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_국립현대미술관
전시설명회_평일 2시, 4시 / 주말 12시, 2시, 4시
관람시간 3월~10월 / 평일_10:00am~06:00pm / 주말_10:00am~09:00pm 월요일 휴관
국립현대미술관 제7전시실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산58-1번지 Tel. +82.2.2188.6000 www.moca.go.kr
국립현대미술관은 9월 11일부터 10월 25일까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이병용 유작』展을 개최한다. 이병용(1948~2001)은 1970년대 초 전위그룹 '에스프리'를 비롯해 다수의 아방가르드적인 단체에 참여하는 등 현대미술의 흐름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70년대 말 미국 이민으로 인해 한국미술계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작가이다. ● 이번 전시는 그가 1978년 뉴욕으로 이주한 이후부터 2001년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특히 이병용은 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에서 자신의 조형세계를 되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 드로잉 형식으로 제작한 「의자」시리즈를 시작으로 「고추」, 「알」, 「삶」시리즈 등을 연이어 발표해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구상과 추상 등의 접목을 시도한 현대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했다. 이후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 이번 전시는 한국을 떠나 뉴욕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1978년부터 생을 마감한 2001년까지의 회화, 드로잉 작품 50여점을 선보인다. 제 7전시실에서 개최되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 본 전시는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NEW YORK_1978-1986』은 뉴욕 이주 초기의 작품인 '의자', 옷걸이', '배'연작들로 구성되며, 2부『NEW YORK_1987-1994』는 프랫 대학원을 수료하고 본격적인 뉴욕생활에 접어드는 시기의 작품인 「고추」, 「알」연작으로 구성된다. 3부『HAWAII 1995~2005』는 문명세계를 떠나 섬에 정착하며 새로운 환경에서 작업한 「삶」, 「흙과 더불어」, 「모퉁이 돌' 등의 말기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 개막식은 오는 10일(목) 오후 5시 제 7전시실에서 진행되며, 전시 기간 중 관람객의 이해와 감상을 돕고자 작품설명회가 평일 오후 2시, 4시, 주말 오후 2시, 4시, 7시에 운영 된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www.moca.go.kr 혹은 02)2188-6000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의 여정, 그의 열정, 그의 예술 ● 1. 1972년. 대학교 4학년생이었던 이병용은 '에스프리(esprit)'의 창립멤버로 미술계에 등단한다. 당시 한국화단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를 생산했던 아방가르드 흐름에 동참한 것으로 지금 생각하면 나이에 비해 데뷔가 무척 빨랐던 것이다. 졸업 후 이병용은 『에스프리』展(4회 참여), 『20대 현대작가』展(2회 참여), 『앙데팡당』展(6회 참여)을 통해 현대미술 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인간과 물질'이란 테마로 실험적 작품을 발표했다. (1976년 5월 서울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그리고 30세가 되던 1978년 돌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바로 결혼한 직후였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 곳에서 오랫동안 정착한 적도 없었다. ● 1948년 지리산 청학동 근처의 산골에서 태어난 이병용은 5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더불어 집안이 가업으로 한지를 만들었다. 이런 배경은 사상적으로나 재료적으로나 그의 미술인생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이병용은 이후 중학교는 하동 읍내, 고등학교는 부산,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이처럼 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더 서구화된 도시로 이주하였고, 마침내 그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뉴욕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 것에 대해, 1976년 '앙데팡당전 작품 철거 사건'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근본적으론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갈망이 그를 뉴욕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뉴욕에 간 건 밖을 알기 위해서였지, 나를 잊어버리려고 나간 건 결코 아니다. 나를 찾는 작업, 말하자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다." (이병용, 1991년) 2. ● 미국 도착 3년 동안 전혀 작품에 손대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이병용은 뉴욕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세계적이고 모든 것이 공존하는 뉴욕에서, 마이너러티 중에서도 마이너러티인 한국 작가로서 자신의 독창성을 예술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이병용, 1984년)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의 작업의 방향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약삭빠르게 상황을 대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병용은 더디게 가더라도 기본에 충실하고자 했다. 또한 어려운 경제 상황도 그에게는 큰 난관이었다. 이병용은 생활을 위해 낮에는 공사판 잡역부, 야채 가게 점원, 택시 드라이버, 식당 종업원 등의 일을 했고, 밤 시간을 쪼개어 창작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 이병용이 뉴욕에서 처음 한 작업은 드로잉 형식의 「의자(char)」연작이었다. 아마도 조형언어의 가장 기본 요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드로잉을 선택했을 것이다. 1981년 12월에 그린 「한 개의 의자」는 단순한 직선을 연결하여 의자를 구성했고, 그 주변에 표현주의적인 사선들을 그려 넣었다. 엄격한 기하학적 선들과 사람이 만들어낸 우연적 선들이 한 화면에 혼재한다. 1982년 작 「다섯 개의 의자」와 「두 개의 의자」에서 작가는 의자의 형태를 음각과 양각의 형태로 제시하였고, 검은 종이에 흰 선을 사용하거나 흰 종이에 검은 선을 사용함으로써 흑백의 대조를 극대화하였다. 1982년 이병용은 뉴욕 프랫 그래픽 센터에서 판화를 연구하던 중이었고, 필연적으로 판화의 매체적 특성이 작품에 반영되었다. ● 이후 의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 경향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한 개의 의자 - 한계상황」은 이병용이 과거에 진행했던 실험 작업 「한계상황」과 연결될 수 있다. 1970년대 한국의 답답한 사회현실을 투영하듯 이병용은 운동장에 커다란 원을 긋고 그것을 '한계상황'이라 불렀다. 뉴욕이라는 낯선 환경에 던져진 자신의 모습을 은유한듯하다. 이어진 「세계」에서 대다수의 의자는 왼쪽을 바라보지만, 오른쪽에 오직 한 의자만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달라진 가치관, 질서, 체제, 고정관념 등에 대한 작가적 고민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방향은 '선'에 대한 연구이다. 즉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탐색한다. 「한 개의 의자」에서 오른쪽 의자 옆의 다소 굵은 직선들은 어떤 형상을 지칭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라기 보다는 독자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 주변에 퍼져있는 곡선들은 무의식적인 흐름에 지배를 받은 것 같다. 그 굵은 선들과 구불거리는 선들은 「스프링과 철사」에선 보다 독립적으로 변모된다. 그는 그것을 스프링과 철사라고 불렀지만, 어떤 구체적인 사물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한 조형요소를 넘어 어떤 에너지를 가진 선으로 보인다. ● 시간이 지나 뉴욕생활에 익숙해지고 프랫 대학원을 다니면서 이병용은 독창적인 실험을 더욱더 심화시킨다. 1985년부터 작가는 작은 흑백 드로잉에서 벗어나 보다 큰 회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것은 「배(pear)」연작이다. 이 연작의 대부분에는 두 개의 배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양각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배를 묘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각의 이미지로 배를 묘사한 것이다. 그는 배 형상의 안과 밖에 무의식적 제스처가 돋보이는 선들을 배치하였고, 나아가 그 자유로운 붓질이 부각되고, 배경의 색면이 독자성을 얻으면서 그의 작업은 '회화(painting)' 연작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는 오히려 회화의 기본 조형언어에 집중한 것 같다.
3. 1990년 1월 이병용은 뉴욕 피닉스 갤러리(Phoenix Gallery)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1986년 프랫 대학원에서 졸업전시회를 가졌지만, 이 전시는 미국 상업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오랜 기간 동안의 실험과 탐구를 마무리하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미국 무대에 작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간 그의 실험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그동안 그가 진중하게 고민했던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 의식과 무의식, 물질과 정신, 현대와 원시 등의 여러 요소들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피닉스 갤러리에서 보여준 것은 「고추(pepper)」시리즈이다. 그는 뉴욕 이주 후 야채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추를 소재로 삼게 된 것이다. 물론 「배」연작도 마찬가지다. 이병용은 고추가 자신과 같은 한국인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과거 한국 사람들은 아들이 태어나면 고추를 걸었듯이 고추는 남성 혹은 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또한 고추는 두 다리 사이에 있는 남성의 생식기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작가는 이 두 다리를 동양과 서양의 문화에 비유하고 고추가 그 가교의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그의 고추들은 극사실의 매끈한 형상이 아니라 다소 표현적이고 서로 얽혀 있다. 이는 현대 문명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을 시사한다. "한국인인 나의 것을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동서양이 같은 공감대 위에 서야한다는 것이 나의 목표이며, 앞으로도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병용, 1990년) ● 1990년 이병용은 「고추」연작에 이어 「알(egg)」연작에 착수한다. '알' 연작은 다른 어떤 연작보다도 긴 7년 동안 지속되며, 「알」연작에서 본격적으로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갤러리 현대(1991년), 뉴욕 안드레 자레 갤러리(Andre Zarre Gallery, 1992년), 박영덕 화랑(1993년) 등에서 「알」연작을 보여주는 개인전을 개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당시 두 번의 개인전이 한국에서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이병용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병용하면 '알'을 떠올리게 된다. ● '고추'가 남성을 상징한다면, '알'은 여성을 상징한다. 알은 생명체의 근원이며 앞으로 펼쳐질 모든 것이 축적되어 있는 완성품이기도 하다. 비록 형태적으로 알이 매우 단순한 타원으로 표현되더라도, 그 안에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그 최소한의 상태의 미술이 서구적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어디까지나 물질적인(시각적) 차원인데 비해, 이병용은 정신적인 차원의 것이며, 최소한이 아닌 '원초적' 상태의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이일, 1991년) / "알은 실재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알이면서도 동시에 알이 아닌 것이다. 즉 실체와 관념의 표상으로서 알이다. 실체로서 알은 완만한 형태, 포만감의 완성체로 나타나지만, 관념으로서 알은 원형회귀로서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오광수, 1991년) 이와 같이 알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안드레 자레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1993년 1월호 전시리뷰에 다루어진다. "한국 현대회화의 밀도 있고 독특한 하나의 양상을 대변한다. ··· 절제된 단색조와 고도로 단순화된 주제의 반복성으로 특징지어 지며, 각 작품에서 보이는 기분 좋은 평정감은 왜 한국적 미니멀리즘이 자주 선(禪)과 연관되어지는가 하는 이유를 제시해 주고 있다." (Eleanor Heartney, 1993년) ●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진행된 「알」연작은 시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 번째 시기는 1990년부터 1991년으로 볼 수 있으며, 여기선 다시 네 가지 형태로 세분 된다. 첫째, 2-3개의 화면이 연결되어 하나의 타원을 이루는 것. 둘째, 한 화면에 하나의 알이 가운데 크게 나타나는 것. 셋째, 알의 형태가 일그러지면서 초승달 형태로 묘사된 것. 넷째, 화면에 알의 일부만 그려진 것. 이 시기의 「알」에서 그는 재료(한지)의 질감을 강조하고, 한지에 물감이 번지고 스며드는 효과에 주목하며, 여백의 의미를 되새기며, 알의 형태를 다양하게 변조한다. ● 1992년 들어 이병용의 「알」연작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레이어(layer)'와 '무작위성(random)'으로 요약된다. 흰색 물감이 많이 활용되어 화면은 그 이전 보다 한층 밝아지며, 그 위에 작은 곡선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그리고 화면을 자세히 보면 격자무늬의 수직·수평선을 찾을 수 있다. 그의 회화의 레이어를 정리하자면, 첫 번째 레이어는 한지이다. 한지는 특유의 작은 얼룩과 점이 있다. 무작위적인 무늬를 가진 셈이다. 두 번째 레이어는 한지 위에 알 모양을 그린 물감 층이다. 세 번째 레이어는 그 위에 흰색을 덧칠한 것이다. 네 번째 레이어는 흰색 물감에 음각의 형태로 선적인 이미지를 무작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완성된 형태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형태들이 서로 얽히게 되고, 알의 형태는 전면에 뚜렷이 드러나기 보다는 어렴풋이 드러나게 된다. 결국 알은 숨겨진 이미지(hidden image)로 변한다. ● 1995년부터 이병용의 '알'은 다시 한번 변모한다. 이전과 비슷한 레이어를 지니지만, 작은 선들의 색채가 풍부해지면서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는 1994년 하와이로의 이주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열대 지역 특유의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그의 그림에 반영된 듯 하다. 마지막으로 「알 B2-1」에는 수직·수평의 굵은 선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이후에 이어지는 「삶(life)」연작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4. 이병용은 1994년 8월 하와이 힐로(Hilo)로 이주한다. 하와이를 방문했던 사람에게도 힐로는 매우 생소한 지명인데, 힐로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오아후섬 혹은 마우이섬이 아닌 하와이섬(Island of Hawaii; 주로 Big Island 불림)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인구는 약 4만 명. 빅 아일랜드는 하와이 8개 섬 중 가장 큰 화산섬으로 면적은 제주도의 약 8배이다. 섬에는 4,000미터가 넘는 두개의 큰 활화산이 있으며, 동쪽은 비가 많은 반면, 서북쪽은 건조한 기후의 사막 지역이다. 이처럼 빅 아일랜드는 열대, 사막, 평지, 고산 등의 다채로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병용은 하와이로의 이주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문명세계를 떠나 섬에 정착하며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싶었다." (이병용, 1994년) 하와이 이주 이후 이병용의 작업은 문명세계를 떠나 자연 또는 정신세계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호흡하며, 말년에는 기독교에 심취하며 종교적 주제에 다가선다. ● 이병용이 하와이에서 새롭게 착수한 것은 「삶」시리즈였다. 1996년에 제작된 「삶」연작은 「알」연작의 3기와 유사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알의 형태는 사라지고 격자들 안에 기호 같은 붓질 혹은 색면이 자리하게 된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선, 형태, 색채 등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마치 복잡한 세상 속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 1997년부터 이병용은 또 다른 회화를 선보인다. 비록 제목은 그 이전 작업과 같은 「삶」이지만, 그 형태는 확연히 다르다. 힐로 한인회장을 맡은 이병용은 한인 이민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버려진 한인 공동묘지를 정리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한 그의 행보는 그의 예술작품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마치 묘비를 연상하게 하는 작업들이 나오게 된다. 그는 크고 대담한 붓질로 화면을 채웠는데, 그러다보니 붓질 자체가 부각되었고 여백의 비중도 늘어가게 되었다. "그의 회화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시각 체험이다. 그의 그림은 관람자가 실존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사고하게 하여, 사색, 명상, 자기성찰 등을 상기시킨다." (Carol Khewhok, 1998년) ● 힐로에서 이병용은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스스로 농부가 되어 생강농사를 짓게 된다.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과 더불어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그는 화산폭발로 생겨난 하와이의 붉은 토양에서 터득한 체험을 「흙과 더불어(with dust)」연작으로 구체화시켰다. ● 작은 크기의 「흙과 더불어」연작은 노란색, 주황색, 파란색 등 빅 아일랜드의 흙과 바다를 연상케 하는 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에는 콩팥, 생식기, 계란, 하트, 사람 옆모습 등이 반추상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 2000년 들어 이병용은 영적인 세계에 몰입하면서「모퉁잇돌(cornerstone)」연작을 발표한다. 이 연작의 시작은 성경의 한 구절이다. 시편 118장 22절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나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구약에서 모퉁잇돌은 하찮은 것이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약에서는 예수를 뜻한다고 한다. ● 「모퉁잇돌」연작은 주조색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쪽빛(코발트) 계열의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적갈색 계열이다.「흙과 더불어」연작과 비슷하게 쪽빛은 하와이에서 바라본 바다를 지칭하며, 적갈색은 화산섬의 토양을 지칭한다. 전자의 계열은 바다, 다리, 구름, 보트 등 자연과 사물을 암시하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후자의 계열은 주로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담고 있다. ● 이병용의 이전 추상이 복잡한 형태들로 구성되었다면, 「모퉁잇돌」연작은 색면을 강조하고 있어 차분하고 정제되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 안에는 인간이 느끼는 고뇌, 슬픔, 기쁨, 평안 등이 골고루 녹아 있으며, 그것을 통해 감상자들은 감정적인 것을 초월하여 정신적인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 그 정신적인 영역과 다시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모퉁잇돌」은 임박한 그의 죽음을 예견하게 하지만, 예술을 향한 그의 무한한 열정은 새로운 '모퉁잇돌'이 되어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Vol.20090915a | 이병용展 / LEEBYOUNGYONG / 李秉瑢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