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식 추모전 Jeong Jeum-sik Memorial Exhibition

극재 정점식展 / JEONGJEUMSIK / 克哉 鄭點植 / painting   2009_0810 ▶ 2009_0822 / 일요일 휴관

정점식_무제_캔버스에 유채_159×127cm_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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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810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_Gallery Bundo 대구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갤러리 분도는 오는 8월 10일부터 열리는 정점식 추모전시회를 기획했다. 극재(克哉) 정점식 화백은 한국 추상 회화의 한 축을 이룬 중요한 작가이다. 한국의 현대미술사 발전과 함께 해 온 고인의 미술 인생은 운명하는 순간까지 작품 활동을 해 온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상 회화를 독창적으로 파헤쳐 들어가면서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영역을 넓혀왔다. 고인의 작품은 당대 서구의 회화 사조를 풍성히 수용함과 동시에, 한국적인 소박함과 구성미를 작품에 투영시킨 것이 특징으로 기록된다. 선과 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정적이며 간결한 구도를 바탕으로 두지만, 이에 대비되는 공감각적인 생동감이 물결치듯 그림 속에 나타나 있다. ● 정점식 선생이 지녔던 재능과 인품은 그가 화가로서뿐 아니라 수필가와 교육자로서도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이유가 되었다. 고인은 유년기부터 그림 그리기에 타고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라는 역사적 요동에 맞물려 미대에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남다른 자질과 노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미적 세계를 구축하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계명대학 미술대학 설립에 큰 역할을 맡으며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 정 화백의 타계 이후 처음 열리는 이번 추모전시회에 공개되는 그림들은 그가 가장 왕성한 창작욕과 예술적 영감을 표출하던 시기로 평가받고 있는 1980년대 회화와 드로잉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각 작품들은 저마다 심사숙고한 정신적 과정과 역동적인 손놀림 과정이 이어져 정지감과 속도감이 절묘하게 교차한 양식을 뽐내고 있다. 출품작들은 개인 소장가들 및 유족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을 비롯하여 갤러리 분도가 자체 소장중인 미공개 작품들 가운데 엄선한 다수로 이루어져 있다. ● 아울러, 갤러리 분도는 이번 전시에 선생과의 인터뷰(수성아트피아 이미애 전시팀장)와 주요 작품 활동이 담긴 영상을 제작했다. DVD 양식으로 제작된 이 기록물은 고인의 작품 세계를 간추렸다는 의미를 가지고 관람객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정점식 화백을 평생의 은사로 모신 갤러리 분도 박동준 대표는 스승에 대한 예우로 이번 추모전시회를 구상했다. 따라서 생전에 항상 단정함과 엄격함을 갖춘 선생의 태도에 걸맞게 최대한 정중하게 펼칠 예정이며, 상업적인 동기에서 기획된 전시가 아닌 만큼, 작품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을 방침이다.

정점식_타천사(墮天使)_종이에 아크릴채색_72×100.5cm_1989
정점식_형상_캔버스에 유채_116×89.5cm_1982

정점식(1917-2009) : 지난 세기의 한 댄디를 추억하며 ● 극재 정점식 선생의 회화에 관한 언급에는 '리듬감'이나 '문학적'이란 표현이 곧잘 붙는다. 나도 그렇게 썼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 깃든 공감각적인 요소를 지적한 것인데, 그 표현은 모호하다. 그림이 추상적이라고, 그 비평 또한 피상적이어야 된다는 법은 없다. 글이라는 텍스트와 그림이라는 시각 이미지는 서로 완전히 등치될 수 없다. 따라서 분명히 인식되지만, 그렇다고 설명될 수는 없는 글과 이미지의 틈이 생긴다. 그 틈은 예술가나 작품을 간과해버리거나 또는 과장하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정점식 선생은 지금껏 화단에서 한국 추상과 모더니즘 미술의 대부로 받들어져왔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칭송되거나 너무나 소홀하게 취급'(김인혜, 2004)된 것일 수 있다. 대구에서는 추상이 구상보다 예술성을 선취한 증인으로 기록되는데, 외부에서는 한 지역의 저명 원로 작가로 기술되기도 한다. 이처럼 더해졌거나 빠진 부분을 맞추는 일이 지금부터 필요하다. 이글은 정점식 선생의 미술 세계로 접근하기 위한 몇 가지 길을 간략히 적은 것이다.

정점식_누드_캔버스에 아크채색_61×72cm_1982
정점식_무제_캔버스에 아크채색_77×108cm_1993

모더니티/모던 보이 ● 정점식 선생은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표준적인 삶을 따랐다. 즉, 일제를 극복해야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본을 통해서만 가능한 역설적인 태도가 그에게도 적용되었다. 회화에 매료된 그는 김용조와 이인성 등에게 기법을 습득했고 일본도 다녀왔다. 젊은 시절부터 정점식 선생은 많은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는 미술 관련 이론은 물론이고, 보들레르('보드리야르'라고 오타를 낸 회고록)와 발레리의 낭만적 예술관과 엥겔스(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빠졌지만)의 정치경제학, 크로포드킨의 아나키즘까지 방대한 영역에 걸쳐있다. 해방에 뒤이은 한국 전쟁은 큰 비극이었지만, 정점식 선생 개인에게는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대구로 몰려온 피난 행렬 속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안병소, 김동진과 같은 음악가들, 마해송, 박두진, 유치환, 구상, 김요섭을 비롯한 여러 문학가, 그리고 오세창, 신석필, 문선호, 이중섭 등의 화가들과 아루스 다방이나 녹향 음악감상실과 같은 장소에서 교류했다. 전쟁이 일시적으로 열어놓은 특별한 시공간 속에서 정점식 선생은 예술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정점식_무제_캔버스에 아크채색_62×128cm_1994

앵포르멜/예술적 전위 ● 사회변동이 거센 시기일수록 보수적인 예술가들은 서정적인 목가주의에 기대어 순수/자연으로 회귀하려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출범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도 그러한 성향을 나타냈다. 예술적 아방가르드로서 한국의 앵포르멜은 동시에 정치적 저항운동의 성격도 띄었다. 그런데 한국의 앵포르멜 경향은 5. 16으로 권력을 쥔 박정희 정권의 후원을 받는다. 박정희에게는 '이승만=부패한 정부/장면=무능한 정부'라는 정치적 레토릭을 바탕으로 새 질서가 필요했는데, 예술의 모더니즘적 경향도 그렇게 선택되었다. 1962년 서울 경복궁 미술관에서 조선일보 주최로 열린 제6회『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그 출발이었다. 윤명로, 김창열, 정상화, 박서보, 이세득 등 100여 명의 추상 모더니즘 작가의 세 과시 속에 정점식 선생의 이름도 가장 먼저 부각되었다. 1970년대 이후 유신체제로 변질된 박정희 정권의 파시즘은 미술에도 민족적인 요소를 강요했다. 하지만 정점식 선생의 회화는 탈 민족적인 조형으로 나아갔다. 놀랍게도, 그는 대학 교수직에서 은퇴한 1980년대에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시기는 정치 현실과 연동되어 예술 환경도 격변하던 때이다. 그는 사회 변혁을 바라는 리얼리즘 예술에 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고뇌가 선생의 글에서도 읽힌다. 이는 당시 대구의 기성 화단의 중앙 상층에 자리매김했던 그였기에 매우 이채롭다. 그는 '이념의 교조주의적인 틀에 얽매인 행동이 아니라 비판적 지성과 자유주의적인 폭'을 겸비하고자 애썼다. 1930년에「게르니카 Guernica」를 발표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는 연주만, 화가는 그림만 그릴 수 없다'며 현실 참여를 독려했던 피카소가 그로부터 15년 뒤에『예술과 저항』전에서 "꼭 총을 쥔 사나이를 그릴 필요는 없다. 사과조차 혁명일 수 있다'라는 말했던 일화를 정점식 선생은 곧잘 인용했다. '사과 혁명론'이 그가 가졌던 중도 노선인지, 아니면 자기 합리화 수단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작가에 대한 생애사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토마티즘/이론가 ● 그의 생각은 낡은 전통 미학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갱신되었다. 평생 컴퓨터 대신 원고지에 글을 썼던 것처럼, 비록 새로운 물질 환경은 좀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새로운 이론에 관해서는 매우 개방적이었다. 그는 후기구조주의를 옹호했지만, 탈근대주의에 관해서는 여러 발언을 통해서 거부감을 나타냈다. 스스로 '숨 가쁜 양식 교체기의 절정'이라고 표현했던 현대 예술 환경 속에서, 그는 탈근대주의에 맞서는 다른 예술 관점을 모색했다. 그것은 오토마티즘(automatism)이었다. '神經系統 내에서 일어나는 직접적인 작용으로, 예술의 정신성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1986)이라고 기술했던 그 관점은 존 듀이의 '체계 미학'(역시 고인이 된 후학 정순복이 연구했던)이나 최근에 부상한 '급진적 구성주의' 패러다임 아래 생물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교육학자, 공학자들이 통섭으로 연구하는 방법의 느슨하지만 통찰력 있는 혜안이었다.

정점식_하얼빈_종이에 펜, 수채_14×18cm_1945

댄디즘/댄디 ● 정점식 선생은 예술과 일상이 일치되는 작가였다. 그가 가졌던 절제된 의식은 작품 관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작품이 미술 시장에서 가격이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매겨지길 원했다. 이는 자식들에게조차 작품을 함부로 증여하지 않는 매정함으로 비취지기도 했다. 언행과 외모도 마찬가지였다. 50대에 접어든 그가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 앞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투버튼 수트 차림에 한 손을 옆구리에 걸친 자세는 자유로우면서도 엄격히 정형화된 신사의 모습이다. 그는 일찍이 댄디즘에 관해서 '개인의 신분이나 취향이 오랜 시간동안 몸에 익어 발하는 품위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다(대략 1950년대 중반). ● 진정으로 댄디였던 그는 대구 도심 산책을 즐겼다. "이 거리는 내 생애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내 고장이다. 나는 내 젊음을 불태우고 꿈을 배양한 이 거리를 사랑한다. 그러나 벗들의 모습이 차츰 드물어지고 젊은이들의 거리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몹시 서운한 마음이 든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흘러간 옛 노래를, 브루흐나 드보르작의 멜로디를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휘파람 불면서 집으로 돌아온다.(1985)" 지금도 시내 어딘가에 선생이 유유히 만보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의 전 세대인 그가 물려준 것은 비단 뛰어난 작품만이 아니다. 그의 정갈한 품성과 경쾌한 자태를 우리는 벌써 그리워한다. ■ 윤규홍

Vol.20090810c | 극재 정점식展 / JEONGJEUMSIK / 克哉 鄭點植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