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거닐다

2009_1113 ▶ 2009_1209 / 일,공휴일 휴관

고낙범_Monad_캔버스에 유채_135×135cm_2009

초대일시_2009_1113_금요일_05:30pm

참여작가_배병우_장연순_한정욱_고낙범_국대호_박주욱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색을 거닐다 ● I. 색은 조형 예술, 특히 시각 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시각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색은 만물의 4대 요소로 인식되어 왔는데, 고대 문명국에서는 태양을 숭배함으로써 그 불타오르는 태양으로부터 '빛'과 '색'이 탄생되었다고 믿었다 한다. ● 색은 '눈'으로부터 출발한다. 형태, 질감, 질량, 크기 등은 시각 이외에 다른 촉수 기관을 통해서도 인지가능한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색은 유일하게 '눈'에서만 반응한다. 플라톤이 색을 '모든 물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꽃'이라고 언급 했듯이, 그 모든 불꽃에 나의 '눈'이 반응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눈을 통해 그 불꽃에 반응하여 자신만의 불꽃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그 후 다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통해 그 불꽃에 대해 반응하게 한다. ● 그러나 색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생리적 현상을 넘어 인종, 문화, 성별을 초월한 심리적이고 초개인적 원형을 지니기도 한다. 색 보다는 형태의 환원을 통해 모든 대상 세계를 초월하여 불변하는 리얼리티를 진지하게 탐구하였던 폴 세잔 조차도 '색은 우리의 두뇌와 우주가 만나는 장소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색 지각의 능동적인 힘에 대한 언급으로서 물리적인 색의 반응을 뛰어넘어 인간의 삶에 전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심령적· 마술적인 색의 힘에 대한 이해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전인적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 때문에 색은 인격성과 정신성을 갖고 있다고 비견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인성적 성향의 색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어둠을 통해서 빛이 나오고 빛을 통해서 어둠이 나오듯, 즉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색은 양극성의 산물이고 이중성의 산물이다. 색의 선명함이 시작, 힘, 낮을 표상하지만 색의 흐려짐은 종말, 죽음, 밤을 의미하는 것이 그 예이다. 색은 무궁무진하게 변하고 증식할 수 있는 속성도 있다. 실제로 치환이 불가능한 색으로 알려진 빨강, 노랑, 파랑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색은 혼합으로 무한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농담, 채도를 조절함으로써 여러 뉘앙스가 풍기는 색채, 무수한 변위의 조절이 가능한 색채, 넓은 스펙트럼의 범위를 포함하는 색채를 창출해낼 수 있다. ● II『색을 거닐다』전은 6명의 작가의 작업을 통해 그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색의 리얼리티를 조망해보고자 하는 관점에서 기획되었다. 이들 작가 중에는 색의 실제에 대해 면밀한 지적 탐구자와 같은 모습으로 접근하는 작가에서부터 색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마치 감정적인 열정가로 접근하는 작가들까지 존재하는 등 심리적 접근 방식, 주조색, 기법의 다양한 측면이 존재한다. ● 고낙범이 진행해 온 초상, 올 오버 구성의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 작업, 과일 작업, 최근 근작인 스킨 작업 등에는 그 일관된 맥이 존재한다. 그것은 색에 대한 지성적 태도를 견지하는 집요한 추적자인 작가의 모습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고낙범은 개별적인 대상 세계와 접촉할지라도 아주 지적인 태도인 자신의 시각으로 통찰하여 형태와 색채를 환원시켜버린다. 작가는 그것이 살구이든, 인간의 신체부위이든지간에 대상의 개별성을 뛰어넘는 초개인적 단자, 원형, 단위들의 집합체로 재조정 한다. 그것은 형태의 단순화, 변형 등과 같은 재조정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그 형태는 색의 리얼리티를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골조일 뿐이다. 고낙범은 그 골조에 색의 표피를 면밀하게 구축하는 예민한 작업을 아주 느리게 진행해 왔다. 이로써 그의 화면에는 유사하지만 모두 다른,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색의 경연이 펼쳐진다. 이 색의 농도와 채도, 순색과 혼색, 색과 색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대비와 조화, 그리고 긴장감 등으로 인해 고낙범의 그림을 '색 회화' 그 자체로 명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최근작 스킨 연작에서는, 그것이 아시아계의 피부의 특성을 상징하는 색채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별성을 넘어서 작은 색의 단자로 구축된 색의 모자이크 조각으로 보여짐으로써 스킨이 아니라 그냥 색의 장으로 다가서게 한다.

국대호_Place de I_Opera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9

색에 대한 면밀한 탐구자의 고낙범에 비해 '눈'의 지각적 힘에 훨씬 충실하려는 작가로는 국대호를 들 수 있다. 파리 풍경의 근작을 선보이는 국대호는 아웃 포커스 된 사진을 다시 회화로 번안하는 작업을 추상 작업이후에 2007년부터 많은 작업량을 선보이며 줄곧 해오고 있다. 뉴욕, 서울 풍경은 색망, 색점, 색면 등으로 일렁거리는 회화를 선보임으로써 그 이전의 옵티컬한 추상 회화의 후작으로서 일맥상통한 점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네온 사인, 자동차, 빌딩의 도상으로 대변되는 뉴욕 풍경이 그 도시의 공간으로 보는 이를 출몰시킬 듯한 화려한 몽환성의 분위기를 풍겼다면, 훨씬 예민해진 구도와 각도를 제시하는 근작인 파리 풍경은 이국적의 야경에 취하게 하면서도 건축적 느낌이 강화된 고풍스러운 뉘앙스로 나아가고 있다. 국대호의 아웃포커스 된 화면을 지탱하는 힘이 있다면 형태와 형태 사이의 문지름을 통해 명료한 선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색과 색의 번짐, 유연한 혼색의 결과로 명료한 선이 보여주는 재현된 공간이 아니라 보는 이를 훨씬 다른 회화적 색의 공간으로 이끈다. 시지각에서 야기되는 약간의 아련한 혼동은 그림과 그것을 보는 이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만듦으로써 대상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색으로 이루어진 회화적 어느 공간으로 몰입시킨다.

박주욱_red forest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09

국대호 이외에 사진에 근간을 두는 작가로는 박주욱을 들 수 있다. 박주욱은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의 색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색채를 거꾸로 재해석하는 듯한 효과를 창출해내었다. 재해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있지만(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알지 못하는 세계), 즉 멋지게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이루어진 색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글쓴이(기획자)는 박주욱의 작업을 처음 보았을 때, 묘한 전율에 휩싸였다. 그것은 단지 포지티브가 아닌 네거티브라는 익숙하지 않는 반전이 이루어낸 것일 뿐인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비실제의 어느 공간 속을 헤매게 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내가 알고 경험한 세계 속에 약간의 반전만으로 엄청나게 기이한 세계가 도사리고 있는 듯한 스멀거리는 느낌 때문에 드는 전율이었다. 박주욱의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단지 색의 반전에서 오는 초현실적 느낌뿐만 아니라 보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환영의 세계에 대한 지각의 반전을 가져오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고혹적이다. 네거티브 필름의 색은 빛의 반전이 일구어낸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의 일상적 풍경이 허구가 아니지만 마치 허구인 듯한 네거티브 필름이 담아내는 세계로 번안될 때, 세기말적인 풍미를 자아내는 음울하기도 동화적인 비현실적 세계의 풍광으로 관람자를 이동시킨다.

배병우_소나무_젤라틴 실버프린트_88×180cm_1999

색의 관점으로 배병우의 사진을 읽어낸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정도로 진부면서도 약간은 신선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흑백 사진이라는 사실 관계를 떠나 이미지만으로 접했을 때 그가 펼쳐내고 있는 소나무 숲은 검정 숲이다. 바다와 산도 검정이다. 배병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흑백 사진의 소나무 숲을 보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지만, 이를 회화적인 색감으로 이해했을 때 이는 흑과 백의 조화로 일구어진 공간이다. 이 흑과 백은 대립의 색이 아니라 쉽게 교체되고 연금술적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색들이다. 사실 검정이라는 것은 빛의 상실이 아니라 모든 파장을 자신 속에 유일하게 머금게 하는 색이라고 알려진다. 흰색 또한 모든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빛이 표현된 정신적 빛의 색이라 할 수 있다. 배병우의 소나무 숲은 이 검정과 하양의 조화로서 마치 모든 소란이 차단된 절제된 공간, 풍부하면서도 정신적인 여린 빛이 발현되는 영성적 지점으로 가닿게 한다. 그것은 속세와의 단절을 고하는 어떤 표징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단순하게 이분화 된 검은 바다 풍경은 수평선 위에 여리게 발현된 빛의 미동으로 인한 극한 정적인 느낌에서 벗어나고 있다.

장연순_늘어난 시간 080301_아바카, 쪽염색, 재봉_35×70×90cm_2008

장연순의 섬유 작업은 아바카라는 섬유를 쪽빛의 색감으로 물들어 놓은 것이다. 부드러운 섬유의 성질을 역행하여 풀먹임과 재봉질로만으로 지지대 없는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장연순의 작업은 쪽이라는 자연 염색이 그 색의 원천이다. 이것은 검정과 파란색의 교묘한 밀고 당기기를 하여 안착된 어느 지점에 있는 색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군청색, 청람색, 남색 등의 범위의 지점에 있을거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본래 청색이란 하늘과 물이 무색에서 출발하지만 그 깊이가 더해질수록 푸르고 어둡고 느껴진데서 유래하여, 심오하면서 신비로운 명상의 세계를 반영한다. 이번 전시작은 쪽 염색을 20여 회의 반복으로 일구어 낸 것인데, 이는 마치 무에서 출발하여 깊이 있는 정신의 세계의 겹을 표현하는 제의적 행위와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더구나 섬유라는 재료는 빛이 투과할 수 있는 숨이 쉬는 성질도 있다. 작가 스스로 작업을 하는 모든 수고로운 과정이 몸과 마음의 '정화'에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빛과 쪽색이 어우러지는 순간 정신을 환기시킨다.

한정욱_Hidden Wall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9

장연순의 작업이 검정과 파랑의 어느 지점에 이른다면 한정욱은 파란색 자체를 거침없이 화폭에 쏟아낸다. 한정욱은 손의 기, 나아가 자신의 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핑거 페인팅함으로써 주로 산과 같은 대상을 심상적으로 빠르게 해치운다. 이 푸른색의 산과 계곡은 역동적 힘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 자체에 어떤 강한 기운이 내재된 소용돌이 같은 꿈틀거림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신체적 흐름은 보는 이의 시각을 통해 가슴을 동요시키는 강한 마력이 있다. 그의 파란색은 마치 불타는 듯하다. 즉 분명 푸른 산이지만 격동하는 바다의 파란색과 같다. 마치 불타는 듯한 파란색이라는 이율배반적 속성이 한정욱 작품의 매력이다. 본래 목성의 색인 파란색은 괴테에 의하면 노랑색과 더불어 근원의 색 중의 하나이자 이중적 성향이 강한 색이다. 신들의 색이라 알려진 파란은 순결, 차가움, 영원성을 상징하여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무한성의 대상이었다. 이에 비해 파랑은 어둠을 지니고 다님으로써 파괴적 바다처럼 야성적이고 매혹적 허무를 지닌 색이기도 하다. 한정욱의 그림은 강한 신체적 리듬의 동력을 타고 보는 이에게 전달되는 정신적이면서도 야성적인 파란색 그 자체를 음미하게 한다. ● 『색을 거닐다』전을 눈의 지각을 관통해 전달되는 색을 촉각적으로 만져보며, 청각적으로도 들어보며, 후각적으로 냄새를 맡아 마치 그 속을 '거닐어' 보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 ■ 김지영

Vol.20091110g | 색을 거닐다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