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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00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_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진선_GALLERY JINSU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61번지 1,2층 전시장 Tel. +82.2.723.3340 www.jinsunart.com blog.naver.com/g_jinsun
황성준의 작업 ● 죽은 사물들에 바치는 오마주. 예로부터 인간은 자연에 혼이 깃들여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과 신념으로부터 범신론과 물활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유래했다. 즉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그저 한때의 미신으로 치부되기보다는 문화의 일부로 편입되고 정착된 것이다. 다만 그 정도와 양상에 차이가 있을 뿐 고도로 문명화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그 흔적은 남아있는데, 존재의 근원(흔히 원형으로 알려진)에 대한 그리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든 사물에도 혼이 깃들여있을까. 이 물음은 사실상 사물의 다른 존재방식을 캐묻는 것이다. 즉 일상 속에서의 기능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볼 때 사물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어떤 지점과 관련이 깊다. 그런데 그때 사물이 열어 보이는 비전이나 성질이란 것이 사실은 인간에게서 사물에게로 건네진 것(흔히 감정이입으로 알려진)이다.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인 환기의 지점들, 이를테면 향수와 그리움, 회한과 막막한 감정, 그리고 상처는 실상 사물에 묻어있는 사람(삶)의 흔적인 것이다. 황성준의 작업은 이렇듯 사물에 묻어있는 삶의 흔적을 찾아내고 되새김질하는 과정에서 비롯한다. 일상 속에서 용도가 폐기처분된 오브제들, 이를테면 스푼이나 포크나 나이프를 일정한 크기의 패널 위에 재배열한 후 그 표면을 캔버스 천으로 팽팽하게 감싸 오브제의 부위가 실루엣으로 드러나게 한다(처음에는 부분적으로 찢겨진 판목이나 병 그리고 자전거 바퀴와 같이 상대적으로 더 일상적이고 개인사적인 오브제를 차용했었다). 이렇게 드러난 캔버스 표면의 요철 위로 안료를 묻힌 롤러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밀어 이미지를 가시화한다. (일상적인 오브제를 소재로서 차용한 경우에서처럼) 이미지를 얻기 위해 차용된 오브제를 캔버스의 이면에 봉해진 채로 마무리하기도 하고, (특히 나무의 나이테가 두드러져 보이는 판목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처럼) 오브제를 버리고 이미지가 덧그려진 캔버스 표면만을 취하거나 한다. 이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 사물 자체는 캔버스의 이면에 갇히고, 그 표면에는 다만 그 최소한의 흔적만이 남겨지게 된다. 그 흔적이 기억의 불완전한 복원력을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기억은 실제의 부분만을, 그것도 파편적으로 되살릴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이 일련의 작업들은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메타포처럼 읽힌다(기억은 그 불완전성으로 인해 여백과 틈새 그리고 사이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그 자체가 캔버스 이면에 봉해진 탓에 비가시적인 사물의 실체를 거꾸로 소급해 추상하게도 하고(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물의 실체와는 별개의 자족적인 화면구조와 형식논리를 떠올리게도 한다.
프로타주와 시뮬라크라, 가상과 실제의 혼성. 작가는 이렇듯 일상적인 오브제로부터 특정의 이미지를 얻는데, 주로 프로타주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프로타주 기법은 특히 나무 벽체와 나무 기둥 그리고 나무 테이블처럼 판목(엄밀하게는 판목의 이미지)을 잇대거나 재구성해 만든 구조물 작업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프로타주 기법으로 형상화한 이 일련의 구조물들은 특유의 정치한 재현 효과로 인해 일종의 유사 실제 내지는 유사환경을 조성한다. 그 자체 가상(혹은 가상적 이미지)이면서도 실제와 다르지 않은, 심지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형태와 표면질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으로서, 이 지점에서 실제는 가상에 의해 대체된다). 이 작업에서 이미지는 이중적으로 분화되고 중첩되는데, 캔버스 표면에 재현된 나무의 이미지가 실제를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정작 질량을 상실한 텅 빈 내부가 실제와의 차이를 환기시켜준다. 실제를 흉내 내는 이미지(표면으로서의 이미지)와 실제와의 차이를 환기시켜주는 이미지(실체를 결여한 이미지)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실제를 속이는데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실제의 속임을 통해 작가가 시지각적인 지평을 넘어 촉각적인 경험에로 은연중에 유도하고 있는 점이다. 즉 작가에 의해 제안된 나무 이미지가 결여하고 있는 질량은 실제로 그것을 만져 보기 전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가 주요 기법으로서 도입하고 있는 프로타주는 전통적인 탁본과 그 맥을 같이하며, 그 현상하는 양상은 다르지만 조각에서의 캐스팅이나 몰딩과 상통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로타주가 세계와 사물 그리고 대상의 표면질감을 떠내는 것에 비해, 캐스팅이나 몰딩은 세계를 통째로 떠내는 것이 다르다. 또한 프로타주는 세계 그대로를 표면(파사드)으로 환원해놓고 있다는 점에서 그 생리가 회화보다는 사진에 가깝다. 회화나 사진이 모두 세계를 참조하지만, 세계와의 관계로 치자면 회화보다 사진이 더 직접적이다. 즉 회화에서 세계는 창작주체의 자의적인 해석과 간섭에 대해 상당할 정도로까지 열려져 있지만, 사진에서 주체가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만큼 세계와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더 직접적이게 된다. 한마디로 회화가 세계를 변형시키는 일에 복무한다면, 사진은 세계 자체와 세계의 이미지, 실제와 이미지, 원본과 사본과의 관계라고 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어쩌면 사진이 회화로부터 이어받은 문제)에로 이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인식은 프로타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로타주 기법에 의해 재현된 작가의 일련의 작업들은 이처럼 그 이면에 가상(세계의 이미지)과 실제(세계 자체)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나아가 미디어의 등장으로 촉발된 가상현실인식과 그 맥을 같이하며,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원본 없는 이미지가 무한 복제 재생산되고, 이에 따라 종래에는 가상이 실제를 대신하기에 이르는 가상현실에 대한 반응과 그 아날로그적 버전처럼 읽힌다.
변형캔버스와 우주란. 황성준은 근작에서 일종의 변형캔버스를 도입한다. 실상 변형캔버스는 작가의 전작에서도 시도된 적이 있지만(이를테면 각종 오브제를 차용해 캔버스로 그 표면을 감싼 작업), 근작에서는 의식적인 층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변형캔버스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쉬포르 쉬르파스(지지대와 지지체)에 연유한다. 그 표면에 특정의 이미지를 덧그리기 위한 바탕화면으로부터 캔버스를 해방시켜 캔버스 자체의 존재(성)에 주목하는 한편, 이로부터 캔버스 고유의 구조와 질감과 물성을 강조하고 극대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캔버스를 해방시키고 자기화하는가. 작가는 아마도 철판과 같은 사물을 세워 패널에 고정시킨 연후에, 전작에서처럼 그 표면을 캔버스 천으로 팽팽하게 당겨 감싼다. 사물과 캔버스가 한 몸으로 일체화된 그 사물 오브제는 두드러져 보이는 날카로운 곡선의 각으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고, 캔버스 표면을 칼로 찢어 긴장감을 조성한(혹은 해소한?) 루치오 폰타나를 재해석한 것 같다. 모르긴 해도 폰타나는 캔버스를 아예 찢어버림으로써 고조된 긴장감을 해소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캔버스 표면이 찢어지기 직전이야말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상태가 아닐까.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정점의 상태를 보여주며, 이는 그대로 근작의 주제인 「Pause」곧 일시적 중지, 휴지상태와도 통한다. 즉 캔버스가 터지기 직전의 상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 가능성이 현실화하기 직전의 상태, 그 속에 카오스를 품고 있는 코스모스, 바로 정중동의 개념을 표상한 것이다. 형식적으로 이 사물 오브제는 이처럼 팽팽한 극적 긴장감과 함께 심플한 구조가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킨다(아마도 후기 미니멀리즘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그리고 금과 은과 동 성분의 박을 일일이 덧붙여 마감한 표면질감이 캔버스를 티타늄과 같은 금속성의 차갑고도 단단한 소재로 그 물성을 변환시켜놓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마찬가지로 사물의 물성에 대한 변환에 기초한 연금술에 대한 공감이 엿보인다. 전작에서의 나무 구조물 작업에 이어 또 다시 실제에 대한 속임 현상이 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의식적인 속임 행위 내지 현상은 사실은 실제와 실제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현상학적 인식에 대한 공감을 표현한 것이며, 그 자체가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 전략과도 통한다. 이와 함께 근작에는 알이 등장하는데, 바로 징(Zing)이다. 대략 웅성거림, 힘, 희망을 의미하는(그 의미 역시 미처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겨냥한 정중동의 주제의식과 통한다) 징은 작가의 작업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왔는데, 그동안 새로운 천년시대가 시작되는 현장을 지켜보기도 하고, 다양한 생활사의 현장 속으로 여행하면서 인간사의 면면들을 엿보기도 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징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아마도 부화되지 않음으로 인해 오히려 미처 실현되지 않은 어떤 가능성과 잠재력(아마도 희망)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일이야말로 징의 존재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때 징이 상기시켜주는 잠재력이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이다. 징은 말하자면 생명의 메신저인 것이다. 일련의 변형캔버스 작업과 마찬가지로 티타늄의 금속성 표면질감이 우주란으로서의 존재의미를 강화한다. 즉 징은 태고의 생명과 함께 미처 도래하지 않은 미래마저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091010c | 황성준展 / HWANGSUNGJOON / 黃成俊 / painting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