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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904_금요일_05:00pm
2009 갤러리 리즈 기획展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리즈_LIZ GALLERY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192-5번지 Tel. +82.31.592.8460 www.galleryliz.com
휴먼시아의 세계는 없다! ● 식민화와 한국전쟁으로 초토화 된 남한의 국토는 60년대부터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재건되기 시작했다. 재건정책은 지독한 가난이라는 삶의 궁핍을 벗겨내는 모종의 '탈피脫皮'와 맞물리면서 전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부정권은 속도의 경제화를 밀어붙이기 위해 '재생판타지'를 유포시켰다. (중략) 지금 남한은 '휴먼시아Hunancia'의 세계를 건설 중이다. (중략) 조각가 이종희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는 이 같은 남한의 현대化·도시化·세계化의 과정과 필연적으로 만난다. 그가 이번 전시의 주제로 설정한 『run&run_달려라 달려!』는 그 '化의 속도'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 30여년동안 매년 7~8%의 경제성장 속도로 달려 온 남한의 경제속도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고공행진이었다.
이종희는 이 속도 자체에서부터 따져 묻고 있다. 예컨대 「질주」연작은 남 혹은 남녀의 형상과 둘 혹은 세 개의 바퀴로 이뤄진 작품인데, 그/그들이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셋 바퀴를 잡고 있는 몸체가 바로 그/그들이며, 그/그들이 브레이크 없는 바퀴의 앞과 뒤를 연결하고 있단 점이다. 이것은 질주의 역사가 그/그들의 몸으로 성취된 것이며, 이 탈것의 위에, 즉 그/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질주는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질주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욕망의 질주가 멈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정치가는 온갖 공약을 내세우며 질주를 부추기고 시민들은 공약이 가져 올 자본가치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수십년 동안 몸에 익은 개발욕망의 판타지를 끊는다는 것은 남한 사회의 민중들에게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여기에 현대사회 민중의 역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그 속도의 이면에 존재하는 휴머니즘의 존폐를 걱정한다.
「원단 배달」과 「짱개 배달」은 '化'의 세계 맨 앞쪽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풍경을 보여준다. ● 종이를 풀어 부조로 떠낸 뒤 채색한 이 작품들은 개발 직전의 궁핍한 삶의 형식을 직조하고 있다. 매끈하지 않은 건물들의 선과 골목, 오토바이에 원단을 싣고 달리는 사내와 동네 할아버지, 그의 손녀 딸. 알록달록한 색으로 덧칠해 놓은 이 장면의 인상은 풋풋함과 따듯함이다. 맑은 한 편의 동화 한 컷을 보는 듯하다. 뿐인가 이 오토바이는 하트 모양의 뿡뿡이를 쏟아내고 있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 풍경은 곧 사라질 것이다. 촌스럽고 유치하고 조잡할수록 쉽게 사라지는 것이 요즘의 세태니까. 달리 보면, 휴머니즘이란 인간이 인간을 촌스럽고 유치하고 조잡하게 사랑하는 일들일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세련되고 미니멀한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듯하지만, 그런 세계란 안으로 들춰보면 볼수록 지극히 촌스러울 뿐이다. 「짱개 배달」은 바로 그 뒤의 이야기다. 산동네는 어느 새 고층 빌딩이 점령했다. 고갯길을 넘는 작은 용달은 딱 그만큼의 살림살이를 했을 한 삶의 무게를 드러낸다. 참으로 민망한 이 삶의 적나라함은 가난한 이들의 이주를 상징 없이 보여주는 풍경이다. 짜장면이라고? 그래, 우린 어딘가에 그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가장 값싼 한 그릇의 짜장을 눈물에 묻지 않던가! ● 이종희의 가난한 이주는 「도시의 이주」, 「달동네 이사」, 「길의 끝」에서 시대의 모뉴멘트가 된다. 「도시의 이주」는 「짱개 배달」의 용달차를 조금은 도식적인 조각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만 차 위의 '이주'가 '삶'이 아니라 '도시'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는 이 작은 차량 위에 거대 도시의 빌딩 숲을 통째로 옮겨 실었다. 납작하게 짓눌린 성냥갑 건물들은 목적지 없는 이주를 떠날 것이다. 그 위에서 먹통이 된 달빛이 내려앉아 무게를 더하고 있다. 이 상징물은 개발/재개발에 대한 저항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달동네 이사」는 목조 작품이다. 「도시의 이주」와 달리 「달동네 이사」는 그야말로 '달동네 이사'이다. 똑 같은 용달에 실린 달동네는 이사를 떠나고 있다. 그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노란 달덩이도 얹고서. 이주의 끝은 어디일까? 「길의 끝」은 끝없이 떠돌아야 하는 이주의 끝을 보여준다. 인류가 지속하는 한 이주의 역사 또한 지속할 터이지만, 그 길은 평탄지 않을 것이며 때로는 매우 가파를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어디에도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서장출격도 西藏出擊圖」는 이미 수년 전에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도 종이부조이다. 대형 부조 작품인데, 그 형식이 이미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실험된 바 있기에 반갑기도 하고 조금 낯설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형식적 실험이 장르를 떠나 다양하게 전개되기를 희망한다. 서장은 티베트를 말한다. 서장출격도란 티베트로 출격을 떠나는 중국 인민군을 묘사한 그림이란 뜻이다. 화면은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화면 왼쪽은 군용차를 타고 출격하고 있는 인민군, 중앙은 티베트의 주도 라싸, 오른쪽은 티베트를 떠나는 승려들이다. 라싸 아래 즉 인민군과 승려 사이에는 협곡이 있고 호수가 있다. 풍경은 다소 거칠고 삭막하다.
그는 다소 단조로워 보이는 이 장면들 속에 그가 알고 있는 서장의 상징들을 배치해 두고 있다. 옛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는 고대 문자들과 불교 도시 국가였음을 증거하는 탑신들이 그것이다. 또한 결코 세속도시들이 넘볼 수 없는 성지라는 것을 첩첩 산중의 도시 풍경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미학적 형식이 아니라 이곳에서 내 쫓기는 승려들에게서 어떤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인간의 욕망을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 유목의 핵심은 제로게임에서 비롯된다. 유목민들은 자신이 이주할 때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자연의 회복과 정신을 살려낸다. 초원은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가장 근원적인 대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3천년이 넘도록 유목하면서도 가장 오래된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정주민인 우리와 비교할 때 가장 모순에 찬 역설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다시 풀이 자랄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양과 말떼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 이주는 이것과 같지 않다. 도시는 그 자신을 파괴한 뒤에야 새 도시를 얻는다. 정주민의 도시는 파괴와 해체를 전제하지 않고서 세워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새 도시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딘가로 내 쫓기고 새로운 이들이 새 도시에 몰려든다. 가난한 이들은 가난한 지역으로 밀리고 부자는 부자들의 도시로 몰려드는 것이다. 그러니 수백년 아니 수십년의 역사 따위가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남한의 정치가들은 휴먼시아를 건설하기 위해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휴머니즘과 신도시의 개념이 이질적이듯 신도시와 유토피아의 융합도 황당하다. 라싸를 쓸어버리고 자본주의가 넘실대는 신도시로 개발하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적 상상인 ■ 김종길
Vol.20090906i | 이종희(들로화)展 / LEECHONGHOE / 李鍾熙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