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_유진규네 몸짓 주관_유진규네 몸짓/서울변방연극제사무국 후원_서울시_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사)춘천마임축제
구성연출_유진규 비디오설치_신진식 음악_정순도 조명_용선중 설치설계_유동규 설치운영_김종학_강대선_김영우 기획_임인자 전시운영_허은영_이다인
관람시간 / 10:00am~07:00pm 10월7일_05:00pm~07:00pm / 10월13일_10:00am~12: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유진규는 '마임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유진규의 빨간방』은 1979년 발표한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1998년 발표한 『빈손』 이후 자신의 작업세계를 완전히 뒤바꾸는 새로운 개념의 공연이다. 이 작품은 2008년 12월 29일부터 2009년 1월 28일까지 춘천의 '미공간 봄'에서 초연되었다 유진규는 다시 시작한다. '마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임이스트로서 자신을 둘러싼 서구로부터 수입된 '마임'에 대한 개념과 인식 그리고 지금까지 발표해왔던 자신의 작품과의 이중적 이미지 사이의 괴리감을 향해 던지는 유진규식 화두이다. ● 마임은 몸의 표현이며, 몸의 재현과 내면의 발현과 인식이 '기관없는 신체'처럼 드러났다가도 극의 구조안의 몸의 발현이 아닌 몸안의 드라마를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내밀하게 몸으로 던진다. 유진규는 『빈손』처럼 없음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한국 땅의 기운을 받은 몸의 양식으로 표출하면서 내면의 맥락이 발화하는 몸을 이미지로 전달하기도 하고, 『있다!?없다!?』에서 처럼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극한 감정의 상태를 처연한 재현방식으로 두 손가락을 딱딱 부딪히며 관객에게 총질로 쏴대기도 한다. ● 『유진규의 빨간방』에서 유진규는 공연 개념의 프레임에 대해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표면상 개념을 바꾸어보려는 시도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공연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몸으로 발화한다는 것에 대한 작가로서의 재질문이기도 하다. 유진규는 새롭게 공연의 3요소의 제도적 개념들을 재정의 한다. 공연에서 모든 요소를 제외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공연예술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의 질서를 해체해 보는 것이다. 즉, 공연주체로서의 몸에 대한 새로운 정의, 관객의 새로운 관람형태, 물리적 몸이 공연장과 자유롭게 만나는 감각으로서의 참여형태, 극장이라는 기존 공연공간이 가진 제약을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유진규는 극장이 아닌 전시장을 공연의 공간으로 택했고, 새로운 작업방식에 대한 계속된 고민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 프레임의 변화는 감각에 대한 전이를 안겨준다. 특히 현존하는 공간과 시간사이의 관객과의 물리적, 제도적 거리와 참여의 방식이 그러하다. 이때의 참여는 관객의 몸이 공연에 섞이는 참여가 아닌, 관객의 몸이 닿는 감각에 대한 참여이다. 유진규는 이러한 과정에 "빨간방"이라는 색의 개념을 조합하였다. 앞으로도 '까만방', '하얀방', '노란방', '파란방'으로 1년에 한편씩 공연을 발표한다고 한다. 유진규에게 색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빈손」에서 처럼 '무(無)'라는 의식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색'은 존재하지 않는가? 색은 기호이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고, 구조이기도 하다. 이 구조 안의 감각들을 유진규는 전시장을 온통 '빨간색'으로 전환시키면서 관객들의 감각에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이제껏 '표현하는 몸'으로서 존재해왔던 유진규가 표현을 던지고 '관객들의 몸'에 말걸기를 시작하는 것이며, 자신이 표출해 왔던 '마임'에 대한 프레임을 다시 화두로 삼는 것이기도 하다. 『빨간방』은 그 질문의 첫 걸음이다. 『유진규의 빨간방』을 공연장이 아닌 전시장이라는 또 다른 제도에서 극성(劇性)과 조형성(造形性)을 결합하는 것으로만 바라봐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임인자
"공연은 왜 '극장'에서 '정해진 시간'에 '관객을 모아놓고'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 공연은 『공연자』 · 『관객』 · 『공간』의 3요소로 이루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예술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공연자들이 어떤 구성(작품)을 가지고 극장이라는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에 찾아온 관객들을 모아놓고 하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공연이란 꼭 위와 같은 형태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다시 "(근원적인) 공연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지금 행해지고 있는 공연에서 그것이 갖고 있는 형태만 빼버리면 근원적인 공연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본 공연의 3요소는 다음과 같다. 재 정의하는 공연의 3요소 ● a) 공연자 - 어떤 구성(작품)이 의도한 대로 보여지도록 행위를 하는 모든 것(사람일수도, 사람이 조작하는 설치나 다른 수단일 수도 있다)을 말한다. b) 관객 - 누구든 공간이나 시간이나 기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드나들고 머물면서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을 말한다. c) 공간 - 극장이든 그 어디이든 주어진 공간으로 늘 열려있으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왜 극장이 아니고 전시장인가? ●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공연의 방식과 형식은 그 정도로 됐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로운 형태로 관객과 교감해야 한다. 이러한 형식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스스로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동시에 장르의 규정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조건에 맞는 공간을 찾았는데 전시장이 적합하였다. 전시장은 극장보다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 공연자는 유진규 일수도, 설치물 일수도 있다. ● 『유진규의 빨간방』은 근원적인 '공연'의 행위를 찾아 회귀하는 작업이다. 준비된 관객은 없으며, 극장도 아니다. 즉 무대도 없다. 공연자는 유진규 일수도, 그가 만든 설치물 일수도 있다. '빨간방'은 혼자씩 만 입장이 가능하며 자신을 깨닫는 교감의 통로로서 공연은 이루어진다. 이것은 전시장의 전시를 사유하는 방식의 공연으로 '새로운 극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설치공연 『빨간방』의 원리들 ● a) 전시장 안을 은박 테입으로 가득 채운 것은 그 허상과 허구를 주어진 공간에 그대로 옮겨서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여기에 소리(음악)와 빛(조명)과 장치(설치)등이 추가되면서 그 허상과 허구를 더욱 실감나게 강조한다. b) 관객과의 교감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미로와 같은 공간에 홀로 놓여 있을 때 자기만의 공간이 되면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그래서 관객은 3분에 한 사람씩 입장하게 된다. 관객의 요구는 감상이겠지만 그것이 단순한 감상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을 만나게 되는 통로가 된다. c) 이 작업은 "새로운 개념의 공연"이다. 공연의 생명은 현장성이다. 전시나 영화와 달리 공연자는 몸 또는 다른 방법으로 가상현실을 실제상황으로 보여주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d) 관객은 빨간빛이 주는 시각적 효과와 소리가 주는 청각적 효과가 극대화된 은박 테입이 가득찬 공간에 홀로 있게 된다. 곳곳에 있는 설치물들을 지나면서 수없이 다면화되고 분절되고 통합되어가는 자신을 볼 것이다. e) 폐쇄된 공간에 홀로 있으면서 수없이 분리된 자신을 보게 되므로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는 사람은 사전에 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 자기분열증, 폐쇄공포증, 자폐증, 심약증 등 심신이 허약한 자
빨간방, 빨간색 ● 빨간방에서 빨간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아무 색깔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정말 아무 색도 없는 것일까. 그냥 공간일 뿐이고 빨간색일 뿐이다. 물론 개인에게 빨간색이 주는 정서적 느낌이 있겠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 빨간방을 다니면서 빨간색에 익숙해지지만, 곧 아무색도 아닌 색이 되어버릴 것이다. 앞으로 이 작업을 '까만방', '하얀방', '노란방', '파란방'으로 매년 한 작품씩 발표할 계획이다. ■ 유진규
마임, 그 이후 ● 유진규의 마임은 더 이상 마임이 아니다. 그는 마임을 그쳤다. 그 대신 온몸으로 마임 이상의 것을 말하려 한다. 설치미술과 퍼포먼스가 혼합된 확산된 개념의 마임. 그것을 마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신체로 인간의 근원적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려는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나 관객이 스스로 느끼고 행위하는 소통과 교감의 장을 펼쳤다. 그는 기존의 일방적 소통의 맥락에서 벗어나 상호작용적(interactive) 몸의 미학을 선보이고 한다. 3분 간격으로 전시장에 입장한 관객들은 눈 앞에 펼쳐진 은박지의 물결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미로를 찾아나선다. 5개로 구분된 전시장은 각기 서로 다른 환경으로 구성돼 있다. 컴컴한 유리판으로 둘러싸인 방에는 헤드폰이 준비돼 있는데, 관객이 그것을 머리에 쓰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유리창 너머로는 손전등을 얼굴에 비춘 행위자의 모습이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방의 천정에는 수많은 칼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방의 시츄에이션은 관객들에게 존재의 근원적 질문들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윽고 관객들은 맨 끝방에서 작가를 만나게 된다. 마임이스트로 익숙하게 봐왔던 유진규가 바로 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행위를 하지 않는다. 상체의 맨살을 드러낸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는 모습이다. 관객이 어색해 하면 그가 말을 건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추구해 온 신체를 통한 표현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일상으로 복귀한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무엇보다 작품이 발표되는 전시장이 일상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가. 그는 지난 30년에 걸친 긴 예술의 여정에서 과연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는 몸의 표현을 그치고 그 몫을 관객에서 떠넘긴 것일까. 그는 과연 그동안 자신을 옥죘던 허물을 완전히 벗은 것을까. 그래서 그 필생의 화두로부터 자유로와진 것일까. 다음 발표가 기대된다. ■ 윤진섭
미술의 외피를 빌려 연극의 영혼을 담다-전시장에서 공연된 유진규의 『빨간 방』에 부쳐 ● 『유진규의 빨간방』은 2차원의 평면에서 현실세계를 묘사하는 미술과 3차원의 공간에서 재현하는 공연이 서로 만났을 때 나타나는 묘한 결과물이었다. 종종 미술가들이 공연요소를 빌려 퍼포먼스를 하지만 무대미술가가 아닌 연기자에 의해 조형적 언어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을 기억하는 이유다.(월간 한국연극, 2009년 2월호, 발췌) ■ 김중효
Installation Performance JIN GYU YU's Red Room
INSA ARTS CENTER
Director, Performer_ Jin Gyu YU Video Installation_Jin Sik SHIN Music_Sundo CHUNG Light_Sun Jung YOUNG Design Display_Dong Gyu YU Photo_Sang Hak LEE Curator_Inza Lim
SUPPORTED BY Seoul metropolitan City, Seoul Cultural Foundation, Korea Arts Council
Vol.20091007g | 유진규展 / JIN GYU YU / 柳鎭奎 / installation.perform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