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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11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나무화랑_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김주호의 통筒과 통通의 세계 ● 살다보면 답답하게 막히는 일이 많이 생긴다. 도회생활에서는 더 자주 일어난다. 사업의 어려움, 금전문제, 질병, 사고, 협소한 생활공간, 불결한 음식, 교통체증, 하다못해 배설을 시원히 하지 못하는 생리적 문제까지도 그런 답답하게 막히는 일들 중 하나다. 괴롭다. 스트레스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일상은 어떤 식으로든 이런 막힘, 혹은 단절이나 폐쇄에 의한 괴로움의 연속이라 보면 되겠다. ● 사람사이에서도 이렇듯 막히고 단절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람의 한자말을 보면 사람人과 사이間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공간인 '사이'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아울러 이 말은 그 사이 공간인 여백에서의 소통을 이르는 말일진대, 우리 시대에 이런 여유 있는 소통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통을 위해 인터넷과 카페와 TV와 공공장소에서 토론하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통화를 하고, 각종 모임에, 행사에, 술자리에 참석해서 많은 사교를 갖는 등 끊임없이 소통을 지향하지만, 정작 그런 모든 것들이 사람사이 마음을 여는 경우는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대부분의 관계들이 닫혀있거나 절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가, 혹은 스스로가 소외되거나 소외시킨 것이다. 사회적 지위·위치·이윤·욕망의 증폭을 위하여 자본과 명예간의 거래와 교환만이 관계의 주축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사이 순연한 열림의 관계는, 그렇게 열려있는 듯이 보이는 현대사회의 구조 배후에서 폐쇄되었다.
그래서인가 정현종 시인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토로한다. 섬은 사람사이 관계가 절연된 현장일수도, 반대로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만남의 공간일 수도 있다. 사람 사이가 막혀있는 소통 부재에 대한 고립의 괴로움과, 이런 절연된 상태를 극복하고 통通하려는 의지가 '가고 싶다'는 표현으로 섬이라는 공간에 축약되어 나타난다. 이 때 소통은 답답함을 넘어 시원함을 향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 혹은 의지라 하겠다. ●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현상의 표현이자 소통의 매개체인 미술에 있어서도 이런 소외현상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일찍이 현대미술이 독자적인 존재방식으로 대중들을 작업에서 소외시켰고, 소외된 대중도 마찬가지로 미술을 소외시키고 향유하려 하지 않았다. 작가는 미술내부에서만 발언했고 관객은 미술바깥에 서있는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미술을 대했다. 미술과 대중사이 '섬'은 없었던 셈이다. 아니, 섬은 있으되 미술도 대중도 그 섬에 가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본주의 체계가 발달할수록 섬에 대한 거리와 간극은 더욱 넓어졌다. 미술이 가져야할 폭 넓은 인문적 감성의 가치는 자본이라는 절대적 물신의 휘하로 편입하게 되었고, 거기서 일렬종대로 서 있던 여러 이윤체계들은 '날 것'이던 미술의 속성을 난도질해서 '인공미인'으로 성형해 버렸다. 투자가치 혹은 장식품으로...
김주호의 작업은 이런 절연이나 폐쇄성을 넘어 열림과 소통을 지향하며 진행되어왔다. 닫힌 삶의 조건이나 현상, 현대미술의 일방적 독주에 대한 일종의 역설paradox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김주호가 맞닥뜨린 현대미술의 관객을 소외시키던 절대적 진행방식과 달리, 그는 늘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미술사이 교통할 수 있는 방식과 문맥에 집중해 왔다. 소재는 주변의 이웃이었고, 형식은 극도로 단순한 조형이었다. ● 과거 나는 그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의 작업형식과 어법을 '수직의 해학, 여유의 미학'이란 구절로 비유한 적이 있다. 그만큼 그가 제시한 인체는 직립의 앞뒤가 납작한 둥근 원통圓筒으로 간단하다. 그 원통은 그러나 작품의 내외곽을 연결하는 입을 통해 안팎의 공간이 상호 교차하는 구조를 가진다. 그러니까 인체(원통)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구강구조는 여러 가지 조각 재료 중에서 흙을 손으로 말아 올리며, 그 자체가 직접적 작품이 되는 질구이테라코타방식이 유일하다. 이 筒으로부터 손과 팔처럼 외부공간으로 확산되거나, 구강구조를 통해 원통의 내부로 진입하는 공간구조는 그 형태의 단순성을 극복하며 김주호의 조각이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형상과 캐릭터를 구축하게끔 한다. 아마도 김주호 질구이 작업의 최대 매력이 이것일 터인데, 최근 작업에서는 더욱 입모양의 변화를 통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 거기에 정면성正面性과 사람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인 무동성無動性이 있다. 이점은 지금도 여전하다. 주제를 강화하기 위한 팔이나 입의 움직임이 더 강조되기는 해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수직의 직립성이 그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을 소박한 재료황토로, 소박한 형태로 일일이 말아 올린 질구이 기법과 붉은 테라코타의 자연색은 그야말로 원초적이다. 복잡한 기법이나 도구, 특이한 어법語法조차 필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형식의 이면에 작가 김주호만의 독자적인 조형에 대한 사유가 숨어있다. 대학시절과 젊은 시절 서양현대조각에 대한 교육을 받고 습작기를 보냈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찾으려 한 조형의 뿌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전통과 정서에서였다. 그의 작업노트에 나타난 대로 로뎅과 브랑쿠지 할아버지보다는 운주사의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석불과 같은 민중적 형식, 그들의 기원祈願과 해원解寃의 진실한 마음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조형의 근본과 작업동기로 상정한 것이었다. 당연히 작가의 눈은 그의 곁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을 향했고 자신의 삶과 똑같은 그들의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슬픔을 조각에 구현해 낸 것이었다. 이 때 작업의 대상인 이웃들과의 소통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그 소통을 위해서 김주호는 좀 더 쉬운 언어, 좀 더 쉬운 기법, 좀 더 쉬운 조형을 구축하고 표출해 온 것이다. ●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감성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의지를 피력하는 것 일 터인데, 그것이 넓고도 열린 소통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주호는 이런 공염불보다는 분명한 기표, 즉 기의와 쉽게 통일될 수 있는 기표를 찾고자 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작가자신과 미술, 세계와의 공통분모를 먼저 찾고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 공통분모는 본인을 포함한 이웃의 애환이 그대로 표출되는 아름다움의 현장으로서 생생한 '삶'이었다. 그러니까 김주호는 작업의 소재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의 삶을 세밀하게 보고 느낀 것을 말한 것이 결과적으로 미술이 된 셈이다. 이는 김주호의 세계관과 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읽어내는 단서가 된다. 한마디로 김주호는 사람살이를 어떤 틀이나, 법칙, 규범 등의 기준에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제도나 이념, 관념 이전의 살아있고 움직이는 감정들의 활동으로 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많은 작가들은 주로 미술이란 프리즘을 통해 형식만을 드러낸다. 미술이 인식의 틀이자 조건인 셈이다. 김주호는 이와 다르다. 미술이전에 사람을 느끼고, 세상살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추스르고 나서야 비로소 작업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김주호가 사람들과 만나서 수다한 일상과 세상살이를 말로 대화하는 것도, 조각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도 그에게는 마찬가지다. 세계와 이웃에 대한 입장과 작업에 대한 태도가 통일된 것이다. 그는 사람 사이의 섬에 이미 가 있으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언어로 미술을 택했을 뿐이다. 이럴 때 미술은 작가와, 그의 일상과 완벽한 통일을 이루게 된다. 추상적인 언표가 아닌 구체적인 우리들 삶을 조각언어로 제시할 때 현대미술 특유의 소통 불일치인 아포리아Aporia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내용이 관객에게 거의 정확하게 전달되기에 그렇다. 이는 작가가 자기 내면의 관념이나 미술내부의 이념에서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일상적 관계에서의 소소한 것들로부터 작업소재를 찾아내기에 가능한 것이다. ● 그 결과 김주호의 작품에서는 내용과 형식, 일상과 미술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아니 통일이 된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발생하는 제시와 수용등도 서로 섞여서 소통을 이룬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판단과 경계를 지을 필요가 없어짐으로 정확한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 김주호의 미덕이자 위험한 모험의 지점이기도 하다. ● 미덕이라 함은 작가의 의도에 따른 소통의 힘을 말함이고, 모험이란 관객의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느낌과 감상의 자율성이 작가의 소통의지로 인해서 소통의 다양한 통로가 소거되는 것을 이른다. 즉 관객의 능동적 감상의 의지를 오히려 작가가 단순화시켜 버림으로 좀 더 넓어질 수 있는 해석학적 소통의 폭과 회로가 협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미술은 작가의 표현과 개념이 관객의 수용과 얼마간의 편차Aporia를 보이고, 그 편차로 인해서 관객은 계속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이는 난해한 현대미술의 긍정적인 재미일수도 있다. 거기에 미루어 보면 비교적 정확한 소통을 담보한 김주호의 작품이 어쩌면 소통회로를 협소하게 만드는 위험한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모험이라 하겠다.
김주호의 미덕은 또 다른 지점에서도 있다. 현대미술의 흐름이나 스타일화 되고 제도적으로 구축된 화단구조에서 스스로 일탈하면서 만든 독립된 아웃사이더의 주변적 입장이 그것이다. 작가로 활동한 지난 30년 동안 어떤 단체에도, 어떤 상업적 구조에도 편입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독립된 작가적 입장을 견지해온 그의 이력에서 이런 도전의 미덕은 더 크게 느껴진다. 화단이란 액자틀과 상관없이 진행한 그의 작업과 작가적 행보는 오히려 그의 작업이 자유롭고 열려 있다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회갑의 나이에도 여전히 젊은 20~30대 작가들의 대안적인 기획에 초대되고, 스스럼없이 참가하고, 이질감 없이 함께 발언하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작가와 같다. 아마도 평생 그럴 것 같다. 거기에 김주호만의 열린 인간적 매력과 작가로서의 고집과 독특하고도 질긴 힘이 함께 묻어난다. ● 이번 전시에 펼쳐 보이는 작품의 명제만 보아도 작가의 기존의 입장과 태도는 여실히 드러난다. '삶의 돋보기'란 전시전체 명제가 의도하듯이 작가는 더욱 디테일하게 우리 이웃들의 삶의 부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관찰한다. 물론 돋보기를 통해서 그가 관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밀한 부분도 노출되면서 말이다. 이 아이러니Irony하고 부드러운 익살과 유머는 김주호의 여유로운 내면에 의해 가능하다. 이웃들의 선한 부분뿐만 아니라 남의 흉을 보는 것까지도 그에게는 귀여운 모습으로 포착된다. 돋보기는 곧 이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게하는 도구이자 그의 마음이라 하겠다. 마치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 이 땅의 모든 소외된 사람들에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는 구절처럼, 김주호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그냥 귀엽고 사랑스런 미륵彌勒이거나 보살菩薩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 이런 작가의 시선과 마음은 각 작품의 명제를 보아도 여전하다.「탐구학습」「세상을 보는 창」「해맞이」「공던 탑」등의 명사형과,「그러면 그렇지」「그런데 말이야」「좋은 생각이야」「씨부렁 씨부렁」등과 같은 대화체와 의태어,「푸하하」「와하하」등의 의성어처럼 쉽고 일상적이며 명료한 어휘들이다. 쉽다는 건 이런 작품과 명제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소통에서의 오차나 편차가 작아서다. 작가라는 특수한 입장과 평범한 관객이 삶에서 느끼는 보편성이 공통분모가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소통은 아포리아처럼 어긋나지 않고 정확한 편이다.
이런 전래적 테라코타에 덧붙여 이번전시에서는 플라즈마 절단기로 오리고 휘어서 만든 철판조각인「세상을 보는 창」「해맞이」「공던 탑」「철조요염보살사유입상」「돌아오다」등과, 캔버스에 아크릴로 드로잉한「살아 있음은」「가자」「뿔따구」「뿔났다」「바르게 보자」「나에게」「나는 지금」「나와 같이」도 새롭게 선보인다. 철판에 플라즈마로 드로잉한 것과 캔버스에 아크릴로 드로잉한 점만이 다를 뿐 같은 시각과 개념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테라코타와는 다르게 평면적으로 인지한 소재들의 특성을 빠르게 시각화 시킨 작품들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그것처럼 직접성을 띤 원시적Primitive표현법은 테라코타의 원통과는 외관상 차이가 있지만 공간의 '빔空'과 '공명共鳴'이라는 조형적 모티프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모두 김주호 특유의 천진난만한 표현법과 해학으로 익살스런 골계미滑稽美를 보여준다. ● 거기에 우리들의 삶을 여유와 아이러니로 바라보는 김주호만의 시선이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과 형식의 근원적인 지점에 입체든 평면이든 사물의 속을 비워버리며 울림의 구조를 갖는 '筒'과, 작가, 미술, 관객을 넘나들며 소통하려는 '通'이 있다. 김주호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세계를 보는 맑은 시선과, 그에 걸 맞는 조형어법의 구축,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밀어붙이는 뚝심. 나는 거기에서 작은 이익 때문에 자신의 이념을 버리며 닳고 약아가는 요즘의 화단 사람들과는 다른 한 작가의 인간적 진실성과 정직한 표현성을 만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을 담는 미술. 소박하고 담백하다. 나는 그게 좋다. ■ 김진하
Vol.20091111c | 김주호展 / KIMJOOHO / 金周鎬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