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ering

심영신展 / SHIMYOUNGSIN / 沈英信 / painting   2009_1125 ▶ 2009_1201

심영신_Flowering.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09

초대일시_2009_112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영아트갤러리_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2층 Tel. +82.2.733.3410 www.youngartgallery.co.kr

색과 감성, 그 안에 비추어진 '자아' 체험-심영신 작품론 ● 심영신의 최근작들을 바라보노라면 앙리 마티스의 회화가 떠오른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지중해 가까운 남프랑스의 밝은 햇빛 아래에서 작업했던 마티스는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로 화면을 가득 채우곤 했다. 이번 첫 개인전에 소개되는 화가의 작품들도 야수파 회화실험에서 유래한 듯, 강렬한 색채로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원색의 물감이 벌이는 향연뿐 아니다. 형태 묘사에서도 마티스처럼 자연주의가 아닌 대담한 생략과 변형의 양식을 선택했음을 주목하게 된다. 화면 위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굵은 백색의 선묘이다. 이로서 자연의 어떤 식물 형태를 간명하게 암시하고 있는데, 정밀한 재현으로서가 아니라 대상의 몇 가지 특성만을 축약하여 X-Ray로 투사하듯 묘사하고 있다. 구불거리는 선은 또한 바탕 화면의 색들과 하나로 작동하여, 마티스의 회화에서처럼, 데생과 색채를 융합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인다. 여기에 선과 색의 갈등은 조금도 없다. 작가는 탁월한 회화적 감각으로 두 조형 요소를 상호 호응하는 조화의 관계에 놓고 있다.

심영신_Flowering.2 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09
심영신_Flowering.3 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0cm_2009

심영신에게 있어 색에 대한 감성(sensation)은 작품 제작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다. 모든 작품에서 직선 아닌 곡선을 선호한 것-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직선이 없다-도 색의 감수성을 위한 배려인 듯 보인다. 근대 예술론에서 선이 이성의 요소이고 색이 감각의 요소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감각적인 색이 논리적인 선 혹은 데생에 비해 열등하다는 상대적 폄하의 인식이 있었다. 색의 불명확한 한계와 통제 불가능성 탓에 이성적 인식에 반하는 오류의 근원으로, 색의 감각성을 육체의 쾌락과 관련시켜 도덕적 퇴폐의 근원으로 경멸하였기에, 르네상스 이후 수 백 년 동안 데생 위주의 고전주의 양식이 서구의 미술을 지배 해왔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토대로 근대 합리주의의 사유가 자리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이성과 감각을 대립시켜 감각이나 정념은 오류의 원인이므로 이성으로서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면, 상당수 미술가들이 그러한 합리주의 인식의 틀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미술이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감각의 경험이고 오감 중 시각에 중점을 둔 프락시스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 화가들은 정확한 서술적 재현보다 왜곡과 변형을 수반하는 감각의 표현을 그리고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으로 체험되는 열린 감성의 상태를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감각주의 화가들이 자유로운 감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은 형태(形)와 색(色, 光)의 두 조형요소들 중 당연히 색이다. 더불어 색물감의 마티에르와 형태에 대한 전복의 방법으로 비정형을 흔히 선택한 점은 미술사를 통해 잘 알려진 바이다. 강렬한 색채를 구사한 야수주의로부터 전후 표현주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주된 미학적 입장이 감각론이며, 화가 심영신의 작업 역시 그런 맥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현대 모더니즘 회화는 지각의 측면에서 볼 때, 조각적이지 않고 회화적(pictural)이다. 이 말은 현대 회화가 매체의 고유성으로 환원하여 삼차원의 입체성이 아닌 평면성을 강조하고, 촉각성 보다는 시각적인 감각과 색채 효과를 더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심영신의 회화는 모더니스트 원칙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예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 분류는 어느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고 만다. 이를테면 그의 화면에서 고정된 형식주의 개념보다 주관의 유동적 감각에 충실한 채색 표현을 주목할 때 특히 그러하다. 화가는 삼차원 공간의 재현이란 오랜 모델을 벗어던지면서, 흔히 그렇듯 작품의 형식을 단순화하여 예술상의 자기표현을 최소한도로 억제하는 모더니스트의 진로를 밟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색의 가치를 의식적으로 증폭시킨 작업을 통해, 단번에 감상자를 불특정하고 다의적인 형태와 색채의 감각 체험 속으로 몰아넣는다. 강렬한 원색과 중첩된 물감의 넘치는 질료감은 감상자의 신경과 감각을 자극하며, 우리에게 이러 저러한 감각을 느끼는 체험 다시 말해 존재의 체험을 매개해 준다. 이 효과는 통합적이고 단일한 모더니스트 평면 회화에서 마주치던 현상학적 시각효과와는 다르다. 그의 회화는 선과 색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감각을 직접 전하며, 자연의 재현이란 주제 문제를 떠나 생동하는 회화적 감수성을 피부에 와 닿도록 한다. 그의 작품의 푼크툼 효과는 지각적 감각을 넘어 강렬하게 감각하는 존재까지 현시할 수 있는 바로 그 힘에 있지 않을까 한다.

심영신_Flowering.4 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7cm_2009
심영신_Flowering.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7cm_2009
심영신_Flowering.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0cm_2009

심영신은 뜻 밖에도 오랜 경력의 화가가 아니다. 2002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한 이후 지금까지 천천히 회화 수업을 해왔으며, 특히 2006년경부터 지금과 같은 작품 세계를 다져왔다고 밝힌다. 화가로 입문한 그는 처음부터 잔손질이나 재현 위주 묘사에 마음을 쓰지 않고, 색채 문제에 몰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작품들에도 들뜨지 않은 중간 톤의 색채와 강렬한 색들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며-그것을 화면 위에 배열하는 세련된 감각은 이미 탁월하다-, 색채와 형태의 연결망을 통해 추상적, 비물질적 감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 그의 작품 제목은 흔히 「자연-그 안에서」로 정해진다. 자연이란 거대한 어머니의 품 안에서 모든 생명이 탄생-성장-소멸하는 과정에 경이를 느껴서이다. 그래서 화가의 화면들은 때로 밝고 순수한 빛으로 화려하게 약동하지만 때로는 낮은 채도로 명멸하는 색점들이 생명의 고요한 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화가의 영혼과 감성이 자극받는 장소는 바로 이런 자연 순환의 시, 공간이며, 그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위치를 가리킨다. 물론 화면의 형상들은 자연의 구체적인 어떤 형태가 아니다. 짙은 녹청의 넓은 색면 공간에 밝고 컬러플한 좁은 색면들이 작은 꽃다발 모양으로 떠오르거나, 굵은 색 띠가 그 작은 색면들을 보호하듯 감싸 보듬어 안기도 한다. 때로는 테를 두른 모자이크식 색면들이 공간을 흐르는 유동체가 되어, 어둡고 따뜻한 모태 안에서 세포분열하는 원형질 단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 2008년 무렵부터는 눌린 듯한 형태에서 해방되어, 액션페인팅의 붓선들 같은 제스추얼한 색선들이 자유롭게 흐르는 화면이 나타난다. 간혹 그 색선들의 덩어리는 화면의 상단부를 가득 채우면서 무성한 잎들로 묵직한 나무나 무성한 꽃들을 가득 이고 있는 나무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경우이든 감상자의 시선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 위에서 진동하는 강렬한 색선과 물감 자국들에로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2009년 봄부터 등장한 형형색색의 중첩된 색면들은 화가의 그간의 서정적 구성 스타일에 최종적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전보다 훨씬 크고 명쾌한 색면들이 화면 전체에 펼쳐져 시각을 사로잡는다. 빨강과 녹색, 오렌지와 파랑의 색면들은 높은 명도와 채도를 유지하며, 강렬한 빛을 반사하는 효과로 화면을 긴장시킨다. 이전의 다소 규칙적인 점묘(點描)의 화면보다 캔버스 위의 전면적 긴장도는 한층 더 높고 그 만큼 팽팽한 평면성이 확보되어 있다. ● 그런데 그런 화면 위를 가로지르는 굵은 백색의 선묘가 있다.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작가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초겨울에 만난 풀꽃의 말라버린 "씨방"이다. 명료한 색채들의 중첩 위에 굴곡진 씨방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자연이 품은 저 진귀한 생명의 저장고, 바로 그곳이다. 생명의 끝과 시작이 여기에 있다. 씨방을 맺고 사그라지는 풀꽃은 생명의 엄숙한 종결로 비추어지지만, 그 씨방 안에 촘촘이 배여있는 작은 씨앗들은 신비하게도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린다. 그래서 자연의 영원 회귀를 알리는 상징인 씨방을 그린 화면은 생명의 강인함을 가리키는 원색들의 강렬함으로 부글거린다. 원초적 생명의 공간 그 위에서 하얀 씨방은 순결하게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심영신_Flowering.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09

사람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나간다 그래서 자연의 본질과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런 맥락의 하나로 서양 그리스신화에는 자연의 순환을 가리키는 상징적 존재가 있다.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자연 순환 원리의 상징인 '아도니스'란 정령이다. 아도니스는 해마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초목의 정령으로서, 항상 미소년 혹은 청년으로 묘사된다. 인간과 천지만물이 자연의 순리로 소멸과 탄생을 거듭하도록 관장하는 까닭에 아도니스는 언제나 젊고 생기발랄한 모습을 띤다. 화가 심영신의 화려하고 경쾌한 화면의 이미지가 바로 그런 아도니스의 생동감과 생명력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자연의 순환 원리에 매료된 작가는 당분간 이러한 밝고 풍부한 빛과 색채의 화면에 심취해 있을 듯하다. ● 인류역사에서 생명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맡은 이는 남성이라기보다도 여성 쪽이 아닐까 한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통해 자신의 몸으로 직접 생명을 안고 탄생하도록 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여인의 자궁은 곧 자연의 씨방과 동등하며, 생명의 줄기를 잇게 하는 시원이다. 심영신의 작품이 그려내는 '씨방'은 어쩌면, 여성의 근원적 모습 혹은 나아가 여성인 화가 자신의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이름 없는 풀꽃처럼,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보듬는 존엄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되어 온 여성의 자리이지만, 화가는 그 여성의 막중한 역할에 환호를 보내며 강렬한 빛과 색들로 찬사를 보내는지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씨방의 존재는 여성인 작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이미지가 될 수가 있다. ● 이 같은 '자기동일화'의 과정은 반드시 정확한 자기 재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다른 무엇 혹은 타자에게 반영하며 자아의 모습을 비추어 낼 수도 있다. 폴 리쾨르가『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Soi-même comme un autre』(1990)에서, 주체의 코기토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전개한 자기-타자에 대한 열린 존재론적 사유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아이덴티티 확립을 위해 자체적인 자기동일화를 견지하는 한편 자신이 아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얻는 '자기 동일성'도 성립시킨다.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대상과의 얽힘 속에서 확립되는 이 자기동일성은 보다 값진 주체 확인이 될 수가 있다. 여기서 화가가 기획한 자기성은 자기 차체로 향하지 않고 자신을 지칭할 수 있는 자연과 풀꽃의 씨방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작가는 자연, 그 위대한 어머니의 외연을 자신의 자화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 앞으로 작가의 회화세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매우 궁금해진다. 만일 자연과 생명의 주된 테마가 지속된다면, 색과 마티에르도 계속 중요한 형식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비추어진 화가의 자아를 해석해 보는 일이 보는 이들의 흥미로운 감상법이 될 것이다. 어쩌면 화가는 자신이 경험하는 삶의 장 안에서 더 많은 다양한 모습들을 그려내고자 할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가의 진로가 어느 방향으로 이루어지든지 간에, 색에 대한 강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낼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감상자는 화가의 그런 그려진 모습을 통해, 나름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화가 심영신의 작품들이 흥미로운 이유들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 ■ 서영희

Vol.20091126h | 심영신展 / SHIMYOUNGSIN / 沈英信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