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된 기억 Reflected memory

정수영展 / JEONGSOOYOUNG / 丁首榮 / painting   2009_1125 ▶ 2009_1208

정수영_기억속의 풍경09-2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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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1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정수영 (풍경에) 반영된 기억 ● 작가 정수영은 자신의 화면을 '풍경에 반영된 기억' 이라 명명했다. 풍경에 관한 자신의 심리적 인상을 드러냈다는 이 풍경을 통해 방향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자아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숲 속에서 잊었던 자신의 기억을 다시 마주대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현실에서 어떤 기억들은 망각되는 것이고, 왜 다시 그 망각된 기억들은 숲을 통해 되살아나는 것일까? 그에게 숲은 편안한 자연의 품이 아니다. "숲을 나를 긴장시킨다"는 그의 언급처럼 그는 숲 속에서 자신이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숲에 관한 관념을 낯설게 함으로써 낯선 길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때처럼 스스로 긴장하며 생경한 숲을 마주 대한다. 인간이 숲에 부여한 기호학들의 수사를 제거하자 숲 속은 다양한 물성들의 집합체로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나무'라는 언어로 특정한 이미지들을 개념화하고 일반화하여 기호화시키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그의 작업은 시작된다.

정수영_기억속의 풍경09-5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09

숲을 탈 기호화하자 무수히 다양한 물성이 각각의 이미지로 그 역사성을 생생히 드러낸다. 정수영은 이 때 맞닿트리는 物의 물성에 대한 관심보다 그 物이 무구한 시간을 통과해오면서 몸에 각인된 그 物의 일상의 역사, 그 기억의 자국들에 집중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문인들이 괴석을 즐겨 그리던 이치와 닿아있기도 하다. 어느 하나 형태적으로 똑같은 괴석이란 존재할 수 없듯이 괴석은 그 형태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物이다. 돌 가득 주름이 깊게 파이고 중간 중간 구멍 뚫린 괴석의 형태미는 괴석이 누군가와 만난 기억들의 집합체이며 이는 괴석의 역사성에서 나온다. 이러한 괴석은 이를 감상하는 문인들의 작업을 통해 재탄생되곤 했는데, 문인들은 괴석을 통해 그 형태에 새겨진 무수한 기억의 시간. 즉 일상의 역사성에 탐복하고 각자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곤 했던 것이다. 돌의 역사성에 비하면 찰라를 살다 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수영_기억속의 풍경09-10_캔버스에 유채_80.5×130.5cm_2009
정수영_기억속의 풍경09-11_캔버스에 유채_80.5×100cm_2009

이처럼 정수영도 숲을 통해 그 안의 수많은 物에 각인된 기억들의 시간성을 마주 대하지만, 문인들처럼 이를 통해 윤리적 필터를 끼고 자신을 성찰하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놓은 제도와 윤리, 도덕 등의 시스템을 벗어던지고, 숲에서 만나는 무수한 생물들처럼 자신도 하나의 자연물이 되어,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억압된 충동을 풀어놓고, 잠재된 욕망을 잉태한다. 이를 통해 인간 사회의 현실에서 망각되어진, 망각될 수밖에 없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인간이 정글에 홀로 놓여졌을 때 엄습해오는 긴장감. 그 무장해제의 순간에 역설적이게도, 사물을 개념적으로 바라보는 언어의 세계를 탈출해서 물성 그 자체와 마주 서게 되며 그 물질 하나 하나의 형태와 그것을 잉태해 온 시간성에 맞닿게 되는 것이다. 그 시간성의 기억들과 맞닿아 내 기억들의 시간들이 해방되며 그 속에서 방향 잃은 나의 정체성, 나의 욕망, 망각된 나를 되찾게 된다.

정수영_기억속의 풍경09-19_캔버스에 유채_73×91cm_2009

물론 기억은 현실이 아니며, 망각된 기억은 되살아남과 동시에 추억이 되기 일쑤이다. 모든 비극적 기억이 추억의 필터 속에서 몽환적으로 변하듯이 그래서 그의 화면은 시적이다. ● 지필묵에 호분과 콘테를 사용하여 화면 안에 자신의 준법을 이룩해 자신의 언어를 구축해낸 작가 정수영이 어느 날 자신의 필법을 벗어던지고 유화를 들고 나타났을 때 많은 이들이 당혹했다.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매체의 변화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준법의 핵심인 필법을 벗어던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필묵에서의 그의 준법이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런 우려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던 매체와 준법을 바꾸어 버린 이유에 대해 작가는 '관조적 방식의 틀'이 싫었다고 대답한다.

정수영_기억09-2_캔버스에 유채_38×45.5cm_2009
정수영_풍경09-7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09

자신의 풍경을 본 관람자가 와유(臥遊)하지 않고, 자신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와 유람을 떠나지 않고, 화면 밖에서 관조만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화두이다. 자신이 낯선 숲 속에서 낯선 나를 발견하고, 그 긴장된 공간 속에서 망각된 무수한 기억들을 되살려 냄으로써 망각된 나를 마주대하게 되듯이, '반영된 기억'을 감상하는 관람자들이 자신의 풍경을 통해 각자의 망각된 나를 마주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반영된 기억'이 보다 생생히 전달됨으로써, 다른 낯선 이들이 낯선 숲으로 들어서는 하나의 창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바램이 그의 변화를 추동해내었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이전의 절제된, 감정적으로 정리된 화면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열려진 시적 화면을 통해 관람자 또한 작업 주체자로서 낯선 숲 그 기억의 창 안으로 걸어 들어오기를, 그렇게 소통되기를 바란다. ■ 박계리

Vol.20091128i | 정수영展 / JEONGSOOYOUNG / 丁首榮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