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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716_목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3:00pm
백악미술관_BAEGAK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82.2.734.4205 www.baegak.co.kr
松民 서예의 미학적 원형사유와 그 메타포적 세계 -Ⅰ. 松民 서예의 미학적 원형사유 ● 내가 목도 한 많은 사건들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작은 사건 하나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꼭 이맘때의 일로 기억된다. 2002년 6월 한 학기를 막 마무리하여 가는 즈음, 경기대 서울캠퍼스(서대문)에서 개최된 한국서예학회 춘계학술회의가 끝난 뒤 두 번째 뒷 풀이로 맥주파티가 벌어지던 때였다. 호프집이 2층인데다 마루 바닥인지라 걸음을 걸을 때 마다 큰소리로 울렸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아래층 길가 쪽에서 대중들의 웅성거림 속에 고함소리도 함게 섞여 들려왔다. 그 자리는 성균관대와 경기대 대학원생들 간 친교의 어울림자리였던 셈이었다. 이윽고 여러 학생들이 아래층으로 우루루 내려갔다. 나 또한 책임자적 위치에 있었던 터라 황급히 따라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두 학교 학생 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Leonardo da Vinci)처럼 탐스럽게 가꾸어진 머리에다 키가 크고 우람한 체구에 둥그렇게 빛나는 눈동자의 학생과 키는 작지만 앙팡지고 다부진 체구에 광채로 빛나는 풍윤한 이마의 학생이 앞가슴을 열어 제치며 이름도 거룩한 사나이의 패기를 겨루는 중이었다. 여러 학생들의 만류로 승부는 중도에 보류되었지만, 그 때 다빈치 머리형의 그 사나이가 자못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음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후에도 필자의 뇌리에서는 그 때 그 사나이의 겸손하고 의연했던 모습이 지워지질 않았다. 인연은 묘한 법이라, 그 때 그 다빈치 머리형의 사나이가 지금 나와 함께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학문 길을 동행하는 松民 同學이 아닌가! 그 때 松民이 보여준 그 겸손과 의연함은 송민이 나에게 행동으로 직접 읽혀준 松民의 神話이며, 나에게서 이루어진 松民에 대한 최초의 立象이다. 그 후 내가 송민을 떠올리거나 대할 때마다 그 때 그 모습이 떠올려지는 것은 그 때의 松民象이 나와 송민을 연결해 주는 교량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겠다.
나의 생각으로 神話란 특수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만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나 창조되고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신화는 곧 개개인이 갖고 있는 원형적인 만남의 이야기요. 원형 그 자체의 활동작업에 대한 메타포(metaphor)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화는 필경 자신과 타자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충동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정체를 밝혀주는 수단이면서, 그 원형적 사유와 결부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신화창조를 유도할 수도 있고 예단해 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화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이야기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감정과 우주 하나 하나의 요소들이 교차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신화는 계속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다시 松民이 새롭게 창조하는 書藝展의 신화는 지난 7년 전의 작은 신화의 또 다른 모습으로의 재현이면서, 송민 서예세계의 정체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 나는 7년 전 송민이 보여준 작은 신화를 통해서 송민의 생활윤리미학과 예술창작미학의 원형적 사유를 읽는다. 내가 읽고 있는 송민 내면세계의 미학적 원형(archetype)은 "謙遜"이다. 겸손은 본래 윤리미학의 개념이지만, 송민에 이르러서는 예술창작미학의 개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王陽明의 생각을 빌려 말하면, 傲慢은 인생최대의 病이며, 오만하면 사람다운 사람의 행위를 할 수 없다. 사사로운 마음을 비우고 無我의 경지에 든 사람만이 사람다운 행위를 할 수 있으며, 무아의 경지에 든 사람은 스스로가 겸손하다. 그리하여 "겸손은 衆善의 기본 토대이며, 傲慢은 衆惡의 주모자"(謙者, 衆善之基, 傲者 衆惡之魁)라고 말한다. 松民은 바로 王陽明의 윤리미학적 원형사유를 서예창작 미학적 원형사유로까지 확대하여 "겸손은 서예 衆美의 기본 토대"라는 입장에서 서예를 창작한다. ● 마음을 비운 사람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않으면서 겸손하다. 구분 짓지 않고 겸손한 사람은 그 어느쪽과도 소통할 수 있다. 전통과도 소통하고 시대와도 소통할 수 있고, 중국과도 소통하고 일본과도 소통할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면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고, 당당하고 의연하면 용기가 있을 수 있으며, 용기가 있으면 試圖할 수 있고, 시도하면 창신 할 수 있다. 송민의 서예가 기세 당당하고, 字體가 의연하며, 변화를 시도하는 용기가 있고, 전통과 시대를 아우르되, 그 참신성을 잃지 않는 까닭은 송민의 미학적 원형 사유로서의 '겸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송민이 추구하고자 하는 서예 창작의 조형적 자유가 亂의 경지에 이르고자 해도 손과정의 소위 "違而不犯"의 한계를 차마 넘어서지 못하는 까닭 역시 그의 미학적 원형사유로서의 겸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송민 서예의 미학적 원형의 일관된 사유를 "겸손"이라고 말한다.
Ⅱ. 松民 서예세계의 미학적 메타포 ● 松民은 나에게 최초의 신화를 보여 준 이후 보다 새롭고 본격적인 서예전을 마련함으로써 또 다른 형식의 신화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금번 松民 서예전은 그의 원형적 만남의 이야기이며, 그의 원형자체의 작업에 대한 메타포라 하겠다. 필자가 말하는 원형은 융(C.G.Jung)의 원형론에서 일컬어지는 원형이며, 사전적 의미로 말하면 인류의 정신 속에 유전된 요소로, 본능과 연계된 심리학적 실행의 패턴들이나, 그 자체로서는 표현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그러나 재현을 통해서만이 분명해 진다는 가설적 실체이다. 다시 말하면 원형은 살아있는 實在로, 무수한 想念들의 先形成(preformation) , 혹은 지배적 心象들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금번 송민의 서예전은 그의 원형의 재현이자, 그의 구체적인 신화의 형식이며, 그의 원형 자체의 작업에 대한 메타포라고 말하겠다.
(1) 나는 松民의 서예세계에서 相反的 對待要素들의 相生的 妙合의 아름다움을 만난다. 우리 한국인은 적어도 意識上에서만은 檀君의 후예이다. 단군은 호랑이와 곰의 사람 되고자 하는 소원에 따라, 곰의 인내로 人化된 熊女와 天神인 桓雄의 假化된 男性과의 만남에서 태어났다. 檀君이 天神인 桓雄의 神性과 짐승인 熊女의 獸性으로 妙合된 二重性的 소유자인 이유다. 다시 말하면 단군은 神性과 獸性의 妙合者요, 天理와 人慾의 묘합자요, 절제와 자유의 묘합자요, 理性과 野性의 묘합자요, 神明과 身命의 묘합자요, 靈과 肉의 묘합자요, 雅와 俗의 묘합자다. 필경은 상반된 極과 極의 묘합자요, 相反對待性의 묘합자라고 하겠다. 한국인은 好惡가 뚜렷하고 哀樂이 뚜렷하고 善惡이 뚜렷하고 기망이 뚜렷한 이유를 단군을 통해 알 것 같다. 松民은 단군의 후예다운 서예가다. 송민의 서예세계는 相反的 對待의 要素가 뚜렷하면서도 모순의 갈등 없이 상생적 묘합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내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點과 畫의 大小·長短·粗細·强弱·高低·厚薄등의 관계와, 運筆上의 疾徐·收起·走往·回藏·緩急·輕重·轉折·偏正·藏露등의 관계와, 章法上의 布置·隱現·虛實·有無 등의 관계사이가 뚜렷하면서도 그들 간의 조화·통일을 통한 상호 불가분적 묘합의 全一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한다. ● 松民의 이러한 서예의 창작활동은 자각적이든 부자각적이든 그의 내심에 자리 잡고 있는 미학적 원형사유에 근거한다. 다시 말하면 같은 同種, 同質性간의 만남은 새로운 생명과 가치와 아름다움 을 결코 창출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극과 극의 만남에서만이 비로소 새로움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이와 동시에 그들 새로운 생명·가치·아름다움 창출의 중심에는 언제나 겸손이 자리해야 한다는 송민의 미학적 원형사유에서 출발한다. 한국인의 언어 문법적 체계가 '사람', '승강기', '빼닫이'등 명사적 용어가 남녀 양성을 내포하고, 오르고 내림을 지시하고, 빼고 닫음을 묘합하면서 쌍방향적 통행과 소통성을 아울러서 표현하거나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송민이 창작한 한폭 한폭의 모든 서예작품이 이들 극과 극의 對待的 요소들 간의 쌍방향적 통행성과 묘합된 아름다움의 파노라마(panorama)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필경 송민의 미학적 원형사유의 재현이면서, 송민의 서예세계가 내함하고 있는 일종의 메타포라 하겠다.
(2) 나는 松民의 서예세계에서 멋으로 흐르는 바람을 듣는다. 松民의 서예세계에서 추구되고 있는 상반적 대대성의 묘합활동은 언제나 새로운 서예의 창조이자 변화이지만, 개념과 언어로는 설명키 어려운 그의 원형적 사유활동 그 자체라고 말하겠다. 松民의 원형성 속에 잠재되어 있는 神性과 獸性, 理性과 野性등의 묘합활동은 때론 서예창작 상에서 강렬한 野性의 逸脫바람을 일으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가 일으키고 있는 야성의 바람은 그의 미학적 원형사유가 靈과 肉의 雙全, 神明과 身命의 雙暢 활동을 지향함으로써 끝내 "違而不犯"的 멋으로 흐르는 신명바람으로 悠悠自適한다. 송민의 신명바람은 구체적인 시대의 생활 속에서 나와 다른 쪽과 함께하기를 요구하는 놀이문화의 형식을 통해 忘我之境의 悅樂을 성취해가는 한국적 풍류미학으로 승화되어가는 바람이라 일컫는다. 단군의 후예 松民이 창작한 서예세계에는 배달민족이 그 太初부터 바람(風)과, 물(雨)과 구름(雲)을 함께 했던 풍류정신이 유유하게 흐른다. 스스로 유유자적하는 바람과 물과 구름의 흐름 같은 風流는 松民의 미학적 원형활동 그 자체의 본래 모습이다. 바람과 물과 구름이 그 유유자적하는 흐름을 멈추면 그 생명이 상실되듯, 송민의 서예세계에 풍류정신의 흐름이 멈추면 松民의 서예는 그 생명이 상실된다. 松民의 서예세계에 전개되는 풍류놀이는 그의 神明과 身命, 혼령과 육신의 묘합적 몰입에서 이는 신명나는 멋의 신바람이다. 송민의 신명나는 멋의 신바람은 因果관계를 넘어서는 卽興의 바람이며, 그의 육신과 혼령이 시대와 함께 부대끼며 이는 우연성의 바람이다. 그리하여 투명하도록 마알간 가슴으로 느껴보면 松民의 서예세계엔 겸손의 윤리와 풍류적 유희와 멋의 耽美의 三位一體的 묘합을 통한 故鄕의 再現을 발견한다. 윤리와 유희와 탐미의 묘합으로 추구되는 송민의 서예세계엔 그가 어린시절 靈肉의 부대낌을 함께했던 忠南 靑陽의 전설과 바람이 서리고 있다.
(3) 나는 松民의 서예세계에서 마음의 故鄕을 逍遙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조국과 고향이 있고, 대를 이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있으며, 마음과 머리를 향하는 마음의 고향이 있다.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적 주제들이 조국과 고향과 삶터와 心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유이며, 예술적 정체성의 발원지요 구심점이자 原籍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송민의 내심에 자리 잡고 있는 원형사유의 구체적인 모습은 그의 어릴적 故鄕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그의 고향은 靈肉으로 함께 부대껴왔던 꿈과 낭만과 고난과 실의가 하나로 범벅된 황홀한 渾融體다. 松民의 內心에는 고난의 현재적 삶속에서도 늘 자연과 함께 하려는 초월적 감성의 풍류적 성향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도덕과 그 실천을 自律하려는 이성적 규범사유로서의 겸손이 묘합된 神性, 그리고 동물적 충동본능에 충실하려는 즉흥적 야성이 묘합된 원형적 사유가 황홀한 고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성과 야성을 동시에 추구하려는 松民的 원형활동은 隨時隨處에서 직면하는 시공적 조건에 따라 변화막측한 偶然性으로 들어난다. 송민의 서예 세계 속에 내함되어 있는 메타포적 성향들이 고향을 주제로 하여 고향의 인심, 고향의 풍속, 고향의 자연 등등 모두가 고향의 냄새를 담아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특히 송민의 한글서예는 온통 고향의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그의 한글서예에 담겨 있는 메타포적 성향들이 현재와 과거의 고향에 대한 그림자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송민에게서의 고향은 그가 태어나 언어와 문자를 함께 했던 祖國이며, 때론 어린 시절 꿈과 낭만을 불태웠던 어머니의 가슴 같은 옛 시골마을이며, 때론 삶을 위해 생활을 펼쳐왔던 삶터이며, 때론 마음 속으로 그리는 이상향이다. 이 모두는 그의 고향이며 모든 사람의 고향이기도 하다. ● 漢文서예이든 우리말 한글서예이든 송민 서예세계의 樣態(점획, 결구 장법 문장)는 神獸의 경계를 넘나드는 즉흥적 묘합활동이고자 하며, 그들 묘합활동의 직각적 즉흥성은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서예미학적 고향이다. 그리하여 그의 서예세계에는 직각적 즉흥성의 발동에서 가식 없는 본디 모습으로서의 소박성이 드러나고, 때론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해학성으로 드러난다. 이런 속에 雅와 俗이 혼재하고 있다. ● 총괄하여 보면, 신성과 야성의 묘합적 재현이고자 하는 松民의 원형적 사유활동은, 현실의 과도한 제약과 절제로부터 야기되는 삶의 속박 내지는 예술적 생명 상실에 대한 위기감에서 저항하고 거부하는 反動의 의미로서의 '反作用'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도덕성적 책임에 대한 확인을 통해 자기 본래성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返作用'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는 '違而不犯'의 경계선을 넘지 않으면서 造作的 恣行의 '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意志가 서예세계를 일관하고 있다.
Ⅲ· 書運과 學運을 빈다 ● 사람이면 누구나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欲望이 있다. 이런 욕망은 純粹欲望으로 私慾과는 다르며 누구나가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하는 참된 꿈이다. 私慾을 버리면 누구나가 强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無慾則剛"이라 말한다. 私慾을 버리면 純欲만이 남으며, 純欲은 곧 자기 전문분야에 대한 熱情으로 타오른다. 純慾의 열정에는 반드시 성공이 擔保된다. 설사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眞理이다. 松民 同道 同學의 書運과 學運을 빈다. (三乎齋에서) ■ 송하경
Vol.20090718g | 송민 이주형 / SONGMIN LEEJUHYONG / 松民 李周炯 / calli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