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7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아카 스페이스_AKA SPACE 서울 종로구 소격동 76번지 인곡빌딩 1층 Tel. +82.2.739.4311 www.misoolsidae.co.kr
순수, 성적 판타지와 희생양 ●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결여와 결핍에 있음을 증언해주는 사례로서 성적 판타지만한 것이 또 있을까. 사실 성애는 실제보다는 판타지를 통해서 완성된다. 최소한의 사실과 실제를 근거로 하여 환상과 상상을 일궈내는 기술인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기 위해 너는 기꺼이 나를 위한 사물이 되어줘야 한다. 이처럼 인격체가 한갓 사물로 전이되거나 전락할 때 패티쉬가 발생한다. ● 장 폴 사르트르에게서 주체는 이런 물화된 인격체를 예시해준다. 나와 너는 결코 동등한 주체 대 주체로서 만날 수가 없다. 내가 너를 본다는 것은 너로부터 인격체를 빼앗아 너를 객체화하고 대상화하고 사물화한다는 것이다. 네가 미처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물이 될 때 비로소 나는 너의 몸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탐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철저히 사물화되지 못한 채 나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나는 수치심을 느낀다. 이처럼 수치심을 느끼는 존재의 순간으로부터 주체가 발생한다. 주체란 누군가가 나를 훔쳐보고(혹은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인식이 내 속에 심어놓은 상상이다.
나는 그 주체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너는 철저한 사물이 되어줘야 하고, 나는 나대로 철저한 관음증자(관음증적 기관 혹은 기계)가 돼야 한다(기계는 의식이 없고, 주체기계는 의식하지 못한다). ● 결국 네가 사물화되는 것과 내가 주체기계가 되는 것은 서로 연동돼 있다. 그러나 네가 사물화되는 것도, 그리고 내가 주체기계가 되는 것도 일상 속에서 실제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런 연유로 주체의 욕망은 쉽게 사물화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하게 된다. 이를테면 순진한 것들, 순수한 것들, 순진무구한 것들, 때 묻지 않은 것들, 더럽혀지지 않은 것들, 수동적인 것들, 연민을 자아내는 것들을 겨냥한다. 순수한 것은 욕망을 자극하고 강화한다. 로트레아몽은「말도로르의 노래」에서 아기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를 보면 긴 손톱으로 할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성애는 살해와 폭력과 린치 충동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다. 나는 너를 사물화하고 싶다는 충동으로부터 사드(사디즘)가 발생한다. 나는 너를 인형처럼 가꾸고 보살피고 싶다는 애완충동, 연민을 자아내는 유아성애,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성적 정체성이 욕망을 자극하는 롤리타신드롬이 모두 순수한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성적 판타지와 관련이 깊다. ● 파스텔 색조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느낌의 화면 위에 어린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자기 생각이나 놀이에 빠져있는 어린아이들이 천진하고 순수하고 귀엽고 예쁘고 깜찍하다. 그렇다면, 양희의 그림은 그저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리틀마릴린신드롬이나 롤리타신드롬, 그리고 윗방아기를 주제로 한 것이다. 핀업걸의 대명사로 알려진 마릴린, 불안정한 성적 정체성이 욕망을 자극하는 롤리타, 사대부 양반 가문의 어르신에게 양기를 보충할 요량으로 바쳐졌던 윗방아기를 겨냥한 성적 판타지가 투사된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천진하고 순수하고 귀엽고 예쁘고 깜찍한 것은 단지 어른의 시점일 뿐이며, 아이들을 사물화하려는 어른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 속 아이들은 말하자면 그 욕망 아래 사물화된 아이들이며, 성적 희생양이며, 제물들인 것이다. ● 대개는 소녀들인 그 아이들은 순수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섹스머신(혹은 성적 노리개)으로서의 기교를 전수받아야 한다(길들여져야 한다). 이를테면 순수함(혹은 수동성)의 표상인 부동의 자세로써 사물화를 연기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성적 기호를 암시하는 듯한 엉거주춤한(이중적인) 자세를 교육 받는다. 특히 엉거주춤한 자세는 성적 판타지를 위한 계기로서의 불투명성과 관련이 깊은데, 이를테면 중성애자가 발산하는 성적 매력이 이와 무관하지가 않다. 그리고 의태에 바탕을 둔 일종의 흉내 내기로서, 엉덩이를 곧추 세운 채 뒤로 쑥 내민 고양이의 기지개 켜는 자세를 학습한다. ● 이 일련의 입문과정에서 순수함은 아이들의 몸값이며, 그 순수함을 잃을 때 아이들은 버려진다. 순수함 자체는 에너지(양기)의 일종이다. 실제로 어른들에 의해 양기를 빼앗긴 아이들은 쉬이 조로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들의 입문의식으로부터 추후 전개되는 일련의 전 과정이 일종의 띠 그림으로 표현된다.
각각 가로 줄무늬 그림과 세로 줄무늬 그림 속에 아이들을 배치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그 단계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아이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점차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그리고 마침내는 버려진다. 그 세계는 발이나 차양이나 블라인드처럼 열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닫혀있는 이중구조로 축조돼 있어서 안쪽에서 바깥을 볼 수는 있지만, 바깥에서 안쪽을 볼 수는 없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항상 이렇게 바깥으로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안쪽으로 잠겨있다. 판옵티콘처럼 나는 너를 볼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통하면서 격리된 벽 속에 성(性)이, 신(神)이, 죽음이, 남근이, 권력이 거주한다. ● 그 권력을 표상하는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이 조각된 빅토리아풍의 장식장(혹은 화장대) 위에 소녀가 무슨 소풍 나온 아이마냥 걸터 앉아있다. 뒷모습을 보이며 망연하게 그림 안쪽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나 반쯤 기운 자세로 엎어져 있는 소녀의 얼굴은 아마도 어른에게 양기를 다 빼앗기고 버려진 애늙은이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그림 속 아이가 그저 천진하거나 연민을 불러일으킬(보이지 않는 얼굴은 아이답지 않은 깊은 생각을 암시한다) 따름이지만, 이 천진한 그림 속에다 작가는 성적 제물이라는 천진하지 않은 의미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고풍스런 액자(장식장과 함께 권력을 표상하는)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장식해 소녀의 처지와 대비시키고 그 처연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처럼 버려진 아이는 다른 그림에서 구름 속에 떠 있는 아이(성에 처음으로 입문하는 아이)와 대비되는, 바닥에 주저앉아 풀이 죽어 있는 아이로 변주되기도 한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성을 권력과 동일시한다. 성이 작용하는 방식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하나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은 일종의 이중성으로서 현상한다. 성적 정체성이나 권력의 실체는 하나같이 그 대상이 불투명하거나 불안정할 때 더 강화되고 공고해진다. 여하한 경우에도 그 대상이 적나라하게 정의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 표면에 일종의 베일이 드리워져 신비로운 분위기로 감싸져야 하고, 이로써 표면이 이면처럼 읽혀져야 한다.
양희의 그림이 부드러운 색감과 함께 촉각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렇듯 그림의 표면에 드리워진 베일 때문이다. 그 투명한 베일이 성적 제물을 은폐하는(애매하게 하는) 한편, 성적 판타지를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이중성은 식물문양이 프린트된 실크의 표면에 아이를 그린 그림으로 변주된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이로써 벌거벗은 아이를 숨기면서 드러낸다. ● 이외에도 작가는 일종의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해 성적 기호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각종 자연물이 도입되는데, 조개와 식물 특히 만개한 꽃잎 형상이 여성의 성기를, 그리고 버섯류와 피어나기 직전의 물이 오른 꽃봉오리가 남성의 성기를 암시한다. 주지하다시피 꽃잎 형상은 여성 성기의 도상학과 관련한 전형적인 성적 기호로 널리 알려져 있고, 버섯 역시 팔루스(남근)를 연상시킨다. 이로써 그림 속 소녀는 꽃밭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호시탐탐 자신을 탐하는 성기들의 공격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알 듯 모를 듯한 그녀의 표정 역시 알고 보면 성적 호기심이 아니라, 뜻 모를 폭력에 대한 당혹감에 연유한 것임이 밝혀진다.
양희는 이처럼 그저 순수하게만 보이는 어린아이들 그림에다 성적 희생양이라는 순수하지 않은 의미를 중첩시켜놓고 있다. 성은 어른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을 넘어 성과 어린아이를 결합시킴으로써 평범할 수도 있는 그림 속에 평범하지 않은 서사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처럼 어린아이를 향한 어른의 욕망이 순수한 판타지가 아닌, 그 자체 적나라한 현실임을 드러낸다. 흔히 산삼보다 고삼이, 그리고 고삼보다 중삼이 몸에 좋다는 공공연한 속설이 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그 연령대가 초딩으로까지, 그리고 초딩을 넘어 갓난쟁이까지 낮아질지도 모른다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 한편, 순수한 것을 더럽히고 싶다는 욕망은 성적 욕망인 동시에 존재론적 욕망이기도 하다(이는 특히 희생제의와 정화의식과 관련이 깊다). 거대담론의 지점들, 이를테면 신, 형이상학, 진리, 진실은 모두 이처럼 순수한 것들이 흘린 피 위에 축성돼 있다. 어쩌면 폭력(순수의 희생)과 성스러움(순수)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의 양면(성)인지도 모른다. ■ 고충환
Vol.20090715g | 양희展 / YANGHEE / 梁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