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규展 / BAEBYOUNGKYU / 裵炳奎 / painting   2009_1021 ▶ 2009_1108 / 화요일 휴관

배병규_꽃이내리다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9

초대일시_2009_10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화요일 휴관

통인 옥션 갤러리_TONGI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6번지 통인빌딩 5층 Tel. +82.2.735.9094 www.tongingallery.com

지금 본 영원한 풍경 ● 풍경이란 테마도 역사적 개념이다. 그것은 당대의 사회적 구성물이란 얘기다. 풍경은 고정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문화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해왔다. 사실 자연풍경을 본다는 것은 그 풍경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공유된 인식소 아래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풍경화를 본다는 것은 개별 작가들이 이해하고 있는 풍경에 대한 관념을 들여다보는 일이자 그(녀)의 미의식 내지는 세계관을 엿보는 일이다. 나아가 보편적인 민족구성원들의 의식, 무의식 속에 잠재된 자연관, 땅에 대한 인식의 틀을 만나는 것이다. ● 배병규의 작업실은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자연 속에 있다. 도시에서 훌쩍 벗어난 곳은 아니되 그렇다고 도시의 한 복판은 더욱 아니다. 도시와 농촌, 자연의 경계에 위치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업실 바로 앞에 우사가 있고 뒤로는 산과 나무와 청량한 공기가 안개처럼 진을 치고 있는 곳이다. 자연의 내음이 거의 날 것의 상태로 비집고 다가온다. 상쾌하고 비교적 아름다운 경관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는 곳에 작업실 공간은 앉아있다. 작업실 내부에는 밖의 풍경을 닮은 이미지가 두툼하게 발려진 유화물감의 물성 아래 배열되어 있다. 그가 외부에서 퍼 온 자연의 이미지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상이 풍경이자 보편적인 자연의 이미지다. 유달리 아름답다거나 스펙타클하거나 거창한 주제의식을 담지한 그런 풍경이 아니다. 그저 풀이나 꽃처럼 자라는 풍경,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장면이 숨을 멈추고 멈춰서있다. 그 안에 무척이나 평범하고 비근한 풍경이 간직하고 있는 비범한 아름다움이 숨을 쉰다. 아름다움은 자연이 잉태한 것인데 작가란 존재는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재현하는 이들이다. 조용히 관조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자연은 온통 신비스러움 투성이고 아름다움 천지다. 들판이 있고 코스모스가 활짝 핀 대지와 추수를 끝내고 황량하게 남겨진 논과 산이 원경으로 위치해있는가 하면 바닷가에 홀로 서있는, 그 풍경에 잠긴 누군가의 뒷모습이 퍽이나 적조하고 감상적으로 놓여 있다. 사람이 부재한 어느 자연의 한 장면이 덩그러니 다가오는가 하면 땅바닥에 누운 여자의 몸이 꽃과 범벅이 되어 누워있는가 하면 사람의 얼굴과 숲/ 꽃이 하나가 되어 서있다. 인간과 자연이 한 몸으로 얽힌 다분히 생태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배병규_눈물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9

다소 우울하고 적조한 분위기가 감돈다. 자연풍경을 소요하고 바라보다 파생된 작가의, 관찰자의 감정 상태를 자연이미지와 함께, 또는 그 자연 속 인간의 몸과 오버랩 시켜놓은 그림이다. 전형적인 풍경화의 형태 안에서 어딘지 모르는 미묘한 감정의 상황성이 강조된 그런 그림말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풍경의 재현이되 약간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맴도는 풍경이다. 보이는 대로의 풍경이 아니라 마음이 본 풍경 혹은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자기 나름으로 재연출한 그림이다. 작가는 현재의 작업실 주변 풍경에서 유년시절의 고향 땅에 대한 추억을 되새김한다. 특정 장소는 또 다른 장소를 환기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추억을 부풀리고 그로인한 여러 상념을 가득 안기는 공간이다. 유사한 풍경에서 연유하는 기억의 재생은 현재의 장소성을 비현실화시킨다. 이 풍경을 단서 삼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또 다른 풍경을 환생시킨다. 그것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이한 체험이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일이자 자기 안의 무수한 시간을 순간순간 되살려내는 일이다.

배병규_꽃이내리다_캔버스에 유채_140×280cm_2009
배병규_언제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_캔버스에 유채_91×65cm_2009

그는 직접 자연을 소요하고 이를 소재로 하는 동시에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다시 재배열하거나 자신의 원하는 모종의 상황으로 연출한다. 따라서 이 풍경은 사실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구상이면서도 관념성이 비교적 강한 풍경이다. 그리고 그 같은 느낌을 고조하는 것은 상당한 두께로 발라 올려진 물감의 층위와 그만큼 촉각적인 붓질로 인해 가능하다. 그것은 튜브에서 그대로 짜낸 듯한 물감의 몸, 물성을 보여주며 모종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 풍경에서 연유하는 자기 감정의 진폭을 전해주는 제스처다. 박진감 있는 속도로 찍힌 물감, 붓질은 그 풍경 앞에서 작가가 받은 감정의 떨림이나 고양상태를 전하는 흔적이 되고 있다. 밝고 선명한 원색의 물감들이 끈적거리게 얽히고 두툼하고 촉각적으로 머물면서 이미지이자 물질을 동시에 증거하면서 그려진 이미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갖도록 만든다. 다분히 표현주의적 붓질인데 그래서 보는 이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미지를 만나면서도 어딘지 물씬거리는 감정, 자연풍경 앞에서 접하는 솔직한 느낌을 직접적으로 전해 받는다. 작가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풍경을 자연스럽게 보고 느끼고 자연스럽게 그리고자 한다. 자신의 주변에 아름다움은 흘러넘친다. 일상 속에, 자연 속에서 마구 자란다. 풀처럼 꽃처럼 자란다. 작가는 그 모습을, 행로를 붓과 물감으로 따라간다.

배병규_장미_캔버스에 유채_80×90cm_2009
배병규_행복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2009

배병규의 풍경화는 무엇보다도 적막하고 우울한 편이다. 밝고 화사한 색채와 아름다운 이미지 이면에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내면이 응고된 풍경화이기에 그런 것일까? 그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의 어느 한 장면이 가슴에 박히면서 남긴 아찔한 느낌을 되살리려 한다. 기억은 결과적으로 아련하게만 잔존하다. 모든 이미지, 자신이 본 것은 의식에, 뇌리에 결과적으로 상처로 남는다. 본다는 것은 사실 치명적이다. 그것은 망막에 맺혔다 사라지지 않고 우리 몸 어딘가에 박혀 순간순간 떠오른다. 내 몸을 숙주삼아 증식되어 나간다. 그러다가 다시 한때 보았던 것과 유사한 어떤 장면이 나타나는 순간 홀연 어디선가 출몰한다. 내 안에 있는 무수한 나/시선들이 덤벼든다. 내가 보는 이 풍경은 현재의 풍경이자 아득한 시간 속에서 경험된 풍경의 흔적이다. 모든 풍경은 그렇게 강시처럼 환생한다. 결국 우리는 현재의 시간대위에서 교차하는 무수한 시공간의 그 멀미나는 교차를 견디면서 지금, 내 앞의 세계를 본다.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배병규의 그림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 박영택

Vol.20091015g | 배병규展 / BAEBYOUNGKYU / 裵炳奎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