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10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상_GALLERYSANG 서울 종로구 팔판동 115-52번지 B1 Tel. +82.2.730.0030
이미지의 부재를 통해 실체에 다가서려는 시도 ● 육안은 선과 색을 신속히 '읽기'위해 수집하며 표면만을 어지럽게 훑는다. 우리들이 이 세계와 묶여진 뒤로-합성적 이미지와 더불어 세계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공한다는 점에서-우리는 이렇게 생존의 의무들에서 해방되고 이 저녁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며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것, 행성들의 어지러운 춤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수시로', 끝없는 나르시시즘에 맡겨진, 그저 「보기 위해」서만 던져지는 눈길들이 있다.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 화가 장승애의 작품에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다. 천부경(天符經)의 81글자를 암시적으로 그려 넣는 작업을 하던 10여 년 전 만 해도 어떤 내용, 주제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점차 색의 띠, 규격화되지 않은 색면의 분할로 변화했다.
우리에게 이미지는 마치 언어와 같다고 여겨져(설혹 그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라도) 이미지가 분명한 그림에 대해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 의사소통을 하듯이 편안함을 느낀다. 초상화나 풍경화만이 아니라 단순한 기호와 색상이라도 그것과 대응되는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우리의 뇌가 훈련되어 있는 듯 하기까지 하다. 누군가 새소리의 지저귐을 해석하려하지 않는 것처럼 미술작품도 그렇게 보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던가? 석양을 바라볼 때 침묵속의 희열이나 형체 없는 바람을 느낄 때의 부드러움은 굳이 이유를 묻거나 의미를 캐지 않고 그냥 그 체험 그대로 놔두는 법이다. ●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던 시절의 작가는 짐짓 추상적인 작품을 그렸지만 천부경이라는 상징을 통해 '생각'을 전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 당시도 『소리보기』라는 전시제목은 지금과 같았다. 즉,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충돌을 통해 그 사이, 오감 이외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지향한 점은 맥락이 같다. 중요한 변화라고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가 전하려는 것이 '생각'차원에서 '느낌'차원으로 더욱 더 지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에서 출발하였지만 작품과 조응하는 관객의 느낌도 허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수평선을 이루는 아침바다의 설렘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천 가지 만 가지 다른 것을 선물한다. 공통된 점은 자연에 대한 경이와 감사일 터이다. 이러한 것들은 '생각'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므로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을 시도하기에는 막막하기 그지없다. 언어의 영역인 '연상', '개념화', '정의내림'으로 속속 연결되는 그림속의 이미지는 작가가 경험하는 '느낌'의 세계를 축소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작가가 상징적인 하나의 장면을 사진을 찍듯 묘사한다면 그 또한 그 장면의 산이며 바다며 바람이며 공기 등에 대한 관념적인 정의-정의에 따라오는 관념, 그 순환 속에서 '느낌' 차원의 실재(현전present)를 잃어버릴 확률이 높다. ● 장승애의 작품 속에 굳이 이미지가 '부재'하는 것의 의미를 짚어보는 이유는 사물(회화)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이다. 보는 대상인 회화에 대한 시선을 통해 그 밖의 것을 보는 일반적인 태도를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표피만을 훑고 지나가는 망막과 뇌의 정보처리 기능 정도에 그치지는 않는가? 레지스 드브레의 살짝 비틀린 지적처럼 '해방'이라기보다는 '나르시시즘'이 되어버리는, 습관화 되고 반복적인 반응만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보아서 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과거의 어떤 기억과 조합시키고 단어와 연결시키기만 한다면 만족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한 조각의 신비나 밤새 뒤척이고 온 존재를 앓아가며 궁구하는 물음 따위는 간직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죽음이나 고통처럼 생생한 경험들과도 멀어지게 되고 거대하게 우주를 배경으로 움직이는 행성들이야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돌고 돌 뿐이라고 여겨버리는 그런 무감각한 상태. 그런 것은 아닌가하고 묻고자 하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인간이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혈액이 흐르는 것을 왜 느끼지 못하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그러한 무감각은 마치 망각이 가진 장점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축복임에 틀림없을 테지만 존재하고 있음에 대한 감(感)에서 멀어진다고 자각할 때 묻곤 한다. 장승애의 작품은 그 색채의 미묘한 변화와 배열들 간의 부딪침-가끔 그것은 어떤 사건처럼 펼쳐진다-앞에서 눈으로, 망막으로만이 아니라 (태곳적 인간들에게는 살아있었다고 여기고 싶은)세계에 대한 놀라움이나 두려움, 그 생생한 감각을 일깨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연상 작용을 작동시켜 서둘러 짜 맞추기 하기보다는, 색채 심리학 이론을 기억해 내려하기 보다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본 양 내 앞의 존재하는 것을 더듬어보기를 촉구한다. 일단 미적 취향과는 별개로 출발하는 생생한 느낌은 싫은 느낌, 좋은 느낌, 편안한 느낌, 나른한 느낌, 우울함, 권태 까지.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부재'는 소통 곤란의 당혹스러움이기 보다 색채의 리듬 속을 산책하며 그 리듬을 즐기는 초대가 될 수 있어야겠다. 물론, 이 파티가 흥미로운가의 여부에는 초대한 주인장-예술가-의 솜씨가 중요한 변수로 자리할 것이다. ● '회화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인가?'에 관해 '그렇다'라고 답 할 수 없지만 상당한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다. 미술과 관련된 학문 중 하나인 도상해석학은 이미지의 변천사 또는 이미지의 해석학이라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굴벽화의 인위적인 이미지를 회화의 시초로 역사에 기록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화가는 실제 그의 작품을 접하는 감동으로서가 아니라 트레이드마크화 된 하나의 이미지로 알려지기도 한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모나리자, 앤디 워홀과 마릴린 먼로 초상의 관계처럼. 장승애의 작품도 그와 같이 단순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몇 몇 작품을 아이콘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승애에 대해 몇 가지 색과 면의 분할로 된 이미지를 만드는 화가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까? 여기에서 '회화'의 성격에 대한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앞서 이야기하였듯 연상 가능한 이미지의 부재를 통해 개념이나 생각이 아닌 '어떤 상태-present'를 표현하려는 것이 장승애의 작업이라고 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그의 작품을 형상(image)이라고 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다. 이렇듯 회화는 '이미지'보다 더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거나 전달받고자 하는 '생각'이나 '이미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교감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그 점이 회화예술이 가진 핵심이자 본질적인 면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마주하며 겪는 가슴 벅참과 한 점의 회화작품 앞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만큼의 감동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경로의 차이를 낱낱이 밝혀낼 수 는 없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평평한 평면과 물감의 뒤범벅일 뿐인 사물(회화) 앞에서 세포의 떨림과 감정의 격앙됨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이 상징적인 이미지나 이미지를 둘러싼 서사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나 모네의 작품 「수련」도 해바라기와 수련이라는 실제 대상의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은 아니다'로서만 설명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타내어질 수 없는 세계를 나타내보려고 하는 시도'이거나 '알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와 일맥상통한다.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끊임없이 '죽음'을 상상하는 일이 그것이다. 아니, 현대는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려 한다. 마치, 회화에 대해 이미지도 아니고 생각(idea)도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something)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something)은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고 회화를 가능하게 한다. 존재하는 것들 안에 혹은 그것을 넘어 있는,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심연(深淵)에 대한 메타포와 같이. ■ 신혜영
Vol.20091014e | 장승애展 / CHANGSEUNGAE / 張承愛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