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展 / KIMJEONGWOO / 金正雨 / painting   2009_1021 ▶ 2009_1102 / 월요일 휴관

김정우_redunderwaer20092_장지에 혼합재료_91×137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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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8:00pm / 월요일 휴관

꽃+인큐베이터_Ccot + Incubator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B1 Tel. +82.2.6414.8840 www.velvet.or.kr

김정우 작가의 독특한 풍경화 ● 갤러리 꽃+인큐베이터에서 전시하는 김정우 작가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시골 초등학교 교실, 운동장, 하교 길의 학교 버스 정거장 등을 배경으로 한 초등학생들의 일상을 그린 것들이다. 무엇인가 편안하고 또 어떤 향수를 불러 주는 작품들이다. 그 이유가 다만 우리 모두가 한 때 바로 이런 그림들 안의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일까? 아이들의 표정도 모두 하나 같이 순수하고 소박하다. 서울 강남 공화국의 초등학생들의 되바라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소박한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의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김정우의 작품들은 우선 우리 관객들한테 소박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소박함은 작품이 소박하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김정우 작가는 고도의 미학적인 계산을 전제하여, 바로 그런 소박한 미학적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세련된 이론과 많은 실험을 통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자기만의 새로운 기법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은 그의 작품을 미술작품의 범주에서 시적 작품 세계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또한 김정우의 작품은 동양회화로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詩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어에 이런 문구가 있다. "There's much more than meets the eye." 겉에 보이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사실은 내포하고 있어, 바쁜 사람이나 깊이 없는 얄팍한 사람의 눈엔 제대로 보이지 않을, 아주 서정적인 시적 사색을 하도록 떠밀어 주는 아주 깊이 있는 작품들이다.

김정우_redunderwaer20093_장지에 혼합재료_91×137cm_2009

우선 그냥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쉽지않은 창작의 과정부터 설명해 보자. 김정우는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동양화가이다. 그는 또 동양화적인 기법을 고집한다. 동양의 전통 수묵회화가 추구하던 예술성을 추구한다. 김정우는 그 전통 동양 예술성을 완전히 새롭게 스스로가 고안한 기법으로 구현한다. 그런 새로운 기법으로 전통미학적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가는 한국화의 개척자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에 걸맞는 한국화단의 인정이 있어야할 것이다. 김정우는 우선 사진으로 시작한다. 자기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가서 그들의 일상의 장면들을 디지털 칼라사진기로 찍는다. 다음엔 두꺼운 화선지에 프린트한다. 그 다음에 작가는 자기만이 발견하여 고안한 화학물의 섞음(chemical mixture)으로 탈색을 한다. 화선지에 프린트된 것이기 때문에 그가 고안한 화학물 탈색제를 쓰면 작가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탈색이 된다. 작가가 원하는 것은 두가지다. 우선 카메라는 현대 광학의 물리원리를 써서 만든 기계로, 레네사아스 시대에 발견된 원근법에 충실한 기하학을 전제한다. 즉, 렌즈의 그리드(grid)와 대상의 표면을 그리드로 분석하여, 대상과 렌즈의 그리드 공간의 일대일 투영법으로 이루어지는 원리임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그리드의 공간 또는 표면 구성은 그물의 구성이다. 우리가 일상 쓰는 격언 중에 이런 말이 하나 있다. "그물에 걸리면 못 빠져 나간다"라는 말.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그리고 그 말에는 신빙성이 있나?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그물은 그리드로 구성되어 있고, 그 그리드는 원칙적으로 얼마든지 더 곱게 나누어, 점점 더 고운 그물을 만들면 그야 말로 우주의 모든 것이 거기에 걸리게 되어 있다. 너무 빽빽하여 질식할 것 같은 공간구성인 것이다. 그래서 사진기는 앞에 보이는 대상을 가장 잘 재현한다. 그러나, 그렇게 재현된 이미지는 너무 빽빽하여 또는 김정우 작가의 부산 사투리를 빌리자면, '너무 짱짱'하여 오히려 그런 이미지 속에서 '실감'이 난다라든지 또는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못 받는다(너무 빽빽한 대상의 재현이라 오히려 현실감이 덜 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다. 왜 그럴까? 인지심리학자들이나 미학자들의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그 짱짱한 사진의 재현을 탈색시켜, 이번에는 '어설픈' 감을 주게 만든다는 것이다. 불규격화된 틈새가 탈색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정우 작가는 들뢰즈Deleuze가 말하는 리좀(Rhizome)같은 기하학구조를, 디지털카메라에서 재현된 그리드 구도를 기본으로 하는 "짱짱"한 기하학적 구조로부터 해방시켜, 인간적인 여유와 소박함과 어설픔이 있는 풍경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탈색으로 창작 과정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그는 수묵회화 전통 화구인 먹과 붓을 든다. 그리고 다시 그린다. 붓의 획의 운동을 기본으로 하여...

김정우_redunderwaer20094_장지에 혼합재료_91×137cm_2009

하지만 최종적으로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한 가지 공정이 더 남았다. 그의 초등학교 일상 시리즈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그 초등학교 일상의 풍경화 속엔 어김없이 다른 학생들과는 무언가 다른 한 학생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새로 그려 넣은 것이다. 일부러 남겨 놓았던 빈 공간에 그의 자페증환자 아들의 모습을 그려 넣는다. 자페증에 걸린 그의 아들은 모든 자페증환자가 다 그렇듯이 그 또래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질 못한다. 자기의 세계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과의 감성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 김정우 작가의 이 마지막 창작적인 제스춰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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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초등학교 일상 풍경화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라. 인물화나 초상화나 기념사진들이 아니라, 사실은 이 작품들은 하나 같이 어떤 사건(Event)이 일어난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레드언더웨어'라는 작품은 막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가고 난 후의 10분 쉬는 시간 같지 않은가? 조용히 앉아 복습이나 예습을 하는 학생들, 일어나서 다음 줄의 친구 책상에 가서 무언가 함께 상의하는 학생들, 또는 무엇을 바닥에 떨어트렸는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몸을 옆으로 구부려 얼굴이 책상에 와 닿고, 팔을 밑으로 길게 떨어트리는 자세의 학생이 보인다. 물론 수업이 막 끝나고 쉬는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선생이 안 와서 아이들이 지루하게 기다리는 순간일 수도 있다. 어떻든 모든 日常은 계속적인 사건들이다. 그것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것이 건 아니면 아주 특별한 어떤 사건이건 간에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 인간들이 무슨 일을하는 것은 다 사건(event)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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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작품이 완성되기 전, 추후 자기 아들 그림을 집어 넣기 전에는 거기에 빈자리가 있었다는 말이다. 빈 공간이라면, 그것이 빈공간이 되기 전에는 또 어떤 사건들이 있었을까? 그 빈공간은 사실은 관객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빈 공간을 고려하여 유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하지 않을까? 빈 공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있다가 없어졌고, 무엇인가새롭게 들어올 빈공간이란 말이 아닌가? 그래서 불란서 시인 말라르메Mallarme는 빈 공간을 등장(Appearance)과 퇴장(Disappearance)의 드라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시엔 유독 빈 공간으로 시작되는 것이 많다. 인간이란 주체는 비어 있지만, 몇 개의 오브제는 주어져 있어서, 사라진(disappeared) 주체(subject)와 다시 들어 올 주체의 등장을 상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힌트는 주어져 있다. 즉 사건의 흔적, 또는 일어날 미래의 사건, 스토리를 암시하는 기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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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정우 작가는 빈공간을 자기 아들의 그림으로 채워서 관객들의 상상의 기회를 빼앗아 간 것일까? 좀 더 깊은 무슨 뜻이 담겨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추리해야할 것이다. 우선, 일부러 맨 나중에 채워 넣는 아들의 부분에는, 나중에 채운 흔적을 없애려고 노력한 흔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일부러 아들의 그림은 항상 검정과 흰색의 수묵으로 그려 넣어, 다른 이미지들과 차별화 시키며 단번에 나중에 그려 넣은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다, 새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을 알아챈 누구나 이 질문을 할 것이다. 왜 이렇게 했을까? 그 질문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자연스런 생각들을 관객에게 유도하게 될 것이다. 즉, 이 아이가 없었을 때의 상황은 어떤 사건, 어떤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었을까, 이 아이가 새롭게 나타나면 바로 이 초등학교 일상의 풍경은 어떻게 다른 모습(구도)로 변하게 될까, 등등의 생각이 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자기 아들이 이런 모습으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일상을 갖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사항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치부하는 것은 사려 깊고 세련된 화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작가는 좀 더 고차원에서 말라르메처럼 사건의 빈 장소를 제공하면서, 허상의 시적 드라마를 제시하는 것이다. 허상적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대신 써준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그림속의 힌트들만으로도 충분한 내재적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제시하여 주는 것이다. 풍경화에는 항상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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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작가의 작품에서는 어떤 꾸미지 않은 소박함, 최대의 전지함과 성실함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동시에 희망과 번뇌가, 극도의 세련됨과 소박함이, 고도의 기교와 어설픔이 함께 묻어 나온다. 참신함, 편안함, 평화로움 속에서의 두려움, 이런 모든 일상의 감정들이 녹아 있다. 대다수의 젊은 작가들이 파리나 뉴욕의 전위 예술이나 동경하면서 시건방을 떠는 것에 비해, 이 작가는 촌스런 소박함, 투박함이 뭍어나오는 것 같이 보이는 작품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 시대에 아주 독창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가치가 있는 보물 같은 작품들이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망각했던 우리 본연의 인간적 가치를 되찾아, 인간적인 현실감을 되찾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겉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볼 줄 알고, 그런 가치를 구현하고 살아가는,아직도 여기 저기 남아 있는 인간다운 인간, 그리고 된-인간으로서의 예술가를 찬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 kai hong

Vol.20091027a | 김정우展 / KIMJEONGWOO / 金正雨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