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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빈 공간의 바퀴살과 '너머'의 공간지형-남은경의 조각과 상서로운 의미들 ● 비움 그의 작업실은 시멘트벽돌concrete block로 지어진 아담한 크기의 창고이다. 벽돌을 쌓은 뒤 마감을 하지 않아 벽돌 쌓인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창고 내부의 공간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천정의 목재 트러스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이 공간에 잠입하여 비우고 덧칠했다. 작은 구석의 묵은 물건까지 샅샅이 꺼내어 버린 뒤 흰 페인트로 벽을 바꾼 것이다. 시멘트벽돌의 거친 질감과 흰색의 아우라가 혼합되자 창고였던 공간은 새로운 생성을 위한 둥지로 탈바꿈했다. ●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한다.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방이 비어 있어서 방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의 바탕이 되고, 비어있음은 쓰임의 바탕이 된다고. 남은경이 체득한 공간론은 창고를 둥지로 바꾸는 데에서 다시 출발한다. 창고의 존재감이 그에게 이로움의 바탕이 된 것이며, 그것을 비움으로써 쓰임을 창출하게 된 것이기에. 그의 작품들은 이 쓰임의 공간에서 발아한 작은 싹들이다. 공간이 공간을 낳는 이치. 그러나 그의 창고는 입구만 있을 뿐 다른 출구를 갖지 않는다. 실제 공간에 대한 그의 상상공간이 싹 틔울 수 있었던 것은 공간을 유희하는 새로운 '출구' 덕분이었다. 비움의 이치로 문을 내고 창을 뚫어 공간을 확장해 나가는 상상의 출구전략. 그리하여 그는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을 실현시킨다. 『도덕경』11장의 첫 행, 그 뜻은 이렇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텅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게 된다. 이-푸 투안Yi-Fu Tuan에 따르면, 공간은 움직임이며, 개방이며, 자유이며, 위협이다. 장소는 정지이며, 개인들이 부여하는 가치들의 안식처이며,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이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미지의 공간은 친밀한 장소로 바뀐다. 즉 낯선 추상적 공간abstract space은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 장소concrete place가 된다. 그리고 어떤 지역이 친밀한 장소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지역에 대한 느낌(또는 의식), 즉 장소감sense of place을 가지게 된다. 투안은 '장농 속의 은밀한 서랍'을 통해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장소와 의식이 하나인 은밀하고 아늑한 그 어떤 세계"(최광임)를 표상한다. 예컨대 그런 공간은 현실계의 '고향'일 수 있으며, 작가에겐 작업실母宮,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론 무의식의 초현실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은경의 조각은 바로 그것. 비움의 공간에서 뽑아 올린 '바퀴살'들이며, 그 바퀴살의 세계 안쪽에 자리한 서랍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 세계로 가기 위해 문을 건너야 한다.
문 ● 흰 벽에 세워 놓은 문은 일반적인 단독주택의 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스테인리스 판을 디지털 컷팅으로 잘라 낸 두 겹의 이 문은 비움을 향한 초현실적 공간을 엿보인다. 촬영을 위해 바닥에 기대 놓았으나 전시공간에서 문은 대지보다 위에 설치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은 공간 속에서 다른 공간을 여는 문이 될 것이며, 두 공간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작업실의 문은 미지의 출구로 열려 있었다. 그렇다면 저 출구 너머의 푸른 세계는 어디란 말인가. 작가는 열린 문 사이에 코발트블루의 깊은 심연을 새겼다. 우리가 만약 저 블루의 실체에 근접할 수 있다면 남은경이 제시하는 낯선 추상적 공간의 비밀을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 장소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문 너머 ● 문에 관한 종교적 상징은 성서에서 찾아진다. 그리스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했다. 그의 설교는 천국의 문을 향한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지가 될 사람이 있다."(눅 13:22~30) 앙드레 지드는 『좁은문』에서 알리사의 입을 빌어 "나의 마음이 부인하는 이 덕은 과연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라며 되묻는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버려야 하는 세속적 사랑과 종교라는 덕에 대한 인간적 고뇌의 절규가 아닐 수 없다. 남은경의 문이 그리스도와 지드의 문이 아닐지라도 문의 상징은 그 열림과 담힘의 경계에 존재하는 그런 인간적 고뇌의 침묵과 같을 것이다. 뤽 베송의 영화 『그랑 블루Le Grand Bleu』에서 자크는 바다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 어느 날 밤 그랑 블루의 심연 속으로 끝없이 잠수한다. 영화는 그곳이 죽음 너머에 존재하는 자연과 인간의 '일여세계一如世界'임을 암시하며 막을 내린다. 남은경의 문은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 너머의 세계는 온통 서랍이다. 문 너머의 문처럼 서랍 속에선 서랍공간이 연이어 줄을 탄다. 끝없이 이어지고 상승하는 서랍 속 세계는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초현실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작업실 천장의 상량까지 치솟은 한 작품을 보자. 마치 사다리처럼 혹은 탑신처럼 쌓인 이것은 열리고 열린 서랍일 뿐이다. 사다리도 탑도 아니다. 그러나 시각적 기호로써 이 서랍들은 사다리가 되고 탑이 된다. 한 세계가 열리면 또 한 세계가 열리는데, 그것은 집(방) 위에 집이 쌓인 탑의 구조를 적확하게 은유한다. 그런데 이 조각들은 그런 초현실적 공간을 덩어리가 아니라 선을 이용하고 있다. 벽에 납작하게 기대어 설치된 이 구조들은 그래서 '바퀴살'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바퀴살 ● 바퀴살은 비움의 긴장태를 강력하게 유지하는 힘이다. 수레바퀴의 바퀴살은 바퀴살 사이의 비움을 위해 존재한다. 그 비움이 많을수록 수레는 더 무거운 것을 싣게 된다. 이때 매우 중요한 것이 바퀴살의 텐션이다. 남은경은 '너머'의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바퀴살의 '살'을 이용했다. 그 선의 집적물, 구축물을 통해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벽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판을 오려낸 이 선들이 제시하는 시각적 착시현상이다. 들어가고 나오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는 이 형국에서 우리는 인식의 오차와 탈주의 유목지향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퀴살을 타는 롤로코스트의 시선은 이미 서랍이 지시하는 너머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지 않은가.
피보나치수열 ● 12세기 말 이탈리아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 Fibonacci는 자연의 이치에서 독특한 수의 배열을 발견했다. 피보나치의 수열이라 불리는 그 개념은 한 쌍의 토끼가 매달 한 쌍의 토끼를 낳고, 새로 난 토끼가 두 달 뒤부터 새끼를 낳는다면, 토끼의 쌍은 어떻게 불어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수의 배열을 말한다. 피보나치수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식물의 잎차례이다. 잎차례는 t/n으로 표시하는데, t번 회전하는 동안 잎이 n개 나오는 비율이 벚꽃 사과는 2/5이고, 포플러·장미·배·버드나무는 3/8, 갯버들과 아몬드는 5/13이다. 모두 피보나치 숫자다. 이러한 자연의 선택은 황금비율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또 다른 예로 암모나이트의 둥근 회전율을 살필 수 있다. 남은경의 조각이 황금율을 갖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둥근 컵 속에서 컵이 크기를 확대하며 이어져 나오는 모습이나 서랍 속 서랍이 열리는 모습은 t/n의 규칙과 상당히 닮았다. 즉 남은경 조각의 형상미학은 달팽이 껍질처럼 무한 반복으로 이어지는 어떤 규칙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 흐름은 자연의 미학과 일정부분 괘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디지털 컷팅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교한 드로잉 작업을 진행한다. 자율 드로잉이라는 스케치 과정이 끝나면 눈금이 새겨진 건축도면지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치밀하게 계산된 수치를 적용하지 않으면 공간과 형상을 이루는 살들의 균형이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오차 범위를 줄이며 도면을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피보나치수열과 같은 일정한 리듬, 균형, 황금율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살들의 시메트리symmetry야 말로 우리가 탐험해야 할 너머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세계 ● 그가 작품을 구상하는 방에는 벽화를 위한 모형작품이 있었다. 여러 개의 문과 문 사이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블루였을 문 사이의 풍경은 공교롭게도 마그리트의 초현실적 풍경을 떠 올리거나 혹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3차원 풍경을 생각하게 했다. 에셔의 『Relativity』라는 작품은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실상 그 세계는 마그리트의 세계도 아니요 에셔의 세계도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그런 세계이다.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의 실체는 역설적이게도 지금 여기의 현실과 이어진 세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세계는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어둠일 테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남은경의 작품에서 존재하지 않을 낯선 세계로서의 너머가 아니라 구체적 장소로 인식될 리얼리티의 세계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야만 가능한 판타지의 신화공간으로서 말이다. 그는 우리에게 좁은문 너머를 보라고 말하는 듯 하다. ■ 김종길
Vol.20091212d | 남은경展 / NAMEUNKYUNG / 南銀景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