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1009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그문화_SPACE OF ART, ETC.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0-22번지 2층 Tel. +82.2.3142.1429 www.artetc.org
몰라도 좋은 이유 ● 모르는 것을 좋아할 수 있을까? ● 그럴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도깨비), 싫어하거나(공산주의), 숭배하는(신) 사람도 있는데 모르는 것을 좋아하는 게 뭐 어렵겠는가? 그래서 미술책 몇 권 번역한 게 고작인 내가 미술을 좋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 문외한임에도 이렇게 전문 작가 두 사람의 전시회에 감히 서문을 붙일 수 있는 것도 후안무치한 일이 아니다. ● 굳이 변명하자면, 아무리 전문 작가라 해도 감상자가 필요한 법이다.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소통이듯이 화가의 모든 그림도 소통이다. 소통을 상업성과의 타협쯤으로 여기고 절대로 소통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부르짖는 화가라면 자기 일기장에나 그림을 그릴 일이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창작자에게서 분리되어 감상자의 판단과 안목에 맡겨진다. 더욱이 감상자는 작품을 창작자의 의도대로 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르게 독해할 수도 있다. 이 점은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 건축, 문학 등 다른 예술 분야에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또 내가 선의의 감상자로서 두 화가의 전시회에 이런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좋은 변명이 된다.
김지원은 중견 작가이고 차혜림은 신예 작가다. 내가 알기로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고, 아직 서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될 만큼 두터운 관계를 쌓은 사이도 아니다. 사실 두 사람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 별로 닮지도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충분히 '함께 어울려 춤을 출 수 있는'(Shall we dance) 사이다. ● 김지원은 다양한 그림을 그린다. 큰 그림은 주로 유화다. 그런데 여느 유화와 달리 그의 작품은 독특하다. 직접 가꾼 맨드라미를 화폭에 담은 그 작품들은 유화라기보다 수채화 같은 느낌이 들며, 전통적인 장르로 말하면 풍경화에 속하겠지만 실은 맨드라미를 주인공으로 하는 초상화처럼 보인다(인물이 없는 초상화라니!). 수채화 같은 유화와 풍경화 같은 초상화.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매체와 장르를 무상히 넘나든다.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 또한 자유롭다. ● 작은 그림으로 갈수록 자유로움은 반대로 더욱 커지며, 거기다 재미까지 더해진다. 그는 놀랍게도 맨 종이에 볼펜으로 그리고, 과슈로 색칠을 한다. 배 위에 비행기가 얹혀 있다든가 켄타우로스처럼 비행기의 하체가 인간인 모습에서는 다소 엽기적인 느낌도 난다. 노련함을 갖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신선한 발상들이 살아 움직이나 보다.
엽기적인 면에서라면 차혜림도 선배 작가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물, 소품은 묘사가 치밀하고 세밀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인물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늘 뭔가 일을 하는 중이다. 천을 들고 있거나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 몸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모두 진지한 표정이다. ● 그런데 묘하게도 '접합'이 부재하다. 천을 든 곁에서는 누가 행글라이딩을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사람 곁에는 나팔을 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이 맨발로 걷고 있는 작은 무대의 배경은 터무니없게도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장면이다. 게다가 인물들의 얼굴은 앞모습이 거의 없고 기껏해야 옆모습과 뒷모습만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아니면 무참히 캔버스에 의해 잘려나가 있다. 여기에 비현실적인 조명이 비춰져 있어 어찌 보면 모든 상황이 연극적이다. ● 이쯤 되면 미술에 문외한이라도 두 화가의 공통점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다. 김지원과 차혜림은 발상과 그 발상을 구현하는 방식이 무척 자유롭다. 현실에서도 자유롭지만 작품에서 더 큰 자유를 꿈꾼다. 그러니 맨드라미 초상화를 그리든 배와 비행기가 합체하든 아무 상관도 없다. 캥거루의 주머니에 사람이 들어 있고 개가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따지고 보면 해 아래 새것은 없다. 깊은 의미에서 창작은 불가능하다. 문필가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문법과 어휘를 사용해 글을 쓰고, 음악가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화음과 조성으로 작곡을 하고, 미술가는 자신이 발명하지 않은 화구와 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창작의 근원적 한계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마당이 된다. ● 모르는 것을 좋아할 수 있을까? 자유는 몰라도 좋아할 수 있다. 자유를 추구하는 미술은 알지 못해도 매력을 풍긴다. ■ 남경태
붉은 낮잠. 사람들은 막 저녁이 되기 전 불그스레해진 하늘 아래서 잠자는 것을 붉은 낮잠이라고 한다. 그 잠은 현실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의지도 생각도 없이 빠져드는 잠이기도 하고, 깊은 상실감으로 기나긴 낮 동안 쉼 없이 눈물 흘리다 시나브로 빠져드는 잠이기도 하다. 고로 붉은 낮잠에 달콤한 꿈은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머무는 동안 현재의 고통은 잠시 자리를 비우므로 그만큼 고마운 잠도 없다. 붉은 낮잠이 점유하는 시간은 마치 일상의 진공상태처럼 생소하며, 그 세계는 현실도 이데아도 아닌 제3의 세계와 같다.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디쯤에 있는 연옥처럼 고요하지만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살포시 몸을 떨게 만드는 그런 세계 말이다. ● 작가 김지원이 그리는 맨드라미의 빛깔은 붉은 핏빛이다. 그 식물은 서늘한 두려움을 뿜어내기도 하고, 지독한 나른함을 발산하기도 한다. 공격적이면서 남성적인 그리고 관능적이면서 육감적인 그 식물의 성질은 붉은 색의 그것과도 닮았다. 한때 붉은 색은 프롤레타리아의 거친 투쟁을 드러내주기도 했고, 이데올로기의 예민한 상징이 되기도 했다. 또 그 색은 우리를 흥분시키거나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 투우장의 소는 사실 흥분하지 않는다. 붉은 천 앞에서 소가 거칠게 변할 거라 믿는 사람들이 사실 그 붉음에 흥분하는 것일 뿐. ● 또 김지원의 작품에서 중요한 대상으로 등장하는 맨드라미는 두개골을 깨고 나온 뇌와 닮아 있다. 화가가 어떤 대상을 수용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배출하는 여타의 과정들. 그 기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관여하는 것이 바로 뇌다. 각막에 맺힌 상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손을 통해 구현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주체가 바로 그 선홍색의 구불구불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고로 김지원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인식과 표현의 주체가 또한 대상이 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시각적 메타포의 장치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이렇듯 인식과 변형이 가능한 내면의 세계와 만날 수 있다. 그 세계는 다름 아닌 붉은 낮잠의 세계와 같은 제3의 세계다.
차혜림은 한 공간에 여러 개체를 집합시킨다. 각각의 세계에서 정당하고 나름 의미 있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한 데 모여 있을 때, 그 장면이 내뿜는 기운은 매우 '비현실적'이며 매우 '부조리'하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볼 때, 이렇듯 목적과 의지가 다른 누군가와 한 곳에 운집해 있는 상황은 매우 실재적이며 매우 일상적이기도 하다. 타자와 공존을 시작할 때, 그 어떠한 현실의 장소도 차혜림이 보여주는 무대처럼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부조리와 환상의 근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실에 있다. 근본적으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아무리 사랑하며 공유해도 둘은 한 공간에서 두 개의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다. 차혜림의 작품 속에는 이처럼 숙명적인 분리를 선고 받은 개체들의 모호하며 불안한 다중의 관계가 평등하고 명확하게 나열되어 있다. 이렇듯 객관적인 시선으로 정제된 여러 관계를 늘어놓으면서 발생하는 효과는 매우 강렬하다. 주체에 집중된 하나의 사건 혹은 관계가 아닌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은 다양한 것들이 머물면서 완성되는 작품은 한편 강한 '몽롱함'에 휘말리게 하고, 다른 한편 '나' 안의 침잠을 멈추고 '나'를 둘러싼 전체를 응시할 계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 차혜림은 여전히 가장 근대적인 회화 장치인 사각 캔버스를 사용한다. 하지만 또한 그녀의 작품에서 하나의 소실점으로 집중되는 근대의 위대한 회화 장치는 소멸된다. 사실 다면적이고 복잡한 우리 삶을 그 무엇 하나에 집중하여 바라보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설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컨텐츠와 메소드의 차이로 완성된 차혜림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부조리극은 몽환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바로 현실의 고단함과 버거움을 버릴 수 있는 기회다. 본인의 세계에서 나름의 이유와 명분을 획득하며 사는 사람들. 본래부터 갖고 있던 혼자만의 공간을 이탈하여 새로운 세계로 편입될 때, 그들은 비로소 평온하고 고요한 일탈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붉은 낮잠의 그것처럼 말이다. 또 이는 한여름 붉은 태양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붉은 맨드라미 무리가 주는 나른함과도 같다. ● 이렇듯 두 작가가 '그문화'에서 추는 춤은 '붉은 낮잠'을 연상시킨다. 불그스레해진 하늘 아래서 자는 잠, 현실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의지도 생각도 없이 빠져드는 잠, 깊은 상실감으로 기나긴 낮 동안 쉼 없이 눈물 흘리다 시나브로 빠져드는 잠. 하지만 자고 나면 생의 피곤함이 그 무게를 덜어내는 잠. 우리는 'shall we dance'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과물인 '붉은 낮잠'에서 한 시대에 공존하는 두 작가 김지원과 차혜림의 작업을 통해 작업의 대상을 다루는 방식과 관조하는 방식,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과정 등을 조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제공하는 그 길고 느슨한 잠 속에서 스스로 위무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 김지혜
Vol.20091004a | shall we dance_붉은 낮잠-김지원_차혜림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