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ramed Reality

이태훈展 / LEETAEHOON / 李泰勳 / photography.media   2009_0805 ▶ 2009_0811

이태훈_ascetic_람다 프린트_51×100cm_2009

초대일시_2009_08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토요일_11:00am~07:00pm / 일요일_12:00am~06:30pm

갤러리 그림손_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비가시적 차원의 가시성(Invisible Visibility; Framed Reality) 현실은 물리적인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물리적인 현상 자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 아트를 이야기 할 때 현실에 관한 언급이 언제나 동반되는 것은 미디어 아트가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감각적 이해를 바탕으로 가상의 상상된 세계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예술작품을 창조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미디어 아트에서 현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이 아닌 경우이기 때문이고, 미디어 아트 작품으로 제시되는 환경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의 감각 작용에 직접 관여하는 현상으로 존재하지만 작품이 개진되는 상황의 근본적인 기저에는 비물질성이 하나의 원칙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미디어 아트는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감각적 반응에 기반을 둔 물리적 작용의 세계와 관련된다. 이태훈의 작품에서 이미지들은 순수한 이미지가 아니다. 디지털 과정상의 편집수정(retouch) 행위를 통해 작가가 의도한 형상의 기호 안에 거주하는 이미지들이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환영적 순수성(illusionist purity)과 이미지가 이 세계에 대한 반영이라는 개념은 그의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작품들은 만화경 속의 이미지처럼 작가의 심리적인 지향성이 반영된 기호의 세계로 변화되어 있다. 그의 사진 작품들은 전통적인 사진 기법인 이중노출(double exposure)을 통해 제작되지만 디지털 리터치 처리과정을 닮아있다. 즉 환영(illusion)이 아닌 환상(fantasy)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생산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만화경적인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디지털적인 시선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태훈_grey haze_람다 프린트_56×76cm_2009
이태훈_seven realities_람다 프린트_47×76cm_2009

동영상 인터액티브 작품인 「photosynthate」 그림자의 역전현상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작품으로 다가가거나 하면 작품 이미지 안의 그림자는 오히려 커진다. 빛이 사라지면서 화면 안의 형상의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마치 일식을 통해 지구 전체가 달의 그림자가 되듯, 그리고 커다란 물체의 중력이 마치 그림자처럼 작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중력은 부피와 물리적인 크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의 정신적인 세계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중력은 삶의 무게를 상징하거나 자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관한 언급을 할 때 인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행위의 결과들이 다가갈 수 없는 것들과 그것을 갈망하면 살아가는 일상적 삶이라는 환경이 만들어내는 간격(interspace)이 실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 반면에 「framed time」은 말 그대로 이미지가 사라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blind color」에서처럼 중력의 작용이 아니라 무중력 상태를 언급하는 듯한 작품이다. 관객이 작품 앞에 서있으면 관객의 이미지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진 관객은 고정되지 않은 시간 간격을 두고 화면에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인터액티브라기보다는 관객이 쓰는 동영상 이미지의 산문이 될 수 있는 그런 경우이다. 웹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움직임은 임의적인 시간차를 두고 화면에 다시 재생된다. 여기서 물론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일정한 프로그램이 기반이 되어 동영상 이미지의 사라짐과 나타남이 반복이 되지만, 그 반복이 전적으로 프로그램의 지배를 받는다기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구현되기 때문에 '관객의 참여'라는 조건이 좀 더 중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완벽한 인공지능이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결과가 이미지로 제시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과 작품이 완전히 자유로운 시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소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안에서의 어느 정도의 자유만이 허용된다는 면에서 '산문적' 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런 면에서 이태훈의 작품을 '프레임에 의거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작가에게 가시성(visibility)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 가시성은 앞에서 언급한 디지털 이미지의 편집수정(retouch)의 작업과 만나면서 리얼리티의 문제에 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즉 우리 앞에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행위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리얼리티의 조건들을 얼마만큼 충족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어 아트의 감각적 현실이 우리 삶의 물리적 현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을 수 있게 만드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태훈_doubleness_람다 프린트_37×61cm_2009
이태훈_airplane no.07_람다 프린트_42×61cm_2009

이태훈의 사진 이미지들(그의 사진은 이중노출을 통해 아날로그적으로 생산한 이미지이다)은 한국화에서 마치 화선지에 물감이 번지고 주변에 물기를 남겨놓듯이, 어떤 대상에 대한 표현적 언어를 작가의 예술적 욕망에 관련된 이미지 언어로 변화시키는 과정의 여백에 관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욕망은 비가시적인 것이다. '비가시적인 가시성'(invisible visibility)은 그의 작품의 내용적인 주제가 된다. 비가시적인 것들이 가시적인 현실과 맺는 관계가 작품을 이미지의 차원에서 문화적인 텍스트(text of cultures)의 차원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 속에는 삶을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삶이 현실이고, 현실이 삶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현실에 대한 인식이 곧 삶이 되는 것이다. ● 이 같은 인식의 기저에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조건들을 가진 인간이라는 한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 전제들 속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현실의 본질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디지털적인 환경에서 본질마저도 변화의 과정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미학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작가적인 의지의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삶과 관련된 본질의 표현, 즉 인간적인 행위의 감각적 본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태훈_photosynthate ver.02 (이태훈, 전영재)_인터렉티브, 혼합설치_40×50×55cm_2009
이태훈_framed time (이태훈, 전영재)_가변사이즈, 인터렉티브, 혼합설치_2009

미디어 아트에서 분열과 종합은 어떤 면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적 차이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미 종합된 상황에서 분열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분열적인 현실에 대한 종합적인 상황인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적 기술을 통해 미디어적 편집수정행위에 접근하는 이태훈의 사진 이미지들은 한편으로 작가의 수동카메라에 대한 기술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적인 감성으로 이미지의 순간들을 담아내는 사진의 물리적인 현전(presence)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 이태훈의 사진이미지들은 분열과 종합의 경계를 넘어 이미 알려져 있지만 볼 수 없고,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달리 말하면 욕망의 언어들, 개념적인 비전들, 감각의 장치들 같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휘들이 표현적인 정당성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 이태훈의 작품에서 의미는 이미지를 포용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이미지들의 현전이 우리 인간의 경험에 선행하는 선험적인(a priori)인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아날로그적인 장치를 통해 생산된 이미지일지라도, 그 이미지를 경험 이전의 감각과 사유에 직접 연결시키려는 디지털적인 표현적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의 역사에서 작가들은 이미지를 그들의 모든 감각적 조건들에 선행하는 보편적 인식론(universal epistemology)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해 왔고, 관객들에게는 그것이 미술사적인 해석의 지평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의미의 필요조건이었고, 우리 보편적 인간들은 미술을 사유적 행위의 도구로서 혹은 지각적인 의미체로서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가 전통매체 예술작품들(미디어 아트 이전의 회화와 조각 등을 지칭함)과 다른 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시간,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시간, 감각의 작용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활성화되는 시간이 미디어 아트의 존재론적 근본조건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의 아날로그적인 사진 이미지마저도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유사성을 통해 미디어적 감수성과 조건들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이다. ●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태훈의 동영상 미디어 작품과 아날로그 사진작품에서 현실이 존재할 수 있는 객관적 시간의 구조틀(framework)과는 다른 현상적 시간의 부유와 기호론적인 실체의 부재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통해 생산된 이미지에서조차도 사실적인 기계적 진행 구조가 더 이상 이미지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해석의 장치들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보편적인 미디어 아트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태훈의 작품 역시 감각적 실체가 물리적 현실과 어떤 방식으로 대응되고 있는가. 감각적 대응의 세계를 통해 이해되는 삶의 발생론적 상황들이 어떻게 감각적인 표현성의 장치가 되고 또한 미학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미디어의 존재론적인 특성을 떠나 좀 더 미학적 보편성의 차원에서 볼 때 그에게 현실은 가시적인 비가시성일 확률이 훨씬 더 강한 문제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 정용도

* 모든 Interactive Media Installation 작품은 전영재(programmer)와 공동작업 입니다.

Vol.20090805h | 이태훈展 / LEETAEHOON / 李泰勳 / photography.performanc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