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813_목요일_04:00pm
하정웅컬렉션 특별전 염원의 빛을 담은 예술가 전화황 탄생100주년 기념展
관람료 / 어른_500원 / 청소년_300원 / 어린이_200원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광주시립미술관 GWANGJU MUSEUM OF ART 광주광역시 북구 박물관로 48번지 3~5전시실 Tel. +82.62.510.0700 artmuse.gwangju.go.kr
재일동포 화가 全和凰(1909-1996)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일찍부터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인간의 구원'에 뜻을 두고 26세 때 탁발하고 일등원이라는 사회봉사단체에 들어갔다. 이 단체와의 인연으로 그는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해방이후 본격적인 화가생활을 하였다. 전화황의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끊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기도의 메시지를 담았다. 그는 내면 깊숙이 갈구하는 생명의 존엄성과 평화와 희망의 세계 등을 작품으로 나타냈으며, 다시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을 작품에 표현했다. 조국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 차 있는 그의 작품은 차분한 색조로 빛과 어두움을 조화롭게 표현하고 숙연한 분위기의 독특한 화면구성을 창출하여 주목받았다. 전화황은 일찍부터 빛에 관심을 가져 평양시절에는 '여명사(黎明社)'라는 서고를 만들기도 했고, 교토 일등원 시절에는 어두움 속에 작은 램프의 빛을 그렸다. 또한, 재일교포로서 느낀 한국전쟁과 분단조국을 두개의 태양으로 상징화했고, '태양과 꽃', '태양과 잡초' 등 강한 생명력을 태양과 관련시켜 그리기도 했다. 고즈넉한 풍경에도 태양 같은 동그란 빛을 그렸으며, 불상시리즈에서도 불상이 들고 있는 불빛, 불상을 비추는 빛 등을 그렸다. 이렇듯 그는 항상 태양 또는 빛을 즐겨 그렸다. 그가 표현한 빛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여명의 빛이며 조국을 비추는 빛, 희망의 빛, 모든 이의 마음을 평원하게 만드는 빛이었다. 이 전시에서는 전화황이 형상화한 빛을 따라가며 그의 예술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평양시절과 여명(黎明)', '일등원 생활과 램프', '전쟁과 두개의 태양', '향수(鄕愁)', '생명', '마음의 평원' 등 여섯가지로 크게 구분했다. 이 전시를 통해 전화황의 작품세계를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고 그가 평생 추구 했던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가 전달되리라 기대한다. 1부 평양시절과 '여명(黎明)' ● 전화황은 1909년 5월 13일 평안남도 안주읍 오학리에서 부친 전리순과 모친 이해원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봉제(鳳濟)이다. 그는 문학과 그림에 각별한 재능을 보였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동아일보」에 동요와 동시를 기고하기도 했고, 1931년에는 잡지「동광」에 몇 편의 시와 컷 삽화를 실었다. 또한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수채화부문에서 입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식민지 당시의 심한 차별과 탄압 등 식민지 현실에 대해 일찍 개안했으며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현실과 유리된 일이라고 회의를 느꼈다. 20대 무렵 그는 방 하나를 비워 '여명사(黎明社)'라 하고 자신이 읽은 책을 시골의 젊은 청년들에게 무료로 대여해주어 청년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기도 하고, 신의주로 가서 고아원일을 돕는 등 남을 위한 봉사생활을 했다.
2부 일등원 생활과 램프 ● 전화황은 1936년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탁발을 했으며, 이 후 서울 봉천의 일등원에 들어갔다. 일등원은 1905년 4월 니시타 덴코가 창설한 동신동행(同信同行)의 도장이며 철저한 무보수의 노동, 봉사생활로 사회 개혁을 지향했던 단체였다. 1938년 전화황은 교토의 일등원으로 갔으며 등영화방('燈影畵房)'이라 이름을 붙인 화실에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할 무렵 전화황은 일등원을 퇴원하고, 스다 쿠니타로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화가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일등원 생활 전후 그는 일등원의 사람들, 풍경 등 당시의 주변생활을 담담하게 그렸다. 특히, 일등원을 이름 그대로 '하나의 등불'로 해석하듯 칠흑같이 어두운 실내 속의 작은 램프나 촛불 등을 즐겨 그렸다. 전화황은 식민지 치하의 현실,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안개처럼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삶속에서 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사는 일등원의 사람들,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자신, 그리고 결혼생활의 시작 등 희망의 빛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3부 전쟁과 두 개의 태양 ● 해방이후 전화황은 재일 한국인 중학교에서 미술 강사로 일하기도 하고,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활을 연명했다. 그는 이국땅에서 한국전쟁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며 조국에서 떨어져 있던 전화황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전쟁의 참상과 전쟁의 어리석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항의하는 길 밖에 없었다. 전화황은 일제 식민지의 조선,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 끊이지 않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황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는 분단된 조국을 두 개의 태양으로 상징화했다. 백두산 천지를 그린「두 개의 태양」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두 개의 태양으로 표현했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천지에 비친 하나의 태양으로 표현했다. 또한「춘향의 재회」를 통해 남과 북의 재회와 통일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들 작품은 조국에 대한 작가의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다. 한편, 분단된 조국사이에서 재일동포로서 살아가는 차별과 고민은「방주(方舟)」, 「피난민」,「잠자는 남자」,「내 내면의 자화상」,「봉황도」 등에서 엿볼 수 있다.「전쟁의 낙오자」에서는 어둠속에서 등불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으로 내면의 고민과 조국분단의 애환을 드러냈다.
4부 향수(鄕愁) ● 전화황은 일본에 살면서 상상속의 조국을 작품으로 그렸다.「나의 생가」(1957),「해금강」(1970),「백산」(1973) 등의 작품은 고향집과 부모형제에 대한 화가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평범한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풍경화 속에서도 고향의 길, 고향의 풍경 등 평화로운 관념속의 고향에 대한 작가의 향수가 담겼을 것이다. 대부분의 풍경화에도 항상 태양은 그려졌다. 풍경화의 태양은 고향을 비추고 있는 태양이며, 어두움을 뚫고 나오는 여명, 희망의 태양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전화황은 고국에 대한 향수와 함께 재일교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들을 찾아 그렸다. 그의 작품에는 고려 불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지은원의 풍경화들이 있고, 나라(奈良)의 백제관음과 한반도의 문물이 전해졌다고 알려진 광륭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의 불상연작이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한복을 입고 있다. 그는 조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의도적으로 자주 찾아갔을 것으로 보이며, 그 속에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 켠에는 조국문화의 우수성으로 재일동포로서 자존감 등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5부 생명 ● 전화황은 호박, 꽃, 모란, 석류 등의 소재도 다수 그렸다. 이들 작품은 외형적 아름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그의 작품 속 태양처럼 여러 상징이 함축된 생명의 의미로서 애용된 것으로 보인다.「잡초중의 꽃」은 일제식민지와 남북 분단, 재일동포의 차별대우를 겪으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란」은 활짝 핀 생명을 표현한 동시에 희미한 달밤의 꽃처럼 몽환적이다. 이런 몽롱한 기법은 일본적 취향이라고 이야기되곤 한다. 1938년 이후 일본 교토에서 줄곧 살았던 전화황은 이런 화풍상의 영향을 자연스레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작품에서 드러나는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 인간존중과 생명의 중요성을 바라는 염원을 담은 숙연한 분위기에는 이 몽롱한 기법이 다소 적합한 화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 전쟁으로 인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본 전화황의 삶 속에서 인간존중과 생명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간혹 그려진 전화황의「석류」와「호박」은 광택과 함께 빛 속에 생명의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6부 마음의 평원 ● 전화황은 불상을 다수 그려 '불상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불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로 보이며 본격적인 불상시리즈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집중되며 백제관음상, 미륵보살상, 아수라상 등을 주로 그렸다. 그는 천국(天國)이나 정토(淨土)가 있다면 그건 현세가 아니어선 안 된다고 하여 현세의 여성은 관음상이고, 지인과 선배는 보살이라고 생각하며 불상을 그렸다. 특히, 1970년대 중후반부터 전화황은 불상을 여인의 형상으로 다수 그렸다. 인간의 형상을 한 일본의 길상천녀(吉祥天女) 입상을 회화로 표현하기도 하고 백제관음상을 여인의 형상으로 그리기도 했다. 불상의 이목구비는 뚜렷하지 않고 전체 이미지가 물감과 물감으로 서로 뭉개져 있다. 그의 불상은 한곳에서 고요한 빛을 받고 있거나 화면에 동그란 태양 형태가 그려지거나 손에 불을 들고 있다. 불상과 함께 그려진 태양과 불은 평화와 희망을 상징한다. 작가 자신이나 그림을 보는 이는 그림 속의 불상으로 대입되어 불상이 인간이 되어 현실의 고민과 번뇌를 넘어 위로와 치유, 마음의 평원을 위한 기도를 하는 형상이다. 전화황은 일요 목공인으로 1962년부터 손수 짓기 시작한 아틀리에를 10년 후인 1972년 전화황미술관으로 개관했다. 그는 노아의 방주가 아닌 인간의 방주,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교토에 와서 머무는 그런 집을 만들고 싶어서 미술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렇듯 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손수 미술관을 지어 마음의 평원을 위한 장소를 마련했다. ■ 홍윤리
Vol.20090811e | 전화황展 / CHUNHWAHWANG / 全和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