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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030_금요일_06:00pm
청계창작스튜디오 2기 입주작가展
주관·주최_서울시설관리공단 후원_서울시
관람시간 / 10:00am~07:00pm
청계창작스튜디오 CHEONGGYE ART STUDIO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37번지 관수교 센추럴관광호텔 1층 Tel. +82.2.2285.3392 artstudio.sisul.or.kr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알 수 없는 인간관계" ● 난나 최현주는 2008년 첫 개인전 '시간급구'를 통해서 자원과 돈의 은유로 시간을 인식하는 현대인의 익숙한 세계에 시간 기계를 들여놓았다. 엉뚱한 기계는 성찰적 순간을 만드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 '시간은 돈이다'는 경구를 연상케 하는 시간판매기 또는 시간구매기에 유혹된 관객은 시간을 파는 파격적인 경험을 한다. 우리에게 시간을 느리게 보내는 것은 낭비이고,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남의 시간을 훔치는 비도덕적 행위이다. 느린 시간은 선(禪)이나 요가 수련에서나 가능하다. 이제는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시간은 절약을 하거나, 소비하는 개념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는 시간은 돈으로 환산가능한 시간이다. 시간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전업 주부의 노동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시간매매' 작업에서 참여자는 모래시계를 들고 있으며 작가에게 시간을 판다. '시간기부'에선 기부기계의 버튼을 누르며 빨간 지시계가 오르거나 내리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시간을 기부하거나 기부받는다. 작가는 남의 시간을 산다. 그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관객은 돈을 얻고, 작가는 관객과의 대화라는 경험을 얻는다. 역설적으로 시간은 팔린다. 그리고 경험을 얻는다. 붐비는 도시의 지하철역 입구나 광장에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사는 일상적 행위가 돈으로 사는 시간의 은유를 재인식하게 한다. ● 'LEBAB PROJECT-안산 가면 말 통한다-'에서 LEBAB은 BABEL의 거꾸로 한 말이다. 모든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도시 바벨의 반대말이다. 안산은 이주노동자 센터 활동이 많고, 아시아의 다양한 국가에서 온 이주민이 운영하는 식당도 많다.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안산에는 다양한 이주노동자의 국가 수만큼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 그래서 한국어나 영어를 통하지 않고는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언어가 존재해서 언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각자의 모국어로만 이루어지는 언어를 통하지 않은 완벽한 언어적 소통 상황을 연출한다. ● 난나 최현주에게 있어 작품의 모티브는 신체화된 언어에서 발견된다. 그 언어는 오랜 시간동안 누적되면서 사자성어나 속담 퀴즈로 확장되는 통념, 비공식적이지만 공식적 체계의 구조를 반영한 통념에서 출발한다. 계통발생의 역사를 코딩하고 있는 DNA처럼, 오랜 역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고 자본주의적 일상을 지배하는 격언으로 재구축된 통념속에 쌓여서 우리는 살아간다.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공격하라',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가치를 결정하는 자와 가치를 따르는 자가 있다'. 자기 계발서부터 리더쉽 서적까지 우리의 일상을 구축하는 많은 언어들은 동창회와 친목회와 회사 회의와 술자리를 통해서 일상화된다. 속담, 신화, 언어는 축적된 시간만큼 물리적인 성격, 공간적 구조물로 드러난다. 역사를 형성하는 철학적 미학적 정치적 구축물은 신체화되고 공간화되어 고정된다. 그래서 신체화된 언어인 속담, 신화, 이야기는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는 통로가 되고, 이러한 통념들은 작업의 모티브이자 소재가 된다. ● 신체화된 언어를 부상시키고 낯설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제시하는 난나 최현주의 작업은 일정한 상황 속에서 경험될 때만 충분히 지각된다. 의례에 따른 행동을 요구하는 전시장에 작품이 놓여졌을 때, 관조적으로 대하게 되었을 때 작품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백색 실험실과 같은 백색 전시장에서는 구현되기 어렵다. 20세기와 21세기의 전환기에서 현대미술의 좌대에 올려진 많은 작품들은 구체적이고 결정화되고 역사적인 수많은 결정과 타협과 절망이 고정화된 물리적 환경아래에서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경험되었다. 물론, 고독속에서 경험되는 예술이나 예술제도에 의해 지탱되는 예술 또한 사회적 틀속에서 일어나지만, 그것보다 훨씬 사회적인 맥락을 감상자는 느끼게 된다. 국내 작가 중 미적 참여, 예술적 참여를 작품 속에 통합하는 작품은 거의 드물다. 관객 참여라고 쓰는 대부분의 작업은 즉자적이다. 관여나 관여적 참여(Participatory engagement)를 실현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관객이 작품을 만지거나 부분과 전체의 연관 없이 전체 프레임을 채우는 동일적 반복의 한 요소로서 부분을 만들거나 한다. 또한, 공간과 함께 작품이 경험되는 작업도 드물다. 시도는 있지만 작가 자신 속에 축적된 경험의 밀도가 없어 그럴듯한 아이디어 스케치에 그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많이 접하게 되는 작품 패턴은 일정한 크기를 가진 종이나 나무에 그림이나 글을 모아서 일정한 프레임에 축적하는 작품인데 이러한 작업은 완성된 집합적 이미지 속에서 타자를 발견하기 보다는 숫자와 크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참여는 선언에 그치고 작업은 대상화되고 맥락은 사라진다. 미학적 의미에서 "참여" 개념을 담고 있는 예술작업 즉, 사물과 관계하면서 그 상황 자체를 '이해'하는 지각과 이해가 비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은 드물다. ● 난나 최현주 작가가 국내에서 여는 두 번째 개인전이 청계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린다. 2008년 3월 이후 열리는 두 번째 개인전은 느린 시간을 겪었던 독일 체류 시절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자기 PR과 바쁘게 움직여야 만들어지는 성취의 구조 속에서 좀 더 날카로워졌고 부정의 계기를 소화시키지 않고, 밖으로 그대로 드러낸다. 상호공존에 대한 물음은 자기보호라도 가능한 세계인가? 고정적인 신뢰와 친분의 관계는 적대 관계로 변해가지 않는가? 사랑은 증오를 동반하지 않는가? 이번 작업의 모티브가 되는 맥락은 소통되지 않고 있지만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지하는 수많은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 oourbag(우우리가방) : 2004년 독일에서 착상된 작업이다. 2인용가방, 커플을 위한 가방, 그룹을 위한 가방 등이다. 우우리가방(oourbag)에서 더 나아가 우우우우리가방(oooourbag)은 청계천, 공원, 거리라는 일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법. 사용법을 통해서 '개인'적 가방이 '우리'의 가방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경험하게 한다. 2인용 우우리가방에서 4인용 우우우우리가방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두 사람에서 네 사람으로 변화는 훨씬 복잡하고, 많이 충돌할 수 있고, 각자가 다른 형태를 상상하기에 많은 충돌을 예상한다. 우리가 도대체 가능하단 말인가? 작품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엮어 조형적 형태들을 상상해보면서 우리가 가방에 담을 수 있는 것, 개인적 가방 구조가 해체되지 않고서는 우우리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일반적인 경험방식을 다르게 함으로써 지각장을 흔들리게 된다. 고정적인 지각방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지각의 연습이 필요하게 된다. 예술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지각 형태가 생성된다. 그래서 규정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비규정적인 가방은 간주관적 영역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청계천에 있는 사람들, 청계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행동을 통해서, 관여적 참여를 통해서 자기 수렴된 가방을 완성한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렇듯, 그 경험은 주관적이면서도 간주관적이다. 각기 다른 맥락 속에 처해있는 사람들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도 각기 다른 경험의 결과를 갖는다. 우우우우리가방은 각자에게 다르게 경험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신체화된 언어나 통념에 대한 물음, 그 물음들은 가족유사성을 띠게 된다. ● oourwear(우우리옷/의복) : 못옷을 입은 마네킹은 '보호'의 본능이 '안정'의 사회적 구호와 함께 개인 속에서 자라고 있음 보여준다. 난나 최현주가 설정한 상황을 보면, 우리는 바늘 옷을 입고 애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을 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불편함은 증가하고,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서로 찌르를 수 있는 확률이 많다. 못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100개의 LED 점멸등으로 만들어진 하트가 놓여있다. 스위치를 동작시킴에 따라 10개, 20개, 30개씩 불이 들어오고, 점점 밝아진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서 켜지는 LED의 숫자와 밝기가 달라지게 된다. 나의 마음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갈구하는 현재의 정서적 상황은 관계를 구성해가는 이전의 소통의 방식들이 낡고 닳아가고 있거나 낭만적 기억과 둘 만의 약속으로 풍부했던 관계 규정들이 느슨해지고 모호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못옷과 LED 하트 우우리옷/의복은 애정과 증오, 귀찮음과 애정바램으로 복잡하게 뒤엉겨 뭐라 말할 수 없는 비규정적 감정 상태를 나사와 LED로 형상화됨으로써, 복잡한 관계를 단순한 지시등으로 바꿔낸다. 생리적으로 누적되는 아드레날린은 못옷으로 피부밖으로 드러나고, 내 마음의 엔돌핀은 빛으로 나타난다. ● oourmask(우우리마스크) : '우리'라는 말은 긍정적 의미를 주는 가치지향적 용어이다. SAS와 신종플루 등 인플루엔자 공포부터 남보다 자기를 먼저 챙기려고 하는 상태를 성찰하게 한다. 내가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 너를 보호해서 나를 지킨다. 하나짜리 마스크. 10개 마스크. 100개 마스크를 같이 써보는 것은 경계해야하지만 같이 있어야 하는 집합사회의 아이러니이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작품을 통해서 재경험 되는 상황은 미디어를 통해서형성되는 인식을 유동적으로 만든다. 간접적 경험이 아니라 직접적 경험, 간주관적 경험으로 변하게 만드는 작품은 '참여'를 구현한다. 현대 실증적 사회를 이루는, 과학적 구조의 기초를 형성하는 과학적 인식의 제1원칙, 진리의 보편성과 진리의 배타성. 지식의 대상성과 존재의 위계적 구조이다. 위계를 강화하고, 효율을 강화하는 사회에서. 상품화는 생산-소비의 이원적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나 일반적 관념은 주체와 객체를 분리한다. 그리고 결과로만 이루어진 세계만을 인정한다. 그래서 예술계는 예술 대상만을 예술적 세계로 인정한다. 참여는 18세기에서 이어내려온 예술 대상화에 대한 반발이다. 위계적 구조로 수평적 관계를 환원하고 있고, 과정의 풍부함을 결과물의 성과로 환원하는 관계 방식을 재인식하게 한다. 우우리마스크는 미디어를 통해서 공동체를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인 상황속에서 본성을 드러내는 우리의 내면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를 드러낸다. ● oourthermometer(우우리체온계) : 우우리체온계는 서로의 체온을 체크한다. 사랑에 기반해서 상대방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 기반한 관심이다. 내 일상에서 타인의 체온이 중요해졌다. 기침을 하면 우리는 병원에 가보라는 말 대신에 체온이 몇 도냐고 묻는다. 호기심이 사라진 시대에 자기보호를 위한 위탁된 관심만 존재한다. 이 작품을 통해서 난나 최현주는 저체온의 예술적 고독과 고체온의 대중문화의 통속성으로 기울지 않고 기우뚱하면서 날아가면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 크기나 형태 면에서 신속하게 변경가능한 수용자를 갖는 대중문화의 맹습에 흔들리지 않고 존재를 사유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다르게, 90년대 이후의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원리, 행동 양식을 지배하는 맥락을 드러내는 것이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하고 양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관계하는 그 사람들의 반응. 반응의 결과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금새 역사화되었다. 끊임없이 생성되지 않는 관계는 관조와 해석으로 끝난다. 소비적 관조는 작품의 질을 묻지 않는다. 가치를 묻지 않는다. 예술이든 대중예술이든 가치나 윤리를 묻지 않는 병으로 가는 온도, 전염성있는 플루냐 아니냐를 나타내는 온도가 37.5도이다. ● 일상 상황이 아닌 전시장에서 처음 네 작품을 접하는 관객은 어떤 은유나 상징을 찾거나 정신분석학적 암시를 찾으려 하지만 그저 그럴 수 있는 단순한 사물을 접하게 된다. 청계천 상가들 어느 한 곳에 있을 법한 사물들을 보다가 서서히 복잡하고 묘한 지각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난나 최현주는 명료한 도구, 간결한 프레임, 단순한 설치물에서 시작한다. 그 물건/도구들이 어떤 상황 속에 놓여지면 감상자는 서서히 행위자(감상자)로 변화해가고, 작품이 세상을 보는 도구이자,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제품이자, 놀이 기구로 변화한다. 행위자(감상자)는 작품과 연결된 행위를 통해서 관계을 지각하게 된다. 물건/도구를 가지고 행동을 하면서 그 작품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어떤 이해에 도달한다. 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그려 나간다. 난나 최현주는 현대 예술의 주요한 특징인 연속성, 통합적 지각, 참여를 맥락 속 예술(Art in Context)속에서 구현한다. 완전함과 완결성의 전통에 도전하면서 주객의 분리가 아닌 연결되어져 있는 사물, 연속적인 이어짐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다. 행위하는 작품을 요청하는 난나 최현주의 작업에서 대상화보다 맥락적 연관성을, 단일한 진리보다는 역사적 다원주의를, 존재의 우선성보다는 존재론적 동등성의 가치를 우우우리는 깨닫는다. ■ 이광준
Vol.20091030b | 난나 최현주展 / NANNA CHOIHYUNJOO / 난나 崔賢珠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