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ifference In Viewpoints Ⅱ

김건일展 / KIMGEONIL / 金建一 / painting   2009_0721 ▶ 2009_0729

김건일_我之爲我 自有我在_한지에 혼합재료_100×400cm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312e | 김건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0721_화요일_05:00pm

입장차이Ⅱ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KEPCO PLAZA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82.2.2105.8190 www.kepco.co.kr/gallery

입장차이의 존재지평 - 왜상을 통한 의미의 미학 ● 한 관객이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전시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전시된 작품들을 한눈에 담을 듯이 훑어보면서, 이내 한 작품 앞에 걸음을 멈춰 선다. 나름, 감상에 알맞은 거리라고 여겨지는 한 지점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작품을 정면에서 이리저리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무엇을 그린 것일까? 어떻게 감상해야 되는 걸까? 아마도 김건일의『A Difference In Viewpoints』전시회를 방문하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받는 첫 인상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김건일의 작품 앞에서 당황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사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실적인 그림도, 그렇다고 아예 형태가 사라진 추상적인 그림도 아닌 재현적인 대상과 일그러진 형태가 범벅이 된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 이번 전시회에서 작가가 선보이는 작품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형식적인 특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재현된 대상들이 일그러진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왜상(歪像, anamorphosis)이라는 조형성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 작품을 바라볼 때 정상적인 상으로 보이게 하는 회화의 기법으로서 왜상의 표현은 코르넬리스 안토니스가 그렸다고 전해지는「에드워드 6세의 초상」(1546년)이나 홀바인의「대사들」(1533년)에서 보이는 일그러진 두개골 그림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리 자주 접하게 되는 조형기법은 아니다. 물론 이와 같은 서양미술사상 왜상의 표현은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과 무관하지 않다. 즉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평면에 옮기면서, 실제의 대상이 있는 그대로 재현되듯 그려내는, 미술의 과학으로서 원근법은 주지하다시피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이자 이 시대가 이룩해 낸 미술상의 업적이다. ● 서양회화에 있어서 조형적 특성으로서 왜상의 원리는 기하광학과 관련이 있다. 즉 대상의 외관의 크기는 눈으로 보여 지는 시각의 크기에 비례해서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때 대상은 어느 방향에서든 눈에서 멀어짐에 따라 작게 보이게 된다.

김건일_A Difference In Viewpoints_한지에 혼합재료_100×200cm_2009

그러나 원근법에서는 평면상의 투영상으로 얻어지기 때문에 각도에 의한 크기와 투영상의 크기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면상의 투영상을 투영의 중심에서 바라보아 그 각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투영상의 크기를 자연스런 단축에 의해 화면상에서 본래의 상태로 보이게 하는 조형적인 '시각적 보정'(eurhythmia)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하광학 및 원근법과 관련된 회화상의 왜상 원리이다. 물론, 이와 같은 시각원리로서 원근법적 시각보정은 이미 고대 그리스의 미술가들에게 있어서도 시도된 바가 있다. 예를 들어 피디아스가 올림푸스 신전에 봉납되는 14m의 옥좌에 앉은 거대 제우스 상을 제작할 때, 완벽한 비례의 재현을 위해 의도적으로 전체상의 비례를 왜곡시켜 정상적인 비례로 보이도록 한 일화에서도 발견된다. ● 그러나 서양미술사상 왜상의 조형기법을 구사한 근대시기의 회화작품과 고대시기의 조각상이 각각 전자가 수수께끼 같은 의미 파악을 목적으로 하고 후자가 이상적인 완벽한 재현을 의도한 것이었다면, 김건일이 추구하는 왜상의 조형기법은 이것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왜상의 구사는 그저 시각적인 측면에 매달려 조형상의 형식적인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왜상의 형식 너머에 있는 의미의 전달을 강하게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건일_욕망_한지에 혼합재료_100×160cm_2009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건일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마치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의 제작 중인 제우스 상과 마주하여 왜곡된 비례에 당혹해 하는 당시 그리스인들과 동일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것은 김건일의 작품을 형식적인 조형상의 시각적인 그림으로 대하려는 우리들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왜상이라는 조형적 기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평소에, 작가가 자주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다는 석도화론의 한 구절 '我之爲我, 自有我在'(내가 나답게 되는 것은 자신이 자각적으로 존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에서처럼, 작가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며 자신의 고민에 감상자들 또한 동참하기를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자신의 시각에 서 모든 사물을 자기 식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동일한 사물도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건일이 작품에서 제시하는 왜상은 이러한 사물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인식태도를 되짚어 보는 동시에 사물 자체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의 출발이기도 하다. 물론 이 물음은 작가 자신에 속하면서도 우리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서 인식주체와의 페어 시스템인 객체적인 대상적 존재까지 아우르는 철학적인 성찰로 읽혀진다. ● 왜상 기법을 조형적인 축으로 하는 김건일의 이번 개인전은 초상화와 정물화라는 회화상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언제나 그랬듯이, 전통을 자기만의 조형언어로써 소화해 낸다. 초상화의 경우, 재료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작가에게 친숙한 재료인 전통 한지를 사용하여 묘사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던한 재질인 비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등 재료 활용의 제약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거기에 두 인물을 겹치게 묘사하여 일그러진 형태를 이끌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정면이 아닌 측면의 특정한 시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도록 권유한다. 특히 사랑하는 부인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한 화면에 그려 넣은 자기 고백적인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현재성을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사선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중적 표현의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통령 시리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또한 작가 자신을 찾는 존재론적인 작업으로써 기억의 단편을 대통령이이라는 특별한 상징적 인물을 통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기억해 내는 모티브로서 작용시킨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의 말처럼 모든 예술이 모든 시대에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자신의 과거는 시대를 대표했던 또 다른 존재로부터 기억되고 있다.

김건일_갈 수 없는..._한지에 혼합재료_40×135cm_2009

그러나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뜨거운 피로써 예술을 제작해 내듯이, 타인으로부터 기억되는 과거 또한 작가에겐 더 이상 타인의 것이 아니다. 과거 역시 지나간 시간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의 대화이며 자신이 존재케 되는 근거이자 지나간 현재로서의 이중적 시간인 것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이중적 상황을 투명한 비닐 위에서, 보이는 것과 그 뒤에 중첩되어 흐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왜상으로 그려내어, 하나의 고정된 시선 즉 정면에서 바라보는 감상태도를 은근히 거부하고 있다. ● 이번 김건일의 개인전에서 다루고 있는 두 번째 주제는 정물화이다. 미술사적으로 정물화의 등장은 동양의 경우, 고동기(古銅器)나 자기에 꽃가지나 과일, 문방구류 등을 함께 그린 잡화(雜畵)로서 오대말에서 송대에 이르러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로 발전된 문인사대부들의 취미와 깊은 관련이 있는 장르이다. 그러나 서양에 있어서 정물화는 풍경화와 비교되어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라고 평가절하 된, 즉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의 위계상 가장 낮은 서열의 장르라고 규정되면서 그 지위가 미미한 것으로 취급된 장르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서민들의 검소한 물품들을 그려내는 등 민중의 진솔한 삶과 여유를 보여주는 장르라고 그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은 회화상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건일이 묘사하고 있는 정물화는 이와 같은 동서양의 전통적인 정물화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정물은 더 이상 죽은 자연의 일부도 아니며 고급취향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한껏 꽃망울을 머금은 현란한 색채의 식물로서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화면 위, 아래에 왜상으로 표현된 욕망 주체의 손과 발에 의해 관계를 맺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욕망 객체임을 주장하는 작가의 표현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김건일_가질 수 없는..._한지에 혼합재료_40×135cm_2009

이렇듯, 김건일은 자신만의 조형언어로써 자신의 존재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대상적 존재에 대해 의미의 지평을 펼치고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 알듯 모를 듯 표현된 왜상의 이미지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무질서한 형상으로서 엔트로피(entropy)가 아니다. 그것은 이와는 정반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의 정보로서 네겐트로피(negentropy)이다. 특히 작품을 정면에서 감상하는 일반적인 작품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의 이 귀퉁이 저 귀퉁이를 옮겨 다니면서 왜상의 조형 너머의 의미를 파악하게끔 유도하는 작가의 의도는 완성된 작품을 정태적으로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모더니즘적 감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적극적인 감상 태도로써 창작활동에 버금가는 미적 활동의 또 다른 영역에 동참하는 즐거움이 제공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된 작품구상에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그 대상적 존재의 면면을 낱낱이 밝히기 보다는 대상과 존재론적으로 일체가 되려하는 동양의 사의(寫意) 정신을 읽었다면 무리일까? 다원주의 시대에는 다원적인 예술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통 동양화의 기법이나 재료에 제한받지 않고 - 특히, 왜상의 일차적인 형태는 컴퓨터에서 얻어 내지만, 전체 작업은 아날로그적인 수작업에 의해서 완성시키는 - 실험적인 조형 활동으로써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재창출하고 있는 김건일의 작업은 언제나 활기차고 기대감이 넘친다. 작가의 다음 전시회가 기다려진다. ■ 이승건

Vol.20090719b | 김건일展 / KIMGEONIL / 金建一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