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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125_수요일_05:00pm
후원_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인_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공간, 숭고의 경계 — 정보영의 근작들 ● 1. 회화가 공간예술이면서 공간 자체를 직접 다룬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서구의 경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떠나 근대 미술에서 이러한 전통의 맥을 찾기란 쉽지 않다. 왜 그럴까를 생각하게 된다. 모더니즘의 사조가 등장하면서 회화는 본질적으로 2차원 평면이라는 것과 이를 준수하는 한에서만 예술이라는 '그린버그의 필요충분조건'이 공간전통의 맥을 차단하는 족쇄의 역할을 했던 게 틀림없다. 도상들이 가져야 할 3차원 자질들을 2차원으로 환원해야 했던 사정은 물론, 무엇보다 지구촌의 주축국가들이 이에 동조했던 게 주요 원인이었다. 이제는 이 금기를 깨트려야 할 때인데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을 찾아 나서는 과감한 실험을 찾기가 어렵다. 이를 여전히 막고 있는 이유들이 있다는 뜻이다. ● 매체에 대한 몰입(?)이 이를 가로 막고 있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1980년대 이후 '매체의 시대'를 맞으면서 공간에 대한 사유실험이 절하되었던 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양자론과 우주론이 가져온 공간에 대한 '다차원 사유'(multi‐dimensional thought)는 한없이 개화되고 있다. 미술계는 목전의 것에 눈이 멀어 공간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 매체에 의한 이미지들의 회화는 우후죽순처럼 번창하고 있는 반면, 공간에 대한 회화적 탐구는 너무나 미진한 채 있다. 공간 탐구가 이미지의 재생산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정보영이 십수 년여를 공간에 대한 회화적 사유실험을 지속해오고 있는 데 즈음해서 이 말을 하는 건, 그녀를 위해서는 아주 시의 적절한 게 아닐까싶다. 1997년 첫 개인전(한전프라자 Gallery KEPCO Plaza) 이래, 정보영은 대상물 내지는 사물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이것들을 '공간을 빌려' 접근하는 발상을 반복해오고 있다. 초기에는 라캉의 '거울'의 개념을 등장시켜 공간의 형이상학을 실험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공간의 죽음 1996」, 「두 개의 공간에 대한 바로크적 상상 1997」, 「안으로부터 1997」, 「밖으로부터 1997」를 시작으로, 「깊은 공간으로부터 1998」, 「일시점에 의해 고안된 완벽한 공간, 그것의 열림 1999」, 「현재를 비켜가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2000」을 거쳐, 「한계지어지다, 2001」, 「나누어지다 2003」, 「다가오다 2003」, 「방문 2004」, 「바라보다 2005」, 「밝은 방 2005」, 「머무르다 2006」, 「바라보다 2007」, 「바라보다 2008」, 「함께-속해-있다 2009」, 「바라보다, 2009」에 이르는 일련의 작업들이 모두 공간 탐구의 계보를 줄기차게 전개시켰다. ● 일련의 작품들을 앞에 했을 때, 그녀의 회화사적 선례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태리 르네상스시대 알베르티(Leon B. Alberti)의 '창'(window)이 떠오르는가 하면, 바로크 시대 베르메르(Jan van Vermeer)와 지난 세기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형이상학적 공간을 차례로 상기하게 된다. 한마디로 '일시점(一視點) 투시공간과 다(多)시점 투시공간을 허용하는 것 말고도 정신분석적 왜곡과 치환 등 그 녀의 공간실험은 다양한 면면을 중첩하고 있다. 이 시도는 작가가 특히 2007년 이후 빈번히 등장시키고 있는 「바라보다」라는 명제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기하학적 실재로서의 공간이 아니라 공간을 '바라보는' 화자(painter)의 주체를 포함시킨 공간들에서 말이다. ● 따라서 공간들을 다차원적으로 연계하면서도 앞서의 선례들과의 차별성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가 정보영의 주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2. 초기에서 최근까지 치열한 열정으로 전개해온 정보영의 작업세계를 일관하고 있는 건 그녀가 자신의 공간을 '보이는 것'(the visible)과 '보이지 않는 것'(the invisible)의 '경계'(boundary)에다 위치시킨다는 거다. 그녀가 응시하고 이해하는 공간의 키워드는 이 점에서 알베르티의 그것이 결코 아니다. 알베르티의 공간이 보이는 것들의 경계(visible things' boundary)라고 한다면, 정보영의 공간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계 쪽으로 상당히 편향해 있다. 여기에다 베르메르의 회화에서와 같은 밝음과 어둠의 교차를 강조한다든지,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공간을 추가함으로써 적어도 그녀의 공간은 다층적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 어디에도 편승하고 있지 않다. 이 정황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境界, bound)를 회화적으로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 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 언급될 수 있다. 하나는 보이는 사물들을 그처럼 현전케 하고 존치시키는 동인의 측면이다. 이게 없어서는 사물들이 존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말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보는 건 사물들이지 공간은 결코 아니다. 굳이 공간을 본다고 한다면, 보이는 것들을 감싸는 '경계'라는 뜻에서다. 다른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것이란, 이를테면 보이는 사물들에 가리어 있거나, 거기에 깊숙이 내재해있거나 초월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건 물론, 미생물이나 원자와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이거나, 우주 같이 아주 큰 것들, 아니면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 등 미스터리 한 것들을 포함한다. 정보영의 공간은 전자를 빌려 후자의 맥락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점에서 칸트와 리요타르(Jean‐Francois Lyotard)의 해석을 빌리자면, 정보영은 '숭고'(崇高, the Sublime)의 경계를 붙잡는다. 그녀의 작품들이 베르메르가 그랬던 것처럼, 건축원근법을 사용하면서도 일부 기하학적 3차원 공간을 비틀어놓는다는 뜻에서는 물론, 이것들에다 '침묵'(silence)과 '빛'(light)이라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개인적 동기들을, 흡사 키리코가 그랬던 것처럼 투사함으로써 '숭고의 경계'(bound of the sublime)로서 공간을 다룬다. 숭고의 경계는 공간과 주체간의 엄청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성난 파도'가 밀려올 때처럼, 예상할 수 없는 힘에 밀리는, 이를테면 자아의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계가 숭고다. 이를 '타자적'(other‐like)이라 하는 건 자아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공간과 주체 간에 거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정보영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그녀의 사유주체(Cogito)의 시각적 등가물(visual equivalent)이 결코 아니다. 굳이 말해, 작가의 '몸주체'(corporeal subjectivity) 전체에 대응하는 '응시체'(凝視体, gazed object)라고 할 수 있다. 응시체란 주체에 대해서 타자로서 근접해오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공간을 사유 공간으로서 간주할 수 없게 된다. 아니 그 이전의 불가사의한 세계의 것이다. 이 세계가 자아와 관련을 갖는 것은 겨우 자아의 내심(內心inner mind)에 저장되어 있는 무의식적 리비도가 육화된 '환상적 등가물'(phantastic equivalent)일 경우에 한해서다. '무엇에 응(凝)해서 본다'(to see to cake on)는 뜻의 응시는 '그냥 본다' 라든가 '보기위해서 본다'라고 할 때의 '무관심적 시선'(disinterested looking)이 아니다. 철저하고도 뜨거운 관심으로, 말하자면 몰(沒)주체적으로 대상이나 공간에 관여하게 된다. 정보영의 공간은 일상의 사물들이 그 안에 정교하게 자리하는 알베르티의 공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신의 신화가 숨을 쉬는 공간이다. 그의 공간은 이를 위해 일찍이 존재했던,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사물들을 빌리긴 하지만, 이것들이 한번도 그처럼 존재한 적이 없는, 이른 바 보이는 것들의 경계로부터 이것들을 이탈시킴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계에 존치시킨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계로부터 보이는 사물들, 이를테면 사과⋅의자⋅촛불⋅밝음과 어둠⋅실내외의 풍경, 마지막으로는 실내의 건축 공간 전체를 다시 보게 한다. 숭고의 경계가 최종 이것이다.
3. 정보영이 그려내는 경계는 일찍이 데 키리코가 1920년대에 제시했던, 그의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보여주었던 '자아론적 경계'(egoticist bound)는 결코 아니다. 그 대신 '타자를 위한 경계'(bound for other)로서의 공간을 보이고자 한다. 쉽게 말해, 공간을 빌려 자신의 내심을 토로하는 게 아니라, 타자를 빌려 타자 안에서 타자(other)와 더불어 숨쉬고자하는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 시간의 지속을 내재시키고 있는가 하면, 객체적 진실 같은 당당한 실재를 상기시키는 데가 있다. 이를 회화적으로 실험하는 방법론으로서 작가는 실내 건축공간을 빌리고 여기에 촛불을 도입한다. 옥외의 빛을 끌어들이고 어둠과 빛의 조합을 시도하는 것도 물론이다. 작품명제 「함께-속해-있다 2009」처럼, 자신이 응시하는 바를 촛불이나 실내건축 같은 당당한 크기와 질량을 갖춘 '사상'(event)에다 투사하고 동일시함으로써, 타자와 자아가 공유하는 공간을 창출한다. 그녀의 「바라보다」연작 역시 자아와 타자가 '소속을 함께 하는'(to belong together) 하나의 사건을 그린다. 내관(內觀)의 외화가 아니다. 관념의 증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실내건축에 드리운 어둠과 빛은 이것들이 촛불이나 태양, 나아가서는 전깃불, 그 어느 것으로부터 광원을 빌린다 할지라도, 단순한 사유의 등가물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이자 객체의 자질을 갖는 빛이고 어둠이다. 이것들을 포용하기 위해 공간 매체인 실내 건축을 차용하였다. 간혹 옥외와 옥내를 연결하는 거대 풍경도 곁들이지만 말이다. 실내건축 공간은 단순한 생활공간을 보이려는 게 결코 아니다. 어두운 곳이나 밝음이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한 호젓한 의자는 작가가 앉았던 자리와 체취를 간직한 특수한 위치값을간직하고있다 벽의 얼룩이 유난하고, 어두운 실내의 견고한 격자와 냉엄한 벡터 공간이 자아내는 무거운 분위기는 숭고를 시사한다. 외부로 통하는 창문과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와 외광의 풍경 모두가 엄연한 알베르티의 창을 상기시키면서도 타자적이다. 자아가 거기에 저항하면서 다가가야 할 숭고 그 자체다. 작가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다. 초는 불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빛 그 자체에로 다가가며,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어둠의 깊이를 더한다. 자신이 놓여진 건축물 바닥의 비정형의 얼룩들을 희미하게 밝히며 촛불은 자신에게 수여된 시간 만큼의 빛과 어둠 모두를 감싸안는다. (정보영, 2005) ● 여기서, 촛불, 어둠, 얼룩, 빛이라는 속성들은 모두 작가가 자신을 타자와 동일시하고자하는 건축공간의 객체적 성질이다. 작가는 이것들을 타자적 속성들로 내놓는다. 자신의 욕망의 품목들이면서 동시에 숭고와 타자적인 것들의 성질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근작들의 발아점이 이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보영은 잃어버린 공간에 대한 추억을 되살린다. 더 적극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다차원 공간개념을 회화적으로 실현한다. 거대 3차원계에 감추어진 미시적 다차원계(hidden multi-dimensional micro-worlds)를 그린다. 이른 바, 멀티 디랙셔널 월드 컨셉(multi-directional world concept)을 불러들인다. 애초 그녀는 초기작업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방향을 줄곧 추적해왔다. 「두개의 공간에 대한 바로크적 상상 1997」에서 시작해서 「현재를 비켜가는,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2000」을 거처, 근자의 「함께-속해-있다 2009」와 「바라보다 2009」에 이르기까지, 모순된 다자의 것들을 하나의 공간에 병존시켜 왔다. 사과나 인물, 의자와 같은 현존사물들을 모순된 공간의 와중에 현존시키는(to exist) 한편, 이것들이 현전하는(to present) 미묘한 방식들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촛불과 전깃불, 창밖의 빛이나 빛의 정경들을 실내건축 안으로 투사시켜 실내공간이 의외의 빛과 어둠으로 채워지고 나눠지는, 이른 바 하나의 실내공간이 여럿의 정경으로 분리되고 병합되는 정황을 연출해왔다. ● 정보영의 '공간회화'는 겉으로 보아서는 알베르티와 베르메르를 병합하면서도, 이면으로 가면 갈수록 키리코에서처럼, 모순과 현실의 전복가능성을 상기시킨다. 3차원의 재현인가 하면, 빛과 어둠을 빌려 단일소실점을 이간시키고 모순을 야기 시킨다. 이것들을 빌려, 작가가 현실 가운데서 겪고 있는 억압과 트라우마를 투사할 뿐 아니라 현실의 개조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이를 위해, 촛불의 명상을 통해서 겪고 사유하는가 하면, 이내 이러한 공간의 사유는 모순에 직면한다는 가설을 불러들인다. 전후가 꼬여 하나가 되고 전체를 이루는 방식을 빛과 어둠의 교점에다 존치시킨다. 이 순간이야 말로 작가가 화자(話者)의 주체로서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궁극적으로 작가는 자신을 화자(話者, utterer)로서 보다는, 단지 화자(畵者, painter)로 돌아가 침묵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사유하는 데 전심한다. 이것이 그녀의 매력이다. ■ 김복영
Vol.20091130e | 정보영展 / JEONGBOYOUNG / 鄭寶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