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81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코사스페이스_KOSA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37번지 B1 Tel. +82.2.720.9101 www.kosa08.com/home
생명의 '순환적 진화' (cyclical evolution) ● '알'로부터 알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라는 생명 근원에 대한 비유적 논쟁은 창조론에 대한 진화론의 승리로 인해 '알이 먼저'라는 결론에 도달한지 이미 오래이다. 그것은 모체의 퇴화가 유전된다는 '용불용설'이든 자손이 변이성을 가져온다는 '자연선택설'이든, 아니면 예측불가능성을 용인한다는 '돌연변이설'이든 모든 진화의 가능성이 '알'로부터 근원한다는 과학적 가설을 진실로 확증한 인증 절차였다. ● 조각가 박용국은 이번 개인전에서 이러한 '알'에 대한 다양한 조형탐구를 통해서 '생명의 진화'에 관한 근원적 주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일견 이러한 태도는 생명의 시발점으로 돌아가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가역적 성찰로 비쳐질 수 있지만, 언제나 '지금, 여기'의 현존성을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실행된다는 점에서 근원적 성찰을 지향한다. 즉 그가 지금까지 '히스토리-타임 캡슐-블록-유기체- 수상조각' 등으로 이어온 시리즈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탐구하는 현재적 시점의 근원적 성찰인 것이다. 그 동안 그의 시리즈물은 조형의 형식과 소재의 변모를 거듭해 왔음에도 '시공간과 생명성'이라는 그의 동일한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관철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금의 그의 성찰은 미래적 전망마저 포함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만들어내는 '알'은 자연물의 형상을 재현하는 것에 골몰하지 않고 알이 품은 무한한 진화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박용국의 '알'은 형식적으로는 그의 이전 작업인 '유기체' 시리즈를 잇는 유선형의 자연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그가 일관되게 천착해 온 스테인리스스틸이라는 재료가 상징하는 사이보그메탈과 같은 미래적 이미지를 동시에 껴안는다. 실제의 계란 크기로 주물이 된 스테인리스스틸의 '알'들은 물론이고 껍질을 깨뜨리면서 부화하는 찰나를 거울처럼 버핑된 스테인리스스틸 재질로 형상화한 '알'들은 테크놀로지를 극한까지 이르게 한 작금의 인공의 세계가 창출하는 미래적 뷰(view)를 쉬이 성취한다. 그 뿐인가? 막 깨뜨려지고 있는 알의 껍질을 볼트와 너트로 결합한 형상으로 표현하거나 알의 내피로부터 신비스러운 LED 조명이 뿜어져 나오게 하는 일련의 장치들은 첨단적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미래 이미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적격이다. ● 그러나 그는 동시에 '알'이라는 자연의 유기체적 형상은 물론이고 녹이 슨 브론즈 재질을 통해서 자연의 생명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도모하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얼룩표면을 가진 '알'은 자연의 공간으로 인도하고 공룡의 것이라 상상하게 할 만큼 커다란 크기의 '알'은 우리를 태고의 과거적 시간으로 인도한다. ●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에서, 알의 외피 형상과 그 색을 이미테이션한 녹슨 브론즈로 형상화된 알의 이미지가 자연을 제유(提喩)의 방식으로 비유한다면, 표면이 버핑되어 광택이 번쩍이는 스테인리스스틸의 알의 이미지는 미래적 진화를 환유(換喩)의 방식으로 비유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스테인리스스틸 혹은 브론즈라는 차가운 재료를 더욱 차갑게 하거나 혹은 따뜻하게 변주해낼 줄 아는 조각가 박용국의 뛰어난 연금술사적 재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둥지'로 ● 흥미로운 것은 자연과 인공, 과거와 미래를 품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박용국의 '알'들이 어떤 바탕과 밀접하게 조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바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선형의 폼(form)으로 깔끔하게 떨어진 아우트라인으로 늘 위태로운 파손의 위험에 처해 있는 연약한 '알'들을 사뿐하게 담아내고 있는 '둥지'로 표상된다. 그것은 어미가 풀잎과 나뭇가지들로 얼키설키 섞어 만들거나 연약하기 그지없는 흙덩이로 짓이겨 만든 실제의 '둥지'이거나 인간이 계란 꾸러미를 담기 위해 얽어 만든 아슬아슬한 '짚 타래' 혹은 허약한 폐지를 뭉쳐 만든 '계란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여쁜 '알'들에게는 그 허약한 바탕마저 포근할 뿐만 아니라 넉넉하고 든든한 '집'이 된다. 아직 온전한 생물의 개체로 세상을 만나지 못한 '알'들에게는 비록 허약한 재질로 이루어졌음에도 그것은 약육강식과 폭력이 난무하는 혹독한 세상에 나가기 전 자신들을 지탱해주는 포근한 '보금자리'이자 넉넉한 삶의 '바탕'이 되는 셈이다. ● 박용국은 이러한 둥지를 '알'들과 동거하도록 제공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로서는 실제 둥지의 허약한 원래의 재질이 위태로워 보였던 것일까? 그는 멀리서부터 한 가닥 한 가닥 나뭇가지를 물어오는 어미 새의 새끼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고단한 노동력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낸다. 그는 튼튼한 스테인리스스틸 봉으로 용접에 용접을 거듭해가며 이름 모를 '알'들의 보금자리를 위한 커다란 '둥지'를 만들어낸다. 그것도 태풍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 보금자리를 말이다. ● 그는 또한 연약한 계란판 대신 단단한 브론즈 주물로 만들어낸 계란판을 만들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부화를 기다리는 '알'들을 위험으로부터 완벽히 차단하기 위해 계란판을 차곡차곡 쌓아서 볼트와 너트로 조립하고 용접으로 마감해서 완벽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작가의 마음은 한낱 짐승일지라도 가슴 저리게 공유하고 있는 모성을 소유하기에 이른다. 그런 면에서 차가운 금속재료에 따뜻한 생명성을 입혀내는 그의 조각 언어는 가히 '활유법(活喩法)'을 실천한다고 할만하다. 이러한 연금술 혹은 물활(物活)의 조각 언어와 더불어 세밀한 계측과 고단한 노동의 수고스러움에 천착하는 그의 작업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차가운 금속 재질의 '알'들이 결국은 부화하고 말 것이라는 낙관적인 상상마저 가능케 한다.
'순환적 진화'_공존하는 시공간 ● 박용국의 '알'이 의탁하고 있는 바탕은 구체적으로는 '둥지'라는 보금자리이지만 실상 그것의 근원은 '물'이라는 커다란 자연 안에 놓여있다. 그의 조각이 최근 '수상 조각'으로 연구되어 왔던 점을 상기한다면 이번 전시의 신작들 역시 '물'을 바탕으로 띄워지는 조각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화이트큐브에서의 개인전을 마친 후 작품들을 저수지 혹은 강에 부유하는 작품으로 실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이전과 다르다면, 오염되어 가는 물표면 위에 '폭기(aeration) 기능'을 통해서 잔잔히 산소공급을 하면서 자연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태도가 담겨져 있던 초기의 수상조각과 달리, 최근에는 '둥지' 혹은 '보금자리'의 이름으로 물 속 혹은 물 위에 생물들을 위한 소박한 주거의 공간을 제공하는 상징적 조형언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출품작 중에서 '알'이 변형된 커다란 반원형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나무는 물속의 작은 물고기를 위한 피난처이자 서식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구멍들을 반원형의 뿌리에 가지고 있다. 그 공간은 물속의 '둥지'이자 물고기들의 아파트가 되기에 족하다. ● 생각해보자. 기체-액체-고체라는 변화를 반복하는 '물'의 순환성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바탕이 결코 '진보를 향한 진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박용국이 '알'을 통해 꿈꾸는 미래적 진화는 따라서 진보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성이 함께 결합되어 공존의 시공간을 지속하는 '순환적 진화(cyclical evolution)'를 지향한다. ● 이러한 진화는 생물학적으로는 '종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이 주기를 갖고 연속해서 일어난다'는 의미이지만 그의 작품 분석에 있어서 이 '순환적 진화'는 역사 혹은 경제적 관점에서 차용한 개념으로 읽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역사적 지평이나 경제적 사이클에서 목도하는 '흥망성쇠'가 거듭되는 '순환적 진화'는 결코 가역(可逆)적 시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체로 세상을 사는 이 땅의 모든 주체들에게 존재론의 의미를 되뇌게 하는 비가역(非可逆)적 시공간에 바탕하면서도 개체와 개체를 잇는 커다란 순환의 질서가 함께 작동한다. 그것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시공간이 현재진행형의 의식 흐름에 자리한 채 떠올리는 상상작용 속에 한 덩어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알의 현재적 형상이 미래적 사이보그메탈과 접목한다든가, 관객으로 하여금 공룡의 알처럼 보이는 거대한 알이 과거의 시공간을 상상케 하고 오늘날 주변에서 목도하는 닭의 알이 현재의 시공간을 상상케 하면서 서로 만나는 것과 같다. ● '알'이란 들뢰즈가 정의하는 '기관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처럼, 눈도 팔도 혀도 다리도 어떠한 기관도 행사하도록 특화되어 있거나 전제되어 있지 않는 '주체 아닌 주체'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기관이 미분화된 채 모든 가능태를 한 덩어리로 품고 있는 원형상으로서의 '주체 아닌 주체'인 것이다. ● 박용국의 작업에서 주체 아닌 주체 혹은 자연의 개별 주체로 선택되고 나아가 자연 대표로 지칭되고 있는 '알'이나 '물'은 때로는 자연으로 때로는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오고가지만, 작가는 그의 작업을 대면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개별 인간 주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런 까닭에 관객들은 조각가 박용국이 날카로운 금속성의 재료를 살아있는 생명체의 피와 살로 바꾸면서 벌이는 상상 작용 속에서 제시한 친환경적 태도를 통해 자연-인간-환경에 대한 관계항에 대해 곰곰이 되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관객들은 그의 조형 언어 앞에서 자연본질과 관계한 '순환적 진화'에 대한 사유의 진폭을 확장하는 계기마저 맞을 수 있을 것이다. ■ 김성호
Vol.20090818f | 박용국展 / PARKYONGKOOK / 朴容國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