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1209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미술가 / 김병걸_김인태_리장뽈_박상현_박종규_임정은_홍승혜 공학자 / 김덕수_김정민_원정인_스기하라 코키치 건축가 / 유기찬_김재준_김재관_박치원 수학자 / 이병국
디렉터_황인(아트 액티비스트)
주최 AVA(Association of Voronoi Art)_Voronoi Diagram Research Center_한양대학교
공동참여 BK21 Sustainable Architecture Professional Education Center_한양대학교
후원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pm~06:00pm
아트파크_ARTPARK 서울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 Tel. +82.2.733.8500 / +82.2.3210.2300 www.iartpark.com
노이즈, 대지의 기하학 Noise, Geometry beyond & beneath the Earth ● 원래 기하학은 홍수 등으로 지형이 심하게 변하는 땅의 면적과 그 소유권에 대한 시비를 없앨 목적에 의해서 출발하였다. 땅의 형태는 계속 변하고 있으니 시비를 가릴 불변의 어떤 기준을 잡을 필요가 있었기에, 기하학이 성립되는 공간의 기준점이 끊임없이 변하는 땅,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땅(Geo)에서 출발하였으나 기하학의 운명은 처음부터 땅을 떠나야하였는지도 모른다. 기하학이란 학문은 이미 오래전에 땅을 떠나 관념의 순수공간 위에서 구축되어왔다. 허허롭게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는 불가촉의 순수공간, 그 어느 지점에 기하학은 홀연히 존재하고 있다. 비가 내리면 풀이 자라고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고 흙냄새가 나는 울퉁불퉁한 대지의 변화무쌍한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하학의 절대적인 질서가 구축한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의 질서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미술 중에 미니멀 아트가 있다. 질서란 룰(rule)이 간단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 룰의 적용범위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 최소한의 몇 개의 룰로 집약되는 조형의 질서를 포착하고 이를 표현해냄으로서 최대한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미니멀 아트의 본령이 아니던가. 마찬가지로 몇 개의 공리와 정리로 기하학은 무한대의 공간에 질서를 부여할 줄 안다.
미니멀 아트와 기하학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닮아 있다. 대개의 미니멀 아트가 사각형 등 단순한 그리드를 수용하는 이유는 그리드가 질서를 유지하는데 가장 유용한 단순한 형태일 뿐 아니라 자기유사성으로 인해 반복과 조합이 가능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실재하는 모든 형태들은 몇 개의 기하학적인 질서로는 포착되지 않는 복잡한 형상을 띄고 있는데 이를 가시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구상미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시적인 형태의 뒤에 숨어있는 비가시적인 조형의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추상미술이라고 한다면 추상미술의 한 흐름에 색채, 형태 등 조형의 질서를 기하학적 질서로 밝혀내려는 미니멀 아트가 등장하는 일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더 나아가 '니엘 또로니'처럼 행위의 시간적인 질서를 공간적인 기하학적인 질서로 치환한 경우도 있다. 이처럼 미니멀 아트는, 애초에는 무질서한 땅에서 출발하였으나 질서를 찾기 위해 기어코 땅을 떠나버린 기하학의 행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미니멀 아트는 조형의 순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조형의 질서를 강조한다. 미니멀 아트가 재료적인 측면을 될 수 있는대로 희박화시키거나 중성화시키려는 노력도 이 질서를 더욱 강조하고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노이즈의 세계 ● 미술이란 관념의 문제이기 이전에 일차적으로 몸과 재료의 긴장관계다. 대지를 떠난 기하학, 순도 높은 조형의 세계로 나아간 미니멀 아트를 다시 출발지로 보자. 기하학을 거친 대지 위로, 미니멀 아트를 몸과 재료가 뒤범벅된 표현의 세계로. 예술은 표현(expression)이다. 표현을 강조하거나 약화, 회피하는 차이가 존재할 뿐 원래 예술의 운명이란 표현 그 자체를 부정할 수가 없다. 미니멀 아트는 표현을 회피해왔다. 질서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표현이란 매우 불순한 것이 아닌가. 표현이란 내부에 압축되어 있던(press) 것이 외부로(ex) 분출되는 행위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짜내는 것과 같은 행위다(espresso와 expression은 동의어). 내부의 것이 외부의 질서에 동조하거나 순응하여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다면 외부와 내부 사이에는 압력의 차이가 존재할 수가 없고 따라서 표현이란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표현이란 외부보다 내부의 밀도, 압력이 높을 때 발생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질서를 강조하는 미니멀 아트는 내부의 압력을 낮추길 요구한다. 여기서 내부의 압력이란 삼인칭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는 불순한 일인칭 몸의 압력이다. 이 불순한 압력의 정체는 끈질기게 질서를 거부하려는 불가해한 그 무엇이라 할 수가 있는데 이를 가리켜 '노이즈'라고 불러보자.
전통적인 표현주의 미술에서는 사실 노이즈가 인식되지 않는다. 몸의 압력, 재료의 노이즈 그리고 표현이라는 행위, 이 모두가 함께 엉켜서 캔버스 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질서를 만들기 위한 '선택과 배제'라는 작업이 있을 필요가 없다. 선택이 없으므로 배제도 당연히 발생하지 않으며 노이즈라는 사건 또한 인식이 되지 않는다. 미니멀 아트의 결과에서는 노이즈가 드러나지 않는다. 노이즈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노이즈를 배제하는 행위에서 노이즈의 정체가 더욱 확연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하학에 원래 땅이라는 거친 존재가 있었듯이 예술에 몸이 집요하게 동반되었다는 것은 여러 정황에서 드러난다. 예술과 기술이 동일한 의미를(art와 technology/techne는 동일 祖語를 가짐) 지녔던 시절과 그 이후의 사태에서 보여지듯, 기술이 몸을 떠나가고 있을 때 예술은 몸의 주변을 여전히 떠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근대 이후, 예술과 기술을 가른 기준은 몸의 유무에 있다. 그런데 미니멀 아트는 이러한 몸의 영역마저도 배제하려고 애를 써왔다. 몸은 하나의 오브제로서 객관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인칭 주체로서 주관적인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질서는 절대적인 객관성의 기초 위에 성립된다. 주관적이라고 하는 건 질서를 거스른다는 뜻이 된다. 몸이라는 양상은 삼인칭 오브제로서는 객관적인 질서에 순응하려는 한편, 일인칭 주체로는 그 질서를 거부하며 긴장관계를 이루려 한다. 이건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재료가 중성화되었을 때는 객관적인 질서에 편입되지만 스스로의 물격(物格)을 주장할 때는 그 질서에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양상들은 기하학적인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노이즈'에 다름 아니다. 내부의 압력이 전혀 없는, 극단적으로 투명하다고 하는 공간의 세계에서도 공간이 찌그러지거나 공간끼리의 충돌이 일어날 때는 노이즈가 발생한다. 2차원 공간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3차원 공간은 노이즈가 발생한 사건이다. 3차원 공간 안에서도 모서리의 한 면이 찌그러지면 거기서 노이즈가 발생했다고 본다. 기존의 공간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생명을 향해 ● 조형의 역사는 질서와 노이즈의 긴장과 화해의 프로세스로도 볼 수가 있다. 노이즈를 인식하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고 칸딘스키의 경우에서 보듯 노이즈를 점, 선, 면 등 공간적 질서의 범주에 묶어서 이해한 때도 있었다. 또 이후 미니멀 아트에서 보여지듯 노이즈를 공간적 질서에서 분리하여 배제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 열리는 '하이브리드 지오메트리'전은 2004년 동경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보로노이 다이어그램(voronoi diagram) 심포지엄'에서 발의되어 이듬해부터 열리기 시작한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진화공간' 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대기하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은 미니멀 아트에서 보여지듯 균질한 공간분할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자연계의 실재적인 구조가 그러하듯, 비대칭적이면서 크기와 세력이 다른 영역(domain), 즉 불규칙한 부분공간(voronoi cell)을 다룬다. 처음에는 단순한 노이즈 공간이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과의 유기적인 질서를 잡아감을 알 수가 있다. 이는 고전기하학에서 말하는,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진 질서와는 다르다. 마치 대지의 기하학에서 보여지듯 혼돈 속에 무질서한 상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로 질서를 잡아가는 프로세스와 비슷하다. 예전 같으면 균질공간에 발생한 노이즈라고 배제되거나 강제로 변형될 수도 있는 공간의 영역은 컴퓨터의 연산능력의 발전으로 많은 부분이 공간의 자격을 얻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유기적 기하학이라고 불러보자. 고전기하학의 공간은 컴퓨터에 의해 연산처리 되면 반복적인 대수학의 작업으로 바뀌게 된다. 기하학이 공간의 질서를 따른다면 대수학은 시간의 행렬을 따른다. 어떤 특정의 부분공간이 시간을 확보함에 따라 주변공간과의 타협과 인터액션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생명의 유기체적인 속성과 비슷하다. 또 시간은 발생(generation)이라는 사건을 가능케 했다. 이 또한 유기체의 양상을 띈다. 허허로운 공간이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고 땅이 생명을 낳았듯이 유기적 기하학도 다시 땅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미술에 오랫동안 동반되었던 몸과 재료는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한 '영원한 질료'(독일어의 Material/Mutter 영어의 material/mother/matter는 '어머니'라는 동일한 뜻을 지님, 동양적인 사유에서는 땅을 뜻함)에 속한다. 이들이 머물 곳은 엄격한 고전기하학적인 공간이 아니라 거칠긴 하나 땅의 기하학, 발생의 기하학이 빚어내는 노이즈의 세계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 대지의 공학이자 예술인 건축이 함께 하는 일은 의미가 더욱 심장해 보인다. ■ 황인
Vol.20091212e | 하이브리드 지오메트리 hybrid geometry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