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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0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미루 GANAART CENTER MIRU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가나아트센터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眞我를 찾아가는 물의 여정, 류준화 ● 류준화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시나브로 나이가 어려져 갔다. 십여년 전에는 집에 붙박이인 「집사람」들을 그리더니 이후엔 촌에 붙박이인 「바람을 맞는 소녀」들을 그렸다. 그리고도 하염없이 어려져 가더니 근자에는 삼등신 꼬마까지 등장했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작가의 내면 아이가 성장을 멈춘 그 지점까지 아래로 아래로 잠영해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아이는 억압되었던 금기를 풀어내고 거칠 것 없는 자기 정체성을 만날 때까지 고집스런 역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두 해전 개인전에서 제 몸을 새에게 떼어 내주면서 새를 타고 고공비행 탈주했던 소녀를 기억한다. 소녀는 죽음의 경계마저 넘어 비의(悲意)를 얻어내고, 혹은 생명수를 구하고 귀환한다. 그 때 우리는 돌아온 바리데기같은 수호여신의 탄생을 예감했다. 이후 소녀들의 행방이 궁금하던 나는 작가의 작업실에 들어서며 탄성이 새나가려는 것을 누르고 있었다. 작업실 가득 고인 물이 흥건하게 쏟아져 내릴 듯 했고 거기엔 물에서 나서, 물에서 놀고, 물에서 낳는 소녀 만신들이 떼로 모여 유영하고 있었다.
내공 깊은 소녀 만신 ● 그들은 어디서 왔을까. 얼굴 모습은 아닌 게 아니라 고대 여신을 닮아있다. 확인 삼아 펼쳐본 그리스 조각 헬레나-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치명적 미모-의 옆 얼굴선과 비교해보니 이마로부터 코, 인중으로 이어지는 실루엣이 거의 일치한다. 코가 조금 내려앉고 인중이 약간 늘어났을 뿐 틀림없는 여신 계보 프로필이다. 큰머리 나신은 여전히 아이의 것처럼 우화적이지만 이승의 시계(視界) 너머를 응시하는 듯한 눈빛과 다문 입술은 내공 깊은 만신을 떠올리게 한다. ● 몽실 언니 같던 복고풍 단발머리가 발치까지 길게 자라 물의 관능처럼 풀려 흐른다. 지난 해, 그가 발표했던 「문자도」는 유교의 기본 덕목을 쓴 한자 획 부분을 소녀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으로 대체했는데 여성의 신체로 윤리 강령을 전복하는 쾌감을 주었다. 작가가 긴 머리 여성을 그리는 이유는 두 가지, 관능성과 공포 때문이라고 한다. 긴 머리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이지만 긴 머리 없는 귀신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오소소 두려움을 일으킨다. 물결이기도 하고 구름문양 같기도 한 비현실적 여울에 잠겨 붉은 아기를 안고 있거나 흘러내리는 빈사의 새를 안고 있는 거대한 모성적 아이는 시인 김혜순이 말하는 '처녀'들과 한 자매일 것 같다. 처녀는 언제나 출생의 자리로 돌아오는 존재를 일컫는 말로, 그들은 출산하고 어머니가 되었으면서도 언제나 처음 그 자리, 처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中에서) 류준화의 그림 속에서 어머니도 지나고 죽음도 건너온 이 오래된 처녀들은 생명의 탄생을 점지하고 돌보는 삼신할미가 되기도 하면서 종횡무진한다.
긴 물의 여정 ● 류준화의 물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작가는 투명함을 좋아한다. 맑게 그리고 그림이 완성되면 레진으로 마감해서 화면이 반짝인다.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펼쳐두면 마치 샘이 고인 듯하다고. 작업 과정은 마치 회벽 위에 물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것처럼 지난한 과정이다. 캔버스에 석회를 바르고 곱게 갈아낸 뒤, 파스텔 가루가 침윤되도록 물을 먹인다. 그 위에 물에 갠 아크릴을 얇게 바르고 다시 갈아내고... 그는 오래 물을 그려오기도 했다. 이전 작품들을 보면 임계점을 지나 터져버린 감정들을 물로 흘렸던 것 같다. 두 팔을 들고 비상하려는 여인의 겨드랑이에서 흘러내리던 물은 좌절의 예감이었고, 물에 잠겨 넋을 놓은 인물들에겐 우울의 매제(媒劑)였다. 물동이에서 질질 흐르던 검은 물에서는 분노의 분출을 보았다. 그들은 물에 갇히고 익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물은 동시에 탈출의 징후를 보였다. 경계를 넘을 수 없다면 차라리 번진다. 「그녀의 침묵」(번진 구멍 몇 개만으로 그려진 여성의 얼굴 연작들)을 기억해 보면 그녀들은 번짐으로 경계를 흐리고 위반하고 새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비록 그 속도는 한걸음 내딛고 엎드려 무너지는 오체투지와 같을지라도 기어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드디어 물길을 만나고 몸을 물에 실어 물을 논다. 참으로 십여년 흘러온 물의 대장정이다.
몸, 물의 환유 ● 바다로부터 생겨난 생명은 바닷물을 몸에 담고 땅으로 올라왔다. 우리 몸 안에 바다가 있다. 뱃속의 아기를 보호하는 양수처럼 해수가 우리 세포를 보호하고 있다. 노화는 우리 몸의 물이 줄어드는 것이고 죽음은 몸의 물이 다 마른 상태일 것이다. 물 없이는 생명도 없다. 바다 물거품에서 생겨난 아프로디테를 섬기듯 우리 신앙 속에도 물 할미를 섬긴 흔적들이 있다. 고구려 동명왕을 낳은 유화부인은 웅심연(熊心淵) 연못에서 나왔고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도 알영정(閼英井) 우물에서 나왔다. 약수나 정화수 (井華水)를 뜨고 절을 하는 이유도 물의 신성을 모시는 때문이다. 류준화의 작품에서 여성의 몸은 물의 생명성과 신성의 환유다. 고정되고 딱딱한 것들 사이에서 아팠을까. 마른 땅에서 시련을 겪었을까. 흘러야 사는 여자, 본디 수생이던 여자는 지상의 의무를 사느라 퇴화했던 「비늘 날개」를 되찾아 귀향한다. 힘찬 부챗살처럼 싱싱하게 펼쳐진 지느러미를 떨며 물로 돌아가 물이 되었을까. 돌아앉은 여인의 몸에 물고기가 살고 물의 마음같은 연꽃이 핀다. 작가는 이 모습을 수중 분만 중인 산모의 이미지에서 빌어 왔다. 가만 들여다보자면 곳곳에 패이고 갈린 물의 상처들이 만져질 듯하다. 머리카락 뒤, 수렁 같은 어둠에 오래 눈이 간다. 화면 전체를 장악하는 어둠 저 끝은 무엇일까. 아득한 너머 모든 것이 비롯된 곳일지도... 어미들은 안다.
죽음 같은 고통의 산도를 지나지 않고 어미로 날 수 없다는 걸. 죽음을 산 채로 건너 어미는 비로소 몸 안에 품었던 생명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태어난 아기, 그녀가 지극하게 안고 있는 아기는 어미의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다. 피는 일시적 죽음을 치루고 쏟아낸 세례수다. 하여 작품 속 붉은 아기는 모성의 페르소나일 수도 있겠다. 작가는 새 생명의 자리에 그 신성을 받든다. 너를 품었던 어미의 몸은 모든 너에게로 열린 몸이 된다. 어미의 몸은 '나지만 동시에 너'인 존재들의 열린 통로가 된다. 꽃피는 자궁(신체의 내면이자 동시에 현실 풍경이기도 한)으로부터 수많은 나/너들이 새를 품고 꽃을 안고 꼬물꼬물 태어난다. 그들 역시 또 다른 나/너의 흐르는 통로가 될 것이다. 그렇게 어미의 몸은 멈추지 않는 물길이 될 것이다.
꽃, 물에서 피다 ● 류준화의 꽃도 물로부터 왔다. 화면에 붉은 얼룩을 흘리던 작가는 그 흔적에서 우연히 꽃을 만났다고 했다. 그 때 꽃물은 폭력에 능욕된 처녀성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꽃의 이미지는 피해자에서 생존자의 상징으로 전이된다. 소녀는 제 몸의 피를 빨아들인 뒤 힘차게 다시 후우 불어서 마술 같은 날개 꽃을 틔워냈다. 등줄기로부터 야무지게 뻗어 나온 꽃은 그녀를 들어올려 높이 날도록 했었다. 이번 전시에서 꽃 이미지는 어느 때보다 전면적인 모티브로 쓰였다. 작가는 꽃그림의 황홀과 위험을 직면하려는가 보다. 물에 둥둥 떠오른 꽃들 사이로 소녀도 한 송이 피었다. 어머니의 양수같은 물에 몸을 맡기고 그 온기를 받아들이는 적요와 치유의 순간. 그 물에 뿌리내리고 흐느적이는 꽃줄기는 마치 탯줄처럼 붉은 생명도 자줏빛 욕망도 몽실몽실 틔워낸다. 작가는 꽃들 속에서 삶과 죽음의 혼융을 본다고 말한다. 피고 지는 일상의 상처들도... 흐드러진 꽃 강을 유영해가는 것은 시련과 열락의 물살들을 의연하게 헤엄쳐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게 죽고 다시 나기를 반복하며 눈부신 진아(眞我)를 찾는 여자들의 여정을 거대한 수호 여신들이 엄호하고 있다. 이 신화적인 부활의 행렬을 만개한 상여 꽃들이 장엄(莊嚴)하고 있다. 그들을 품고 흐르는 따뜻한 강은 말없이 여여 할 것이다. ■ 제미란
Vol.20091003g |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