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_경기문화재단 책임기획_이대형(미술기획사 H-Zone)
관람시간 / 11:30am~10:30pm
갤러리 로프트-H 청담 GALLERY loft-H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0-25번지 Tel. +82.2.567.6070
お前はもう死んでいる. (너는 이미 죽어있다.) 한때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만화『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로의 명대사다. 켄시로는 악당에게 전광석화 같은 주먹을 뻗은 후에 이 대사를 내뱉는데, 악당은 이 말을 듣고 몇 초안에 죽고 만다. 주먹을 뻗는 시점에서 이미 악당의 죽음이 결정되는 것이다. (『북두의 권』은 근 미래의 세기말을 배경으로 주인공 켄시로가 폭력과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를, 보다 압도적인 폭력과 공포로 구원하며 배덕의 구세주가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다.)
끝없이 부유하는 결정론적 묵시록 ● 박은영은 이번 전시에서 직접 간행한 소책자 『마침표로 시작하는 문장』을 선보인다. 이것은 42권의 책에 적힌 마지막 문장들을 임의로 엮어 만든 한 편의 우화다. 각각의 문장은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인과적 개연성을 띠어 보인다. 마치 A라는 문장 다음에 위치하는 B라는 문장이 A를 수식하거나, 부연하거나,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본래 마침표는 문장을 종결할 때 사용하는 문장부호를 말한다. 서술형, 명령형, 청유형의 글이 종결어미로 끝날 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표로 시작하는 문장』은 문장을 마침표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종결된 혹은 시작 이전에 이미 결정된 의미구조, 결코 탈출할 수 없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정해진 행로를 끝없이 부유하는 결정론적 묵시록이다. 개인의 삶이란 곧 '너는 이미 죽어있다'는 켄시로의 시한부 선고를 총성으로 시작하는 달리기와 같은 것이다.
박은영은 지난 해에 『brainwash(세뇌)』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그 전시는 대상 없이 욕망하는 개인이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부유하다가 결국 구조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슬픈 현실을 보여 주었다. 『마침표로 시작하는 문장』은 박은영의 이러한 사회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마침표로 시작하는 문장』은 42권의 책에 적힌 마지막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따르면 42이라는 수는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의 해답'이다. 일본에서 42(しに, 시니)는 죽으러(死に, 시니)와 발음이 같아 불길한 수로 여기며, 마라톤 경기에서는 42.195km를 달린다. 결국 책을 구성하는 마지막 문장들은 궁극적인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해 애초에 결정된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마라토너인 것이다. 너무도 비관론적인 세계관이 아닐 수 없다. 박은영이 이런 비판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뭘까. 덧없는 현실에 대한 단순한 투정일까?
필연적인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지시체계 ●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어느 철학자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력과 자본가가 지급하는 임금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다. 노동자의 노동력은 필연적으로 그가 받는 임금을 웃도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것이 착취를 만들고 자본주의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생기는 희로애락과 같은 다양한 감정들은 언제나 '잉여 ' 생산되기 마련이다. 그 '잉여'된 감정은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곧 망상이다. 개인의 망상은 타인의 망상과 결합하여 하나의 거짓된 가치를 만들고, 거짓된 가치는 다수의 맹목적 믿음을 통해 거대한 율법으로 다시 태어난다. 거세당한 수퇘지의 욕망처럼 주체 없이 단지 현상뿐인 율법은 학습, 규범, 규칙과 같은 지시체계를 통해 개인을 구조의 틀 속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껍데기로 이루어진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필연적인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각각의 지시체계간에는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인과적 개연성을 띠어 보이며, A라는 지시체계 다음에 위치하는 B라는 지시체계는 A를 수식하거나, 부연하거나,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율법의 지시체계야말로 임의로 엮어 만든 한 편의 우화인 것이다. 박은영이 『마침표로 시작하는 문장』을 통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종결은 결국 다음 문장을 위한 것이다. ■ 김김김
Vol.20091114b | 박은영展 / PARKEUNYOUNG / 朴恩永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