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905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스페이스 함_space HaaM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37-2번지 렉서스빌딩 3층 Tel. +82.2.3475.9126 www.lexusprime.com
질료와 기억 ● 다 알다시피, 존재라는 단어가 있다. 한번 착용하면 여간해서 벗어 던지기 힘든 옷이다. 어떤 이들은 그 옷을 덧입거나 자꾸 벗어 던지려 한다. 한 움큼의 시선들로부터 자신을 가리고 싶어 하거나 모든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일 게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예술을 한다고들 한다. 하긴, 오늘날, 이십 세기 이후에 예술은 아주 헐거워져서 너무나 가벼워졌다. 너무 무거워진 존재를 따라가지 못하고 공중에 붕 뜨고 말아서일 게다. 그래서 현재, 이십세기의 피부를 가진 채 이십일 세기의 어정쩡한 공기층에 놓인 창작가들은 이 교묘한 중간 지대를 헤맨다. 존재와 예술의 벌어진 사이 말이다. 어쩌면 그 때문일까. 우리가 자꾸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는 이유가, 자꾸 작업하는 행위에서 의미가 감지되는 이유가… 다 알다시피, 우리는 움직이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움직임의 심연을 기록하고 포착하려 애를 쓰는 것, 그것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것은 우리들뿐이다. 게다가, 우리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재현'의 오랜 과정과 씨름하면서 이 움직임이 곧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들 시간의 골을 들여다본다. 뇌 마냥, 깊거나 투박하거나 여하 간에 징그럽게 불쑥불쑥 튀어나와 구불진 그 시간의 굴곡들을... 그러고 보면 그 때문일까. 우리가 그 시간을 한 입에 베어 물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는 기억이라고 부른다. 다 알다시피, 그리고 다 알다시피, 우리는 이 기억을 그린다. 우리에게 이미지란 무기이면서 동시에 존재와 실체의 간극을 깨닫게 하는 절망이다. 이 절망의 늪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예술을 하며,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이미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미지로 보여주려 한다, 이미지를 해체하려 한다, 그럼에도 이미지는 남는다! 이제 이 사람들을 이야기하자.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토대가 있다. 기억들... 단어를 구분하자, 추억이 아니다. 과거가 아니라 남겨진, 기록된 것으로서의 기억들이다. 그래서, 벼를, 볏단을, 화분에 매립한 볏짚을 끈다. 그리고 꾸물꾸물한 기억의 벙커들로부터 그 이동은 시작된다. 이미 말을 했다. 그렇다고 추억은 아니라고. 왜냐하면, 이 '기억'이란 존재와 세상이 서로 거리를 두고 벌어져있는 증거품이며, 실체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쉽지 만은 않다. 괴롭기도 하다. 이 간극이 메울 수 없는 것인 줄은 잘 알지만 그래도 욕망은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꾸 주워 담고, 핸드백에 채운다. 하지만, 기억은 물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사진에 정착해있지만 헤헤, 그것은 기억의 잔존에 불과하다. 사진과 사진이 보여주는 이미지들, 그것을 바라보고 욕망하는 사람/여자의 의식 안에서는 끊임없이 부유하는 게 기억이다. 덧없이 흩어지는 사물들, 그리고 기억들... 그와 함께 드러나는 얼굴들…
아마, 내 몸까지도... 이 몸에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래서 자른다, 보관한다. 시간이 베어들어 있을 이 긴 머리카락을... 하지만 그것 역시 표상의 하나일 뿐이다. 꿈틀꿈틀 기어가는 기억의 표상. 다른 미상의 시간, 한쪽 창에는 밤이 떠있고, 다른 창에는 한 낮이 이어지는 그런 이미 그것이 살아온 세상과는 다른 미상의 시간 안으로 미끄러지는 표상, 마치 문지르면 떨어지는 기억의 때처럼 말이다. 시간은 그렇게, 기억들은 그렇게 제멋대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미상의 시간 안에 놓여 그 의식의 공동구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아뿔싸,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서로 다른 시간은 하나의 공간에 놓인 하나의 육체를 해체해버린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착시킨다. 왜냐하면, 이 주어진 메커니즘의 시간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어쩌면 공간을 다른 시간 축으로 재배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하나하나 분할되고, 공중에,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것을하게 비트는 유리 사이에서 하나의 선으로 나타나고, 그러나 우리는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이미지란 원래 그려지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공간의 재배열이라고 했다. 단순하게 전시장을 배치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재배열하고, 따라서 그 안에서 시간까지도 재배열된다. 이미지는 하나씩 조각나고 다른 위치, 결국에는 처음 조각을 볼 때와는 다른 시간대에서 하나로 뭉쳐진다. 그런데... 아, 거기 밑으로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강아지일까? 음부일까? 성기일까? 눈일까? 결국에는 그렇지 않은가? 눈을 수없이 분할하는 이유, 수없이 재구성하는 이유, 시선의 재배열, 시선이 간직하는 기억의 재배열, 공간의 재구성...
브라운관, 거기는 이미지가 있을 곳이다. 우리는 기대하고 그 앞에 선다. 어쩌면 저기 카메라가 우리를 포착할까? 하지만,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이다. 그림자, 브라운관의 곡선에 따라 왜곡되고 흐물흐물하게 흐르는, 그리고 비쳤는가 생각되면 조금 몸을 움직이는 순간, 사라지는... 우리 몸과 기억, 시간, 공간, 그래, 존재는 그렇다. 이처럼 스스로에게 불명확하게 포착된다.
이들은 다 알다시피, 서로 연속된 의식을 만들어내려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들이 속한 이 세계와 그 시간 안에서 묘한 공통된 토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존재의 하염없는 무게를 벼로 시작해서 브라운관으로 끝을 맺는다. 아, 그러고 보면, 결국에 이들의 공통된 또 다른 토대 하나는 정말이지 중요한 지점인데, 바로 질료이다. 가만히 보라. 이들은 모두 질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벼가 무엇이지? 뱀은? 그리고 이 여인은? 이 드로잉은, 개미는? 소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만져지는, 꺼끌꺼끌한 이 세상, 질료, 매체, 그것들을 관통하는 그들 작업의 문제이다. 그것은 결국에는 '우리'를 드러낸다. 각자가 자기의 방식으로 세상의 '우리'를… 다 알다시피 우리 존재는 불투명하다. ■ 김성태
Vol.20090919b | SUGGESTIVE MOMENT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