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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009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나무화랑_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김준권의 근작 단색조 목판화에서 나는 보았다. 목판화의 형식이 정제되고 밀도가 치밀해지면서 보여지는 작가의 투명한 내면, 혹은 작업에의 진중한 집중에 의한 마음가짐 같은 것을. 설명적이고 서술적인 소재들보다는 화면의 장중, 담담, 절제, 엄격, 엄숙, 비장, 간결, 정적(靜寂) 등이 돋보이며 거기에 판면과 프린팅의 중첩에서 우러나는 먹색의 맑음과 흐림의 깊이가 울림을 증폭해낸다. 쉽게 설명하자면 과거 실체적인 대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던 실경에서 작가의 관념, 마음, 혹은 내면적인 풍경화로 전이되며 목판화의 새로운 맛과 멋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이 간단하고 소략한 구도와 수묵화와 같은 모노톤의 색채변주는 담백하다. 그런데 이 모노톤은 그냥 간단히 구축된 색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단조로운 풍경이지만 섬세한 부분을 들여다보면 갖가지 수성안료와 프린팅의 효과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색면들을 구축하고 있다. 우선 근경. 나무판면의 질감과 동양화 분채안료의 질료적 혼성이 두드러지며, 여러 번 프린팅 된 과정을 거치며 구축된 밀도와 발색과 표정의 층위는 부드럽되 견고하다. 「산에서」연작이나 「섬」연작에서의 근경은 완전 검정색의 평면이다. 판면의 나무결조차 여러 차례 프린팅한 두터운 안료층에 덮여서 사라지고 검은 색면만이 무표정하고 완고하다. 이 실루엣으로 처리된 색면의 질감과 텍스쳐는 미니멀아트의 절대적인 물질성의 리얼리티를 연상시킨다. 원근의 거리를 소멸시킨 채 철저하게 두께감 있는 평면으로, 실루엣으로, 질료의 표정으로 환원된 이 근경의 축지(縮地)는 그다음 중·원경과 하늘에서 처리되는 안료의 얇음/번짐/스며듦과 대조/조화되며 이질적인 조형방식을 넘어 하나의 뉘앙스로 통일된다.
공간적으로 '비어있음'과 시간적으로 '정지'된 이 상황은 작가의 심상의 기표이자 기표가 표상하는 기의다. 텅 비고 광활한 이 이미지는 이른바 노자의 태허(太虛), 무(無), 불교의 공(空)을 연상시킨다. 풍경과 이미지가 있으되 서술이나 서사가 생략된 형상성과 질료감은 바로 눈에 보이는 풍경을 넘어서 작가의 마음의 상태를 볼 수 있게 한다. "티끌 속에 우주가 있고, 찰나에 영겁이 있다"던 고승의 게송(偈頌)처럼 이 추상적인 비움/멈춤에 대한 깨달음(관념)이 바로 김준권의 마음, 행위, 내면적 정서가 된 것은 아닐까. 아마도 작가는 이제 지나온 세월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 보고 낚을 모양이다. 바라본 것은 자연이자 풍경이지만 들여다보이는 것은 본인의 마음이며, 그 마음이 바로 목판에 있음을 깨달은 듯하다. 따라서 김준권은 판과 나뭇결의 흐름에서 이미 있는 형상과 마음을 찾고서 최소한의 칼의 터치로 그 풍경을 드러낼 뿐이다. 형상은 여백을 찾고서 남은 공간이다. 여백 또한 형상을 찾으면 저절로 드러난다. 때문에 나무 판면의 성격을 거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결을 따라 마지막 프린팅 될 심상을 떠올리며 여백을 찾아가는 칼질을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모두 몸에 의한 땀과 노동으로 겸허하다. 나는 그것을 "힘찬 호흡과 고요한 마음의 역설적 기호"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장쾌하되 고요한 마음으로부터 유래한 공간이기에 육체적 호흡과 고요한 마음은 대립이 아니라 바로 작가 의식내의 통일된 기호라 하겠다. (『힘찬 호흡, 고요한 마음의 역설적 기호』 中) ■ 김진하
판그림 자체도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킄 걸작이다. 근경산의 적묵색을 출발로 연이어 산너머 산들이 파도치듯 너울대며 희미한 담묵으로 사라질 때까지 뻗어 있다. 구도는 근경의 양옆이 치솟아 U 자형인데 골자기에서 내다보는 시선같기도 하며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자세같기도 하다. 마치 그것은 신화적으로 인간의 어미인 산의 자궁에서 태어나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무한에의 동경을 담고 있다. 노자가 말한, ' 골짜기신은 죽지 아니한다 암컷의 자궁 문은 도의 뿌리이다 만물은 그 뿌리에서 태어나고 다시 돌아간다' 을 음미하게 한다함은 나의 지나친 해석인가? 물론 작가가 노자의 책를 읽고서 그같은 시도를 했다고 보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감성을 가지고 자연에 접근하고 그렇게 산과 물을 반복하여 그리다가 보면 어느듯 감성의 의미,사상을 체득한다. 이 판그림은 나무도 풀도 바위도 없는, 군두더기를 모두 떨어낸 추상적인 관념의 산이며 오직 먹물의 농담이 산들 따라 빚어내는 해조미, 조용히 숨쉬는 듯한 산의 정태적인 모습을 통하여 명상으로 잠기게 하는 것이다. 초기의 김준권 판화는 인간 삶을 주제로한 민중판화의 전형이다가 다색판의 실경산수로 들어서면 점경으로서 농가, 논밭의 들판, 앞뒤 동산의 솔밭 등 인간형태가 사라진 자취만 남기며 자연이 내뿜는 빛깔 표현에 심취한다. 호수의 물빛, 강의 물안개, 아지랑이, 노을빛, 밤하늘 등 변하기 쉬운 빛깔의 표현까지 끌어들이며 일반 산수화와 다름없는 경지를 보여준다 판화의 채색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담묵이든 적묵산수이든 수묵산수의 기법이나 크기와도 경쟁할 수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채색의 자연은 생기발랄한 자연의 약동과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면 수묵의 자연은 침잠하는 내면적 명상으로 이끌어 들인다. 과거의 문인화가들이 수묵법을 즐기고 전통 진채의 북종화에 비하여 남종화 우위논리를 전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남종의 우위논리는 한국화 발전에 또다른 폐단, 편시현상을 초래하였다. 근대화단을 왜곡시킨 이같은 교조주의 맹신은 사실근거의 착오이자 이론적 공부의 미천함에서 온 것인데 그 자세한 논구는 여기서 생략한다. 아무튼 김준권은 북종과 남종의 경계를 오고 가고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수인-수묵판화까지 개발하고 통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준권 판화세계에 대한 가치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우리 전통판화에 부실하였던 다색판화를 소생시키었고 나아가 우리에게 부재하였던 수묵판화를 부상시킨 장인적 노력에 대하여, 우리 판화사의 전환기를 만든, 그 이정표를 세운 공로에 대하여 편견없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오래 망설이며 그에게 답하지 못한 짐을 나는 벗는 것 같다. (『전환기의 이정표를 세운 김준권의 판화』中) ■ 원동석
Vol.20091012d | 김준권展 / KIMJOONKWON / 金俊權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