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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814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_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 www.noamgallery.com
일상의 빈틈에 온몸을 던져 일상의 의미를 회복시킨다는 목표가 박성수의 회화방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빈틈(fissure)이란 우리의 지각과 의식의 불완전함을 지칭하는 수사적 용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본다는 것은 눈을 빼서 우리를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에 처절할 정도의 고통이 수반된다." 데이비드 흄의 말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렇다고 믿고 살아갈 뿐이다. 단순하지만 어려운 철학적 명제를 박성수는 놀랍도록 이른 나이에 이해하고 있다. 내가 그의 회화의 가능성과 그 사람 미래에 기대를 거는 이유이다. ● 박성수는 한지를 펼쳐놓고 자기를 둘러싼 상황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다. 생각이 정리되면 붓을 잡는데 그의 붓은 장식적인 치장을 거부한다. 그때 오히려 그의 붓은 '철학자의 해머'나 '마술사의 지팡이'가 된다. '해머'나 '지팡이'는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상징이다. 박성수의 붓질은 해머나 지팡이기 때문에 그의 회화는 과감하면서도 겸손하며 결핍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볼륨이 있다. 비어있지만 농후하다. 분명 요소적(elemental) 회화지만 전체적이다. 명료해 보이지만 또한 모순적이다. 박성수의 회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이러한 술어들은 그의 회화나 붓질이 직관에서 나온 우연한 유령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가 만든 유령은 계산적인 것이다.
주체(subject), 자아(self)는 18세기 유럽 역사 이래로 사람들을 매혹시킨 가치다. 사람들은, 언제나 대문자로 표현되는 '나(I)'는 세상의 중심(center)이며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설정을 완벽히 파악하며 자유롭게 재단할 수 있는, 무기로 생각했다. 나의 자아가, 주체가 제공하는 언어는 세계의 그 무엇도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가 제공한 언어는 세계의 본질(essence)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주체의 판단이 만들어낸 변증법은 어느 사건의 시말도 역사의 과정도 연결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무엇도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주체란 것은 있지도 않을뿐더러 정확할 수도 없다. 다만 사고할 뿐이다. ● 주체나 자아, 중심, 본질과 같은 낱말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다르게, 사고는 불완전하며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일 뿐이다. 어느 유기체가 태어나면 성장하다 쇠퇴한 후 죽는 것처럼, 사람의 사고도 같은 과정을 겪는 불쌍한 놈일 뿐이다. 내가 언젠가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논의를 했던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궁극 어휘(final vocabulary)'와 '아이러니스트(ironist)' 개념을 이야기 했을 때, 박성수는 "그래요, 우리는 전부 삼형제의 막내잖아요?"라고 대답했었다.
분명 우리는 모두다 삼형제의 막내이다. 삼형제의 막내는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큰형과 작은형에게 이끌림을 당하고 구박을 당하다가 불쌍해 보이면 가끔 위로 받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귀여운 척을 해야 그나마 그들이 손가락질하는 내 존재의 야유로부터 겨우 구제된다. 큰형이 일월이고 작은형이 천지일 수도 있다. 큰형이 신이고 작은 형이 세계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삼형제 중 막내다. 불안한 천덕꾸러기, 유한한 자, 약한 자이다. 한계(limit)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는 사람은 거꾸로 강한 사람이다. 이 사실을 알 때 일상의 모든 사건과 사건을 신묘한 황홀경(ecstasy)과 행복감(bliss)으로 파악할 수 있다. 더 이상 약자의 신, 병자의 신, 거미의 신, 부패한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박성수가 그리는 모든 대상과 순간은 이러한 심리 상태에 도달한 자신에 대한 일기이자 기념비이다.
이 시대의 회화는 중병의 상태이다. 그 사실을 누구나 안다. 이미 손쓸 수도 없다. 자본주의의 중병, 센세이셔널리즘이라는 중병, 표면주의라는 중병, 소재주의(materialism)이라는 중병, 시장의 신화와 허구라는 중병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모두들 '센세이션(sensation)'이라는 상표의 농염한 채색의 옷으로 표면(surface)만을 치장한다. 영혼을 가꾸거나 위무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서. 성공(success)을 위해서이다. 세가지 'S'로 시작하고 끝나는 스토리다. ● 언뜻 보기에 단순하고 얇아 보이고 느린 것 같아 보이는 박성수의 회화는 적어도 'S' 정책과는 무관하다. 끊임 없는 반성의 기반 위에서 나와 일상, 세계를 고민하는 태도가 있다. 그리고 그의 회화에는 화가로서 새로운 네러티브, 새로운 판을 짜겠다는 조용한 다짐이 있다. 나는 "폭풍을 일으키는 것은 아주 고요한 말이며, 비둘기의 발로써 다가오는 사고가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박성수의 회화는 삼형제의 막내의 것이며, 삼형제의 막내는 비둘기의 발과 같은 말이다.■ 이진명
Vol.20090814a | 박성수展 / PARKSUNGSOO / 朴成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