_162×227.3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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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나아트센터 GANA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자신의 존재론적 상처와 조우하고, 화해하고, 치유하기 ● 몸에 저장된 기억, 몸이 기억하고 있는 상처. 사춘기 소녀나, 이보다 앳된 소녀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현상을 롤리타 신드롬이라고 한다. 롤리타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엄밀하게는,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연민의 감정에 가깝다. 혹은 사랑의 감정과 연민의 감정이 뒤섞여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미성숙한 성적 정체성과 중성적인 성적 정체성이, 그리고 이로 인한 심리적 동요와 불안이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다. 때로, 롤리타는 자신의 어떤 점이 마음을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고, 이를 연출하고 이용하기도 한다. 병약하고 심약한 소녀 이미지가 그것으로서, 정작,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권경엽_Bleached Memory2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9

권경엽의 그림에는 이런 소녀들이 등장한다. 미성숙하고 중성적인 성적 정체성이, 병약하고 심약한 소녀 이미지가 롤리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다. 그 소녀들은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데, 애니메이션이나 마네킹 같은 인공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마치 세속적인 오염이 제거된 듯, 무균 상태의 인공적인 느낌이 불러일으키는 순수한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정은, 말하자면, 소녀의 표정에서 유추된 병약하고 심약한 이미지, 미성숙하고 중성적인 성적 정체성, 그리고 인공적인 느낌과 순수한 이미지가 어우러진, 연민의 감정이다. 그 감정의 정체는, 말하자면, 여러 이질적인 감정의 층위들이 하나로 포개진, 섬세하고 중의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합적인 것이다. 그 복합적인 감정의 결이 그대로 롤리타로 대변되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그리고 여성에 내재된 정신적인 외상에, 상처의 성분에 부합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분명한 것은, 롤리타가 의도하고 연출한 것이든, 아니면 롤리타의 의지 혹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그렇게 읽혀진 것이든, 롤리타는 자기 속에 일종의 상처의식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처의식이야말로 롤리타의 본질이다. ● 그림 속 소녀들은 이런 상처의식을 보여준다. 상처의식은, 여차하면 깨질 것 같은 순수의, 순백의, 무균의 공간으로 나타나고 (텅 빈 여백이 소녀를 오롯이 부각하면서, 이런 순수공간을 강화한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충혈 된 눈으로 나타나고,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듯 감은 눈이나 멍한 눈으로 나타나고, 책망하는 듯 정면을 주시하는 눈으로 나타나고, 자기 속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무표정한 표정으로서 나타난다(여기서 표정은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기능한다).

권경엽_Remember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9
권경엽_Adios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9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작가는 무엇보다도 눈을 감정을 전달하는 적극적인 장치로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쪽 눈을 가린 안대로써 상실감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식이다(여기서 안대를 착용한 눈은 상실감을 회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보호 의지를 상징하며, 그리고 동시에 다른 한쪽 눈은 자신에게 상실감을 안겨다준 대상을, 원인을 쳐다본다). 그리고 보조 장치로서 눈물을 끌어들이는데, 눈물은 감정을 전달하는 보다 직접적인 기제이면서, 동시에 응결된 눈물이 감정의 무화(순수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응결된 눈물을 정교한 크리스털로 맺히게 해, 감정을 순화하고, 치유하고, 승화시켜준다는, 각별한 의미를 눈물에 부여하고 있다(여기서 눈물은 카타르시스 곧 정화를 상징한다). 때로, 상처의식은, 자극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려는 듯 안쪽으로 웅크린 몸이나, 자극을 외면하는 감은 눈, 그리고 피가 맺힌 가슴 등,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권경엽_Black Nails_캔버스에 유채_130×162.2cm_2009

그리고 상처의식으로 치자면, 무엇보다도 붕대를 들 수 있다. 주로 얼굴의 일정부분을 가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아마도 다른 신체부위들에 비해, 얼굴에서 상처의식이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된다는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붕대는, 여기서 신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체가 기억하고 있는 상처, 신체 속에 기억으로 저장된 상처, 정신적인 상처, 존재론적인 상처를 가린다. 붕대는 안대가 그런 것처럼,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몸이 기억하고 있는 상처(때로, 의식은 상처를 잊어버리지만, 몸에 기억된 상처는 결코 잊혀지지가 않는다)를 감싸고, 껴안고, 보듬고, 위로하고, 치유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때로, 얼굴과 함께 신체를 칭칭 감고 있는, 붕대는,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론적 상처와 대면하고 치유하는, 제의적이고 주술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권경엽_Space of Memory_캔버스에 유채_162.2×130cm_2009

망각의 저편에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상처와 만나다. 사람이 죽으면, 레테의 강을 건너야하는데, 망각의 강이다. 그 강이 망각의 강인 것은, 아마도 현세에서의 욕망(그 자체 망각의 대상인)과 단절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세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도, 사자들의 영혼들 중에는 현세에서의 욕망과 단절되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욕망에 집착하고 연연해하는(욕망이 망각보다 강한) 경우도 있는데,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현세에서나 지옥에서나, 욕망이, 그를, 똑같이,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 결국, 천국과 지옥은 내세가 아닌, 현세를 위해 예비 된 세계가 아닐까. 말하자면, 현실적인 욕망의 유무가 지상천국을 실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상지옥을 사는 원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이 없으면 좌절도 없고(바로 그 좌절감이 지옥이다), 비상하지 않으면 추락할 염려도 없다(바로 그 추락감이 지옥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고, 비상을 꿈꾸는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삶은, 아이러니한 삶, 부조리한 삶, 비극적인 삶임이 드러난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라는, 정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아이러니한 삶, 부조리한 삶, 비극적인 삶은, 그가 인간인 한, 필연이다. 바로 그 필연으로부터 유래한 좌절감과 상실감이 인성 속에 치유 불가능한 상처, 존재론적 상처, 트라우마를 심어 놓는다. 욕망은 좌절감과 상실감 곧 일종의 결여의식이며 결핍의식이다. 욕망은 언제나 결핍된 것을 욕망하는 법이다. 결핍(의식) 없이 예술은 없다는, 토마스 만의 말은, 욕망 없이 예술은 없다는 말로서 고쳐 읽을 수 있다. ● 한편, 레테의 강에는 사자들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뱃사공이 있는데, 카론이다. 작가는 카론을, 남성보다는 여성 이미지에 가깝게, 최소한 중성적인 이미지로 그려놓고 있다. 우울한 듯, 무표정한 듯, 중성적인 얼굴 표정 속에 이렇듯 좌절감과 상실감이 만들어준 존재론적 상처를, 영광의 상처(지옥과 맞바꾼, 인간의 자의식)를 심어놓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카론은 망각을 상징하며, 존재론적 상처를 상징하며, 인간의 자의식을 상징한다(어쩌면,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녀들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이런, 카론들일 것이다).

권경엽_Oblivion_합성수지_28×16×14.5cm_2009

그런가하면, 망각의 강은 강이며, 물이다. 작가는 그 물을 자궁 속의 양수로, 그 양수 속을 부유하는 태아로 변주한다. 도대체, 태아가 뭘 망각한다는 말인가. 태아가 망각할, 망각해야할,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플라톤은 인간이 이데아의 이상세계로부터 지상세계로 태어난다고 보는데, 태아는 그 이상세계에서의 기억을 지우고 있는 중이다(마치 현세에서 내세로 태어난 영혼이 현세에서의 기억을 지우는 것처럼). 그런가하면, 라캉은 유아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맞닥트리는 세계가 상상계라고 본다. 언어와 기호와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상징계로 넘어가기 이전의, 개념도, 구별도, 차이도 없는, 그 자체 자족적이고 완전한 세계며, 충만한 세계다. 여기서 유아는 망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을 위한 어떠한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족적이고 완전한, 충만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 중엔, 그 속으로 뭔가를 주입하고 있는 것 같은, 머리에 가녀린 호스들이 어지러이 연결된 태아도 있다. 여기서 태아는 어른이 퇴행하고 퇴보한 상태를 예시해준다. 어른의 무엇이 퇴행하고 퇴보하는가. 어른의 기억(상처)이 유래한 기억(상처)의 원천으로 퇴행하고 퇴보한다. 인간의 의식은 곧잘 상처를 잊어버리지만, 몸은 결코 상처를 잊지 못한다. 그렇게 몸에 기억된 상처의 원형을 찾아서 퇴행하는 것인데, 그곳에서 그는 태아의 머리에 연결된 호스로 최초의 억압(억압된 기억)이 주입되고 있는 것을 본다. 즉 유아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편입하고 진입하기 위해선 상상계의 자족적인 세계를 포기하고 억압해야 한다. 그렇게 억압되고 포기된 상상계가 상처가 돼 무의식의 지층으로 숨어들고, 몸에 새겨진다. 이렇게 작가는 망각의 저편으로부터, 잊혀졌던 상처의 원형과 조우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091214f | 권경엽展 / KWONKYUNGYUP / 權慶燁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