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self - draw one's breathⅠ& Reverie, Somewhere

이진명_정경자展   2009_1019 ▶ 2009_1030

초대일시_2009_1020_화요일_06:00pm

후원_비주얼 아트센터 보다_(주)두릭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두인_gallery dooin 서울 강남구 역삼동 728-40번지 엄지빌딩 Tel. +82.2.567.1212

LEE JIN MYUNG-ma self - draw one's breath ● 메마르게만 느껴지는 빈 공간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공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색들을 옷으로 만들어 입고 표현 하면서 텅 빈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하나의 performance를 보여 주고자 한다.

이진명_ma self-draw one's breathⅠ-25_디지털 프린트_100×80cm_2008

어릴 적 크레파스를 잡았을 때는 흰 스케치북을 꽉꽉 채워 그림을 그렸다. 그 때는 내세상이 8절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그 8절 스케치북만 보지 않는다. 세상을 둘러 봤을 때, 그 곳은 비어있었다. 메마른 8절 밖의 세상은 광활했다. 그래서 나는 저 세상에 그림을 그려주고자 했다. 저 녀석들도 이쁘게 좀 해주자, 그래서 보니까 내 손에 들린 건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이 아닌 카메라와 옷을 만드는 재봉틀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빈 공간들은 메마르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 공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색들을 옷으로 만들어 입고 표현 하였는데 텅 빈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동 하나하나 뜻이 있다기 보다는 상황을 연출하지 않고 그 공허하고 메마른 공간들을 부정하려는 하나의 performance를 보여 주고자 하였다. 딱딱한 콘크리트 벽에서도 작은 새싹은 그 생명을 틔어낸다. 그것처럼, 나도 죽어있는 공간에서 생명을 불어 넣고 싶었다. 그러므로써 나의 움직임과 색감들은 그 죽어있는 공간에 작은 떨림을 일으킨다. 이 떨림으로 그 죽은 공간에 있는 것들을 깨우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빈 공간은 채워지게 되고 그것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 이진명

이진명_ma self-draw one's breathⅠ-1_디지털 프린트_27.53×35cm_2006
이진명_ma self-draw one's breathⅠ-7_디지털 프린트_60×40cm_2006
이진명_ma self-draw one's breathⅠ-2_디지털 프린트_60×40cm_2006
이진명_ma self-draw one's breathⅠ-5_디지털 프린트_60×40cm_2006

JEONG KYUNG JA-Reverie, Somewhere 감각의 전이를 통한 존재의 울림 ● 우선, 정경자의 환기적 재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아스팔트로 된 쭉 뻗은 길, 도로 표지판, 갈색 풀로 뒤덮힌 저 너머에 보이는 흐릿한 풍경, 기막힌 실루엣에 의해 처리된 선, 텅 빈 공간, 바닥에 고인 물 위로 반영된 도시풍경, 바다 앞에 우두커니 놓여있는 파라솔, 멀리 보이는 빈 벤치, 수족관 속 물고기, 잿빛 건물, 하늘너머로 보이는 구름들, 박제된 동물들, 손이나 발과 같은 신체의 단편들, 실루엣으로 또는 원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 이 사진들은 우리의 감정적 층위를 건드린다. 그것은 브레히트(Brecht)식의 낯설게 하기, 거리두기 방식에서처럼, 어느 것 하나 친숙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낯설고 불편하게 느끼게 하는 방식에 의해서이다. 이 사진들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의 여러 곳에서 조우한 대상들을 통해 감각(sensation)을 되찾고 감정의 주관성(subjectivité)을 드러내는 면모를 보인다.

정경자_Reverie,Somewhere #13-02_C 프린트_50×60cm_2009
정경자_Reverie,Somewhere #13-04_C 프린트_50×60cm_2008
정경자_Reverie,Somewhere #05-04_C 프린트_20×25cm_2006
정경자_Reverie,Somewhere #04-10_C 프린트_20×25cm_2006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 문화가 감정보다 이성에 우위를 두었다면, 프로이트(Freud)는 무의식의 흐릿한 지평에 해석적 명료함을 부여하기를 원했고 이러한 프로이트의 사상을 이론적 토대로 삼은 초현실주의는 일상 속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사물의 새로운 면모에 주목했고 이것이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이다. 정경자의 눈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웨스턴(Edward Weston)의 전시각화(previsualisation)는 여기서 무의미하다. 28-70mm 줌 렌즈를 장착한 디지털 사진기로 장비를 최소화하며 현실 속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기획한다. 그녀는 상상적인 것(l'imaginaire)에 문을 연다. 투명한 유리를 통해 보게 되는 구름으로 수놓아진 파란 하늘은 마그리트(Rene Magritté)의 회화를 상기시킨다. 분명히 초현실주의는 사진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정경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그것에 닮아있다. 그녀는 자신이 처음 방문한 장소에서의 대상과의 우연적 만남을 긴장감 있게 포착하고 그와 동시에 시간의 끝자락에서 풍부한 감정을 이끌어내며 멀티플(multiple) 형식의 사진작업으로 표현해낸다. 이런 멀티플 형식은 달리(Salvadore Dali)의 초현실주의적 요소과 에로틱한 요소가 결부되어 나타났던 「 extasie 」같은 작업, 그리고 현대 설치 미술가 중 한사람인 아네트 메사쥬(Annette Message)의 「Les Tortures volontaires」에서 나타난 방식과 유사한데, 여러 개의 이미지들이 그들 간의 이미지적 연쇄를 일으키며 새로운 소통을 위해 열려지는 양태를 취하게 되는 특성을 보인다. 내가 정경자의 사진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특성은 사진 이미지의 함축적이며 내러티브적 성격에서 온다. 모든 사진은 프레임의 한계 안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진적 언술(énoncé)의 특징은 프레임 안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뒤부아(Phillip Dubois)가 지적했듯이, "사진적 행위는 단순히 현실의 연속성 안에서의 단절의 행동뿐 아니라 환원할 수 없는 통과(passage)의 사고를 함축한다. 참조된 공간의 무한성에 견주어 볼 때 항상 필연적으로 부분적이며 단절, 추출, 선택, 분리로서의 사진적 공간은 하나의 잔여, 잉여물, 하나의 다른 것을 항상 함축하는 『장외 영역(hors-champ)』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것은 재현의 장에서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자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프레임 안에 각인된 공간과 인접성의 관계에 의해 항상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뒤부아, 「사진적 행위(L'acte photgoraphique)」 중에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진들 속에서 작가가 부여한 현실의 단편들에 의지하며 새로운 의미의 장(champ)으로 움직여가게 된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 역시 타인에게 주변부(contour)의 시선을 부여하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주변부의 구성을 합리화한다. 달리 말해, 가시성(le visible)은 실제로 보이지 않은, 일시적으로 숨겨진, 잠재적인 것의, 절박한 것의 현존, 가시적인 것(un visible)을 포함한다. 윤곽은 항상 열림과 뒤틀림(voilement)으로 인지될 수 있는 양화적 형태와 아울러 음화적 형태의 인물을 동시에 제시한다. 퐁티에 있어서, 타인의 현존은 필연적으로 보여지는 신체 일부분의 사전의 존재 그리고 가시성의 후광과 신체의 각 부분 주위로의 표명을 요구한다. 이것은 세쟌(Cezanné)의 회화 작품에서, 윤곽(contour)은 하나의 형태가 끝나고 다른 것이 시작되는 장소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메를로-퐁티, le visible et l'invisibe 중에서). 인간의 시야에는 흐릿함과 선명함 사이의 변증법적 논리가 존재한다. 많은 대상들은 우리 눈에 원래 흐릿하게 나타나며 어떤 것은 우리 눈앞을 지나갈 때 너무 빨라 따라가기 힘들기도 하다. 르마니(Jean- Claude Lemagny)는 "사진에서의 흐릿함은 의미너머로 모든 이미지에 우리를 교착하게 하는 두 개의 힘을 움직인다: 거기 들어가려는 욕구와 거기서 재현을 변형시키려는 것"임을 지적했다. (르마니, L'Ombre et Le Temps 중에서) 선명한 사진이 세상을 도달할 수 없는 대상으로 구축하는 것을 위협한다면 흐릿한 사진은 우리가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도록 함과 동시에 우리가 거기서 내용물과 효과를 통제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지표의 성립을 제약하지만 우리는 감각적 표식과 그것과 연속적임을 느끼려는 우리의 욕망 속에서 감각적 내밀함을 정립한다. 현실에서 흐릿함은 대상의 부재이며 순간적이며 만져지지 않는 흔적으로 환영의 측면에 다가가 있는 하나의 몸체, 텍스쳐가 된다. 사진의 상상적 자발성을 부여하는, 흐릿함 앞에 우리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두려움은 강조점이나 이유 없는 시각적 애매모호함에 의한 것으로, 이런 불분명함은 사진을 재현의 굴레에 가둬두기 보다는 역으로 주체적인 감수성을 창의적으로 이용할 많은 여지를 주면서 관객을 자유롭게 한다. 1964년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미지의 수사학(Rhétorique de l'image)」에서 "사진은 영화와는 달리 순수한 관객적(spectatorielle) 인식에 결부되어야 하며 (...) 모든 이미지는 다의적이며 기의의 『유동적인 연쇄(chaine flottante)』로 관객은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무시한다. 낯섬과 풍부함을 구성하는 기의의 「유동적인 연쇄」는 다의적"임을 지적했는데, 의미가 고착되지 않고 부유한다는 측면에서, 라캉(Jacques Lacan)의 『기표의 미끄러짐(signifiant flottante)』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간혹은 초점이 맞은 채로, 간혹은 흐릿하게 나타나는 정경자의 사진들은 현실의 단편들로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으며, 선명함과 흐릿함의 긴장 속에서의 감각과 감정의 전이만이 거기에 있게 된다. 정경자의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작가의 의도를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작품 앞에 마주선 채, 자치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할 임무를 부여받은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손영실

Vol.20091019j | 이진명_정경자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