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614a | 최민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10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2층 제2전시장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이십세기 회화의 추억 ● 회화를 통해서 20세기를 추억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뒤샹에서 워홀, 세잔에서 베이컨 회화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이토록 다양한 양식이 나타난 적도 없었고, 더구나 우리는 이들을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을 뿐 추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추억한다는 것은 감상하는 것과 다르다. 이것은 의지적이기도 하지만 비자발적이기도 하다.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것을 추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의 의도뿐만 아니라, 그를 부추긴 동인(動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구나 그가 예술적인 형식을 통해 표현하려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야 우리는 그의 추억을 진정 흥미로워 할 수 있을 것이다. ● 최민화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서 세계를 표현하고, 자신을 표현한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 말하고 싶은 것, 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을 오로지 그림을 통해서 표현한다. 그렇게 표현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을 원하게 한 것이기도 하다. 최민화는 그림을 통해서 20세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지난 한 세기를 추억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기록하거나 사회현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의 저널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온몸으로 살아온 그 한 세기의 화가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한 시대의 다른 반항아들이다.
새로운 양식은 전통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한다. 전통은 이전의 것이다. 예술가는 항상 아방가르드이다. 금기를 거부하면서 인간이 탄생했듯이, 예술은 항상 금기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깟 사과!' 라는 태도를 갖고 있다. 한편으로 의심을 하고, 한편으로 호기심을 갖는다. 의심과 호기심이 정점에서 폭발할 때, 그때 남는 그 흔적은 예술작품이 된다. ● 최민화, 그가 호출한 화가들이 의심했던 금기는 재현의 양식이다. 재현의 양식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떤 것의 모사라는 굴레를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어떤 것에 종속된다. 이데아, 신, 도덕 등. 그러나 회화가 회화이기 위해서는 재현에 만족해선 안된다. 그래서 그들은 시선의 방향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금기로 인해 발생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냄새나 고함을 그리고, 모사를 모사하고, 입체를 화면에 던져 터뜨리고, 심지어 피부를 벗겨내기도 한다. 이로 인해 드디어 모상이 전복되었다. 이제 그 화폭에 필터를 장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화가는 세상에 충혈된 만큼 화면을 충혈시킨다. 자신이 분홍에 충혈되었다면 보이는 세계의 그려지는 풍경은 분홍이 될 수밖에 없다. 복사된 원본이 20세기를 시작했고 변형과 분해, 낙서와 같은 많은 반항들이 한 세기 동안 여기에 흔적을 남겼다. 끝으로 등장하는 분홍회화. 최민화는 그가 요청한 작가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 태도와 더불어 나머지 세상을 온통 분홍으로 물든 진달래 세상으로 만든다.
『이십세기 회화의 추억』의 작품들은 각각 하나의 인물이 다른 양식으로 반복된다. 추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반복이다. 하지만 차이나는 반복이다. 차이나는 것이 차이나는 것과 관계하는 반복이다. 과거의 추억은 지나 온 시간만큼 반복하면서 증식한다. 따라서 추억에서 반복되는 것들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이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 대립하거나 비교되는 반복도 아니다. 그래서 재현에 내재되어 있는 반복과는 다른 반복이다. 최민화의 반복되는 이미지는 추억의 반복이지 재현의 반복은 아니다. 20세기의 아이콘적인 인물이거나 화가가 개인적으로 아는 익명의 민중이거나 최민화의 회화에서 20세기의 회화를 대변하는 반항적인 필치들로 반복된다. 하나의 작품은 10개의 복사된 원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각각 다른 양식의 특이성을 띄고 변형되었다. 이러한 반복은 원본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대번에 원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뒤샹이 그리던지 워홀이 찍던지 마릴린먼로는 여전히 치마를 날리며 서있다. 한편으로, 각각의 작품에 선택된 다른 인물들은 동일한 화가들의 양식에 의해서도 변형되었다. 제임스딘은 귀가 잘린 고호의 자화상이 되고 히치콕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 서있다. 지미핸드릭스는 고기덩어리를 갖고 연주하고, 이소룡은 검은커텐 앞에서 고함을 친다. 콧수염을 붙인 엘리자베스테일러와 익명의 여인, 그리고 분홍빛으로 물든 모든 사람들, 이러한 반복도 원본성을 손상치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대번에 같은 양식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관람자가 확인하는 반복들이 표면적인 차원에서 이뤄지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분명 차이나는 반복, 즉 생명적인 반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 최민화 작가는 다양한 화가들의 어떤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들을 화면에 잘 옮긴 화가이다. 그래서 그의 반복에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어떤 떨림이 있다. 그의 표현이 사뭇 농담처럼 가볍게 보일지라도, 이러한 떨림은 심층적이고 내면적이라서 이를 느끼는 것은 오직 관람자의 몫이다. 떨림의 직접적인 작용은 몸에서 일어난다. 최민화는 20세기를 추억하기 위해 그의 몸을 빌어 그 시대의 화가들과 접신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20세기를 추억하기를 원한다면 머리를 통해 반복을 인식하는 것보다 몸을 통해 그 떨림을 느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된다는 것, 과거로 빠져든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누구나 간절히 원한다면 극중 배우가 아니더라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 박순영
Vol.20091022a | 최민화展 / CHOIMINHWA / 崔民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