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E + I

지나展 / GINA / painting   2009_0824 ▶ 2009_0902 / 월요일 휴관

지나_N+I series 01_장지에 혼합재료_30×90cm_2009

초대일시_2009_0824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웨스턴갤러리_gallery western 210N, Western Ave #210 Los Angeles. CA90004, USA Tel. +1.213.323.962.0008 www.galleryestern.com

존재의 정체성, 자연과 인위(人爲)의 조화 ●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다. 지구라는 별과 그 위에서 살아간 생명들의 오랜 역사를 고려하면, 인간이 자연을 벗어나 기계문명 속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의 성공과 함께 현대적 의미의 도시가 탄생한 것은 기껏해야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게다가 '자연과의 단절'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불가능한 개념이다. 현대의 기계문명이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회귀 욕구 역시 강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태어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사라진다. 자연은 인간의 운명이다. ● 그럼에도 우리 현대인은 마치 인위적 기계문명과 자연은 다른 것일 수 있는 양, 그 둘을 대립시킨다. 더 나아가 빠르게 변하는, 따라서 발전과 진보라는 관념을 심어주기도 하는 기계문명이 마치 더 우월한 것처럼 숭배하기까지 한다. 물론 기계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편리함과 효율성, 월등한 생산력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다. 인간은 기계문명 덕에 가난과 질병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역사 상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하면서도 다양한 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해왔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존재의 시원(始原) 혹은 고향'을 잃었고, 그와 함께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 된 것이다.

지나_N+I series 02_장지에 혼합재료_30×90cm_2009

자연과 인위, 존재와 대상, 나와 너 사이의 분리와 단절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데카르트 Decartes 이후의 서양적 전통이다. 그것은 확고한 주체로서의 '생각하는 나'를 강조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타자(他者)'로, 사르트르 Sartre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사물(事物)'로 격하시킨다. 물론 서양은 이 데카르트적 전통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배'를 실천에 옮길 수 있었고, 그 결과 고도의 기계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기계문명은 그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인위의 문명이며, 그런 점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유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며 서양에서조차 거친 도전을 받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 그에 반해 동양의 사유 전통은 나와 세계, 주체와 자연을 별개의 것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관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인간이 그 안에서 분별에 휘둘리지 않고 '소요(逍遙遊)' 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평가하고 있다. 육체로서의 눈을 통한 시각의 지배를 우선시 한 서양화에 비해, 마음의 눈을 통해 인간이 곧 세계이며 자연이라는, 주객일치(主客一致)로서의 전체를 인식하고자 한 동양화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나_N+I series 03_장지에 혼합재료_30×90cm_2009

김진아의 작업은 이와 같은 전통에서 출발한다. 그는 수년 전부터 풀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풀은 자연을 구성하는 작은 요소다. 그의 작업은 풀이라는 작은 대상에 대한 미세하며 정밀한 관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풀이 단순히 대상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풀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이미지로서의 작업 대상 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물로서의 풀이 아니며, 나와는 무관한 가시적 현실로서의 풍경도 아니다. 그때의 풀은 마음이라는 존재의 필터를 거친 생명의 풀이며, 작가의 존재 자체가 육화되어 드러나는 '자아-자연'이다. 그 풀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 그 풀은 그래서 우리 인간처럼 직립해 있다. 대지(Terra)에 뿌리를 뻗고서 영원의 하늘을 희구하는 고귀한 생명인 것이다. 그런데 김정미의 풀 이미지 안에는 지나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전언이 숨 쉬고 있다. 인간이 저마다 '소우주(小宇宙)'로서의 절대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홀로일 수는 없는 '나와 너'의 운명 자체인 것처럼, 풀 역시 같으면서도 저마다 다른 '풀들'이라는 점이다. 존재는 홀로가 아니라 늘 '함께(with)' 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연을 지나치게 앞세운다면 그것 역시 위계(位階)로서의 신격화가 될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철학자 장-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가 '자연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했을 때, 이미 우리는 '인위의 문명'이라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존재가 갖고 있는 자연의 속성을 찾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자연과 기계문명 사이의 조화를 회복하는 일이지, 다시금 모든 것을 버리고 저 원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맹목(盲目)의 외침이 아니다.

지나_terra series_장지에 혼합재료_각 92.5×45cm_2007

김진아의 최근 작업은 풀 이미지로서의 자연과 함께 고도의 물질문명 속을 살아가는 현대적 자아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풀잎 바코드'의 연작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바코드는 생명을 사물화한 반(反)자연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바(bar), 즉 사물로서의 막대를 생명의 풀로 치환시킴으로써 작가는 자연을 회복한다. 그 자연은 동시에 검은 막대가 상징하는 기계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 순간 자연과 인위는 공존하며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마치 모든 생명에 죽음이 그림자처럼 함께 한다는 것과 같다. ●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비관적이 될 이유는 없다. 『에세 Essais』의 작가 몽테뉴 Montaigne가 일찍이 16세기에 말하지 않았던가. '철학이란 죽음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모든 생명에 죽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이처럼 생명과 죽음, 실(實)과 허(虛)의 '함께 있음'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면, 생명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태어나 다시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소멸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없다. 그러니 죽음이 곧 삶이며, 허가 바로 실이다.

지나_F-terra_장지에 혼합재료_193×579cm_2007

김진아의 최근 작업에서 풀잎 막대와 검은 막대가 반복된 바코드의 이미지는 바로 이 반복 속에서 생(生)과 멸(滅)을 거듭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운명임을 말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작업은 풀잎과 검은 막대의 수직 이미지가 반복됨으로써 수평적 확산의 효과를 아울러 거두고 있다. 생명이 가진 영원에 대한 수직적 희원이 생명'들'에 대한 수평적 이해로 넓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낭만적 환상 대신, 자연을 통한 냉철한 인식의 현실주의로 심화된 작가의 성숙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nature)과 인위라는 대립마저도 해소되고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게 바로 우주와 생명과 자연(Nature)으로서의 인간의 본원적인 정체성이 아닐 것인가. ■ 박철화

Vol.20090823b | 지나展 / GINA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