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공간들 혹은 그 속살 들여다보기

원용백展 / WONYONGBAEK / 元容伯 / photography   2009_1128 ▶ 2009_1208

원용백_Ambiguous City #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10×125cm_2007

초대일시_2009_1128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 온_GALLERY ON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B1 Tel. +82.2.733.8295 www.galleryon.co.kr

근대화의 공간들 혹은 그 속살 들여다보기 ● 원용백의 사진 공간 안에는 도시 풍경들, 더 정확히 부산광역시의 도시 풍경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원용백이 보여주는 풍경들은 너무 다양해서 얼핏 파편화된 풍경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성찰적으로 응시하면, 그 파편화된 풍경들이 다 같이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거주공간이든 노동공간이든 또 유희공간이든, 그 다양한 풍경들은 모두가 이 나라 오늘의 우리들 삶을 만들어 낸 근대화의 얼굴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근대화는,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대가 그 증언이 되듯, 식민화와 이데올로기 독재정치를 통해서 강압적으로 수입 이식된 타율적인 역사 과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의 풍요한 삶을 이루어낸 원동력 또한 근대화 과정이었음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면 근대화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삶은 무엇을 얻고 또 잃어버린 것일까? 다양한 도시 풍경들을 통해 부산광역시의 근대화 과정을 렌즈로 포착하는 원용백의 사진들은 다름 아닌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사진적 시도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원용백의 사진들 안에 들어있는 이 나라의 근대화에 대한 메시지들은 무엇일까?

원용백_Ambiguous City #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5×110cm_2007
원용백_Ambiguous City #3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5×44cm_2008

이 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렌즈로 추적하면서 그 의미를 묻고 있는 원용백의 사진 메시지는, 내 경우, 세 가지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 우선 풍경 사진의 층위가 있다. 부산광역시의 여러 얼굴들을 보여주는 원용백의 사진들은 굳이 그 장르를 따지자면 풍경사진에 속한다. 하지만 그 풍경들은 엄밀히 말해서 풍경들이 더 이상 아니다. 그 풍경들은 오히려 원용백의 사진 안에서 근대화 과정의 다양한 측면들을 드러내기 위한 사진적 은유로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풍경을 은유로 삼아 원용백의 사진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이 나라 근대화의 얼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군기지의 풍경이나 국립묘지의 풍경들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는 근대화의 부끄러운 족적들, 타율적 근대화 과정이 댓가로 치루어야 했고 아직도 앓고 있는 아픈 근대사의 상처들이다. 하지만 원용백의 시선이 보다 가열하게 응시하고자 하는 건 이 나라 근대화의 불구적이고 기형적인 속성들이다. 그 왜곡되고 기형화 된 근대화의 속성들은 무엇보다 공간과 구체적인 삶이밀접하게 중첩되어 있는 일상적 건축 공간들의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예컨대 그것이 고층 아파트이든 연립주택이든 맹목적인 기능주의와 절충주의만을 알고 있는 근대화가 만들어낸 이 나라의 거주 문화는 얼마나 조악하고 유치한가. 마찬가지로 그것이 놀이공원이든 유원지이든 고급 레스토랑이든 소위 여가의 자유를 소비하는 공공문화의 공간들이 보여주는 실용성과 상업성의 건축 형태는 또 얼마나 치졸하고 삭막한 것인가. 근대화 과정의 폐해를 일상적 건축 공간을 통해서 노현시키는 원용백의 사진들은 근대화 이 후 무국적적이 되어버린 이 나라의 왜곡된 건축현실에 대한 비판적 건축사진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원용백_Ambiguous City #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5×44cm_2008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는 건 원용백의 근대화 사진 속에 내포된 인물사진의 층위이다. 물론 원용백의 사진들은 풍경사진이고 그 풍경들 안에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상 안에서 풍경을 읽어내고 또 풍경 안에서 초상을 응시하고자 하는 오래된 인물과 풍경의 변증법적 재현방식처럼 인물이 반드시 구체적인 오브제로 등장할 때에만 프레임 공간 안에 인물 사진의 층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상적 건축 공간들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원용백의 경우, 그러한 풍경과 인물의 동시적 지각은 보다 더 설득력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어느 공간보다 일상적 건축공간이 사람이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경험의 공간이라면, 그 건축 공간 안에서 인물의 존재를 함께 지각한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원용백의 사진들을 인물사진으로 응시할 때 렌즈가 포착하는 여러 형태의 건축 공간들은 그만큼 다양한 인물의 얼굴들, 더 정확히 왜곡된 근대화 과정이 만들어 낸 이 시대 인물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보여준다.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르며 직립한 고층 아파트는 경제 절대주의의 시대를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본 축적과 상승에의 욕망을, 가로 세로 빈틈없이 줄 맞추어 도열한 어느 행사장의 플라스틱 의자들은 그 획일화 된 욕망구조 안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이 집체화 되어버린 너와 나의 탈 개인적인 모습을, 여름 날 저마다 햇빛 차단 모자를 쓰고 선거 유세장으로 동원되어 모여 앉은 일군의 유권자들은 정치의식을 상실하고 이름뿐인 민주 시민으로 전락해 버린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초상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인다. 왜곡된 근대화 속에서 불구적이 되어버린 근대적 삶의 얼굴들을 음화적으로 재현하는 원용백의 사진들은 풍경 속에 내재하는 인물 사진의 층위를 통해서 이 시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원용백_Ambiguous City #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10×125cm_2006
원용백_Ambiguous City #7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44×55cm_2007

마지막으로 심미적 층위의 메시지가 있다. 어쩌면 원용백의 사진들이 가장 공들여 전달하고자 하는 이 심미적 메시지는 그러나 프레임 공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심미적 층위의 메시지는 시각적 오브제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이 아니라 풍경과 인물 층위의 메시지를 독해하는 사이 보는 이의 의식 안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 작용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근대화 과정의 병리적인 증상들을 매개로 삼아 원용백의 사진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작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로 향하는 기억이다. 직립한 고층 아파트 너머의 빈 하늘, 해안 유원지 건너의 먼 바다, 연립 주택지 아래로 조용히 흐르는 하천 등등의 이미지들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상실해 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원용백의 사진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은, 역설적이지만, 미래로 향하는 기억이라는 점에서 보다 더 시사적이다. 예컨대 도열한 아파트들 사이에 언제라도 파열할 것만 같은 포화된 모습으로 묵묵히 웅크리고 있는 반원형 가스 저장소의 사진은 방향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자본주의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이 나라 근대화의 미래에 대한 기억, 더 정확히 경고적 기억을 일깨우지 않는가. 심미적 성찰과 연상을 통해서 근대화의 역사와 불안한 내일을 기억시키는 원용백의 사진들은 말하자면 우리 모두를 근대화의 깊은 잠으로부터 깨워내는 사진적 메멘토 모리다. 그리고 원용백의 사진들을 이해하는 일 또한 다름 아닌 이 메멘토 모리에 귀기우리는 일일 것이다. ■ 김진영

원용백_Ambiguous City #1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44×55cm_2009

Vol.20091129d | 원용백展 / WONYONGBAEK / 元容伯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