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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014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A 전시장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미디어와 내러티브의 동행 ● 예술가 주체가 자신의 서사를 구현하기 위해서 매체를 끌어들인다는 일반적인 도식의 이면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이재훈의 작업은 미디어가 내러티브를 견인하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미디어를 내러티브의 종속변수로 볼 수도 있지만 예술가의 몸에 가장 잘 맞는 매체가 서사를 견인하기도 한다는 점을 우리는 이재훈의 경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재훈은 프레스코 기법을 사각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벽그림의 방식을 액자그림으로 전환한 「비기념비(UNMONUMENT)」 연작들이다. 그의 회화는 건축물의 일부분으로서의 벽그림이 아니라 독자적인 발언을 위해서 존재하는 액자 속의 벽화 스타일 그림이다. 이재훈의 벽화 스타일 그림은 자신의 내러티브를 최적화하기 위해서 빛바랜 물질의 기억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비기념비 연작으로 진화했다. 그는 오랜 벽화실험을 통해서 매우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자신의 전형을 창출했다. 프레스코 벽화에 관한 연구와 실험은 그의 스타일을 세우는 데 근간이 되었다. 그는 석회와 먹을 써서 빛바랜 흑백사진과도 같이 낡은 이념의 틀을 표상하는 비기념비의 물질성을 창출한다. 배체를 통해 밀어올린 먹 색깔들은 우연의 효과로 증폭하면서 회화의 맛을 배가한다. 깔끔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그림이 아니라 구석구석 군더더기가 묻어있는 표면을 통해서 낡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현실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잘 살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이재훈이 회화의 물성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회화 자체를 소비하면서 물질에 탐닉하는 데 따르는 부담감을 최소화 하면서도 최대한 회화 자체의 매력을 발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서사의 강박을 적절히 충족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최대한 자유롭게 회화라는 물질을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무덤의 기념비 양식을 회화적으로 차용하는 이재훈은 인간의 형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차용하고 변형한다. 그 인간은 일러스트 풍의 캐릭터들이다. 몸통에 비해 커다란 인간의 머리는 이재훈 그림을 친숙한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이다. 때로는 손과 발처럼 인간 신체의 부분만 등장시켜 과장과 왜곡의 방식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그것은 시니컬한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처리할 줄 아는 예술가의 감각을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이재훈의 주요 관심사인 인정 시스템의 상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옛것과 새것이 혼재해있으며 한국과 이국,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섞여있다. 또한 시니컬한 감성과 유머러스한 감각이 함께 들어있다. 그의 발언이 깊고 넓은 파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상호 이질적인 요소들을 뒤섞은 역설과 은유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익명의 개인들에게 묻는다. '정말 참 잘 했는지, 여전히 잘 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고 그러고들 있는지'를 묻는다. 그의 질문은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참 잘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인정 시스템을 뒤집는 이재훈의 발언은 따라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부정하는 역설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그는 기념비 스타일을 끌어들인 비기념비라는 설정에다가 또 하나의 역설적인 개념을 보탰다. 근작의 주제어인 '노블 세비지(NOBLE SAVAGE)'는 야만적인 귀족, 즉 고결한 야인(野人)을 말한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야만의 상황을 집약한 개념이다. 그는 상을 받거나 기도하는 개인, 책을 들고 칼을 빼드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권력과 욕망의 덫에 걸린 개인과 사회의 면면을 담아낸다.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담지자로서의 인간 개인과 그 집단인 사회의 폐부를 드러내곤 한다. 특히 그가 지식권력에 관한 비판이다. 책과 칼은 온전히 권력을 상징한다. '불건전한 관계'는 넘버원에서 넘버파이브에 이르는 다섯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결국 다섯명의 상호관계는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일반원칙 같은 걸 보여준다.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라는 제하의 연작 몇 점은 여성의 미끈한 하체를 아름다움(美)과 연관시키고, 넥타이 맨 남성의 상의로 힘(力)을 표상하는가 하면, 쫙 편 손바닥에 참 잘 했어요 도장을 새기거나 불끈 쥔 주먹 앞에서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인정 시스템 속에 갇혀있는 인간들의 권력관계를 압축한 그림들이다. 5미터가 넘는 기념비적인 대작 「UNMONUMENT-다들 잘 하고 있습니까」는 지식과 권력, 전체주의와 국가주의, 맹적적인 권위와 위선, 지배와 복종, 집단주의의 권력과 개인의 유약함, 경쟁과 투쟁의 사회, 우상화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나약한 개인의 식민적 상황 등을 담고 있다. 경쟁이 일상화하고 영웅의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의 준엄한 약속을 한 화면 안에 집약한 거대한 군상이다. 그것은 꿈틀거리는 인간사회를 거대한 덩어리로 시각화한 신학철의 콜라주와 같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확인하게 해준다.
스타일의 독창성이 곧 예술적 창의력으로 평가받는 것이 예술 장의 기본 논리이다. 따라서 예술가 주체의 성립은 곧 매체를 다루는 기술의 독자성 여하에 달려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예술에 있어서도 미디어는 내러티브를 견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매체가 서사를 견인하는 것이 결과론적으로 가능하다고는 보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관계로 흐르면 다소간 위험할 수 있다. 이재훈의 경우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재훈의 회화에서도 미디어의 선행 현상이 완곡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고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구조로부터 개인으로, 익명으로부터 실명으로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미디어와 메시지는 서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이재훈의 스타일이 그의 발언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개인과 개인, 집단과 개인,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현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재훈은 사회적 소통의 구조를 통해서 현실세계를 들여다보는 예술가이다. 그가 다루는 것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무수히 많은 소통 체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현실을 자신의 회화적 발언의 장으로 끌어들여 그 안팎을 헤아리는 비판정신이 이재훈 회화의 근간이다. 그는 비판적 리얼리스트의 관점에서 사회와 개인의 소통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이전 작품들이 익명의 인간들을 통해서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식이었다면, 근작에 들어서는 그것이 비록 익명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개별적 실체들, 그러니까 개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데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곧 실명의 개인과 실제의 사건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대입하는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 이것이 곧 이재훈에게 내제한 미디어와 내러티브의 변증법이 아니겠는가. ■ 김준기
Vol.20091013h | 이재훈展 / LEEJAEHOON / 李哉勳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