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112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_TOPOHAU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82.2.734.7555 www.topohaus.com
임영숙의 밥사발에서 만다라를 만나다 ● 말수 적은 그를 그림으로 만나는 일은 종종 놀라움이었다. 평소엔 엷은 웃음 외에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그이지만 화면 위를 종횡 무진하는 표현성과 두려움 없는 실험성, 그리고 방대한 작업량을 보며 '얼마나 많은 마음의 꼴을 깊이 묻어두었던 것일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그림으로 내지르면서야 눌렸던 소통의 균형을 찾아가는 그는 천상 화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이다.
꽃문양이나 식물성 소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 속에 도자기가 등장했던 것은 오래다. 긴 세월을 지나 온 도자기는 식물의 유한성과 어울리며 깊이와 울림을 만들었다. 도자기는 배경처럼 지워지기도 하고 간결한 선으로 표현되기도 하면서 '부풀어 오르는' 내면풍경들이 나래를 펴는 넉넉한 바닥이 되어주었으며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모아 담는, 조형적인 구심인 동시에 심리적인 구심처럼 보였다.
도자기 문양들에서 기억의 매혹을 느낀다는 작가는 그 표면을 '피부'라 부르기도 하더니 2007년의 전시에서는 급기야 얼룩말이나 젖소, 기린 같은 짐승 가죽을 그릇에 오버랩 시켰다. 유리질 표면을 숨 쉬는 부드러운 털로 바꾸고, 딱딱한 고체를 초현실적인 생명체로 바꾸어버린 이 낯선 상상력도 '가만히 도발적'이던 그이기에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서 화면 가득 하얀 밥공기로 등장하는 그릇은 더 이상 추억과 관조의 대상은 아니다. 그릇의 본질적이고 일상적인 기능으로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것으로 말하자면 재료실험에 자유롭던 그가 이번에는 철저하게 전통적인 채색양식을 고집한다. 한번 바르고 다시 마르기를 기다려 색을 올리는 과정은 무한 인내의 반복이다. 수차례 호분을 올린 밥사발에서 뽀얗고 반질한 조개껍질의 물성이 만져질 듯하다.
작가는 그 위에 쌀알을 새듯 그려 올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밥알을 목으로 넘기는 일에 대해... 물과 햇빛만으로 스스로의 밥을 빚어내는 나무를 보며 아팠다던 김훈의 말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먹이기 위한 고단한 수고를 평생 덜어낼 수 없다. 고봉의 밥사발이 조금 서러운 이유다. 밥알 위를 기어오르는 스파이더맨이나 밥을 향해 수직이동 중인 호빵맨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필생의 명제에 매인 우리들의 아바타일 것이다.
하지만 아침밥으로 시작하고 저녁밥으로 마감하는 일상 속에 피고 지는 애락들이 때로는 담담한 들꽃이나 여린 싹, 때로는 야물고 붉은 팥, 혹은 부풀어 오르는 브로컬리나 버섯들로 밥알들 사이에 경쾌하게 수놓아진다. 먹고사는 일의 소소하고 살가운 축제. ● 우리가 떠넘긴 밥알이 쌓여 목숨을 이어가듯, 그 한 무더기가 한 생의 전체이며 또 한 죽음일 것이다. 고봉의 밥사발과 봉분이 같은 형상인 것은 쓸쓸한 아이러니다. 그 위에 피어난 목단들은 한 생의 아름다운 고군분투에 대한 경배처럼 느껴진다.
쌀 한 톨씩 그려 넣는 일은 번뇌 망상 하나씩을 동그랗게 가라앉히는 과정이었으리라. 늘 한결같이 그녀를 받아내던 밥그릇! 쌀알 그리는 일은 그에게 치유 의식에 다름 아니었다. ● 화면 속 공기와 밥이 하나의 타원으로 둥그러진다. 삶도 죽음도 한데 어울려 원융의 동그라미를 그린다. 문득, 이 천진하고 무량한 동그라미 속에서 나는 하나의 만다라를 본다. 사각의 화면 속에 투명한 서글픔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지극한 동그라미. 그녀의 밥사발 만다라다. ■ 제미란
Vol.20091127e | 임영숙展 / LIMYOUNGSUK / 林英淑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