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714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공휴일 휴관
대안공간 풀_ALTERNATIVE SPACE POOL 서울 종로구 구기동 56-13번지 Tel. +82.2.396.4805 www.altpool.org
88만원 세대의 정치적 잠입액션 ● 메탈기어 솔리드. 작년 인미공 전시 때 제목이었던 「서울특별시 전 방위 방어 요격시스템」이라는 제목과 은근히 대구를 이루는 이것은 소위 '잠입액션'으로 분류되는 컴퓨터 게임의 이름이다. 이 게임의 요체는 대규모 전투나 스펙터클보다는 적진에 몰래 잡임하여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적군을 많이 죽이거나 건물을 부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상현은 자신의 작업이 기반하고 있는 것이 일종의 오타쿠 정서라고 말하며서 이 게임을 거론한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보면 게임 화면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직접 접하는 것은 허구적이거나 현실적인 자료에 기반한 건조하고 단순한 도표나 드로잉, 문서, 숫자들이다. 이 지점에서 이상현의 작업은 흥미로워진다. 그는 게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잠입의 공간으로 간주하면서 하나의 게임으로 재구성하고 있는데, 이 '게임'은 일종의 내러티브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청이 유사시 로봇으로 변신하여 핵탄두를 투하할 수 있는 비밀장치를 갖고 있다던가, 유행가 가사에 사실은 비밀요원들에게 전달하는 암호 메시지가 숨어있다던가, 기계화 게놈 부대의 사이보그 설계도면이 있다던가, 하는 허구적 내러티브를 만들고 그것을 기밀문서라는 형식을 통해 제시한다. 사실 이런 시나리오는 사실 마징가제트가 한국 로봇인줄 알았던 우리의 어린시절부터 막연히 돌아다니던 일종의 집단적 루머의 변형이다. 현실의 팍팍함 뒤에는 틀림없이 어떤 '쎈놈들'이 도사리고 있을거라는 음모 이론은 자긍심보다 피해의식을 훨씬 더 많이 키워온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낳은 일종의 괴물이다. 현대사의 상당부분이 밀실정치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 허구 속에는 진실이 들어 있다. ● 이상현의 내러티브 게임은 두 가지 층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것은 현실의 견고함이나 무게를 부분적으로 무너뜨리고 가볍게 만드는 일종의 거리두기 전략이다. 주로 패러디 형태로 만들어지는 2차 창작물은 원본의 엄숙함을 유희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원본의 영향력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는 객관화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한편으로는 거꾸로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의 견고한 객관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2차 창작물은 허구 그 자체의 견고함을 드러내보일 수 있다. 음모 이론 그 자체가 허구라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 힘을 행사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미 현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점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중적 층위 어떤 곳에 우위가 있는지, 어디에 방점이 찍혀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단일한 것으로 보였던 기호나 내러티브가 갖는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 유의미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은 「삼성과 나」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업은 삼성에 20년간 근무해온 아버지가 정리해고당한 일이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입시켜준 삼성 라이온즈 서포터즈의 기억, 가족이 살던 집의 재건축 시공사가 삼성으로 결정되자 어머니가 기뻐하던 일, 레미안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 가족이 빌린 대출금 액수 등등, 말 그대로 개인사와 가족사에 얽혀있는 '삼성과 나'의 관계를 소재로 삼는다. "삼성을 비판하는 작업을 하는 나는 삼성이 보조해준 학자금으로 학교를 다녔다"라는 작가의 고백성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 분열이나 모순의 차원은 한층 더 강하게 드러난다. 이 분열을 드러내기 위해 이상현은 역시 잠입액션의 전략을 사용한다. 「서울시...」보다 간접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잠입이라는 개념에 더 걸맞는 전략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생활이라는 은밀한 곳에 '잠입'하는 자본의 논리를 추적하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는 도표나 수치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고통이나 쾌락의 양을 조사하는 것이다. 레미안 아파트를 찍은 위성사진, 아파트 평면도 위에 대출비율과 이자비율을 그래픽화한 것, 결혼정보회사가 요구하는 좋은 신랑감의 조건에 대한 채점표, 상위 5퍼센트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로 만들어진 드로잉 등은 이 작업을 위한 일종의 키워드 역할을 한다. 이 키워드들은 일종의 중층결정적인 기호들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기호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뉘앙스가 응축되어 있는데,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상현은 그것들을 곱씹으며 반복한다. 예를 들어 삼성에서 정리해고당한 아버지가 받은 감사패에는 최대한 우호적이고 감동적인 문구가 적혀 있다. 작가는 이 감사패를 다시 한번 드로잉으로 옮기고 사진으로 찍으면서 그 모순적이고 불편한 뉘앙스를 의식적으로 곱씹는다. 간암 수술 후 아버지가 늘 앉아있는 소파와 그 옆의 화분에는 움직이지 못한 채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부모세대에 대한 연민과 현실을 바꾸거나 뛰쳐나가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냉소가 응축되어 있다. 동일한 기호의 반복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려고 트라우마를 제어하려는 노력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지점을 봉합하지 않고 드러내려는 자기반성인 것처럼 보인다. 보통 도표화나 아카이브화의 전략이 기호나 제도의 억압적 측면을 드러내거나 감성 자체의 기호화라는 현대 문화의 특성을 풍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데 비해, 이상현의 경우는 이러한 이중적 차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경우와 차이가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개인적인 삶을 사회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수치나 도표를 통해 우리는 우리 경험을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전략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또 다른 진실은, 도표나 기호, 숫자들은 삶의 고통이나 즐거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구속하고 심지어 창조한다는 사실이다. ● 「서울특별시...」와 「삼성과 나」는 묘한 대칭성을 이루고 있다. 전자는 역사적 내러티브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개인적 내러티브에 대한 것이며, 전자는 허구적 내러티브에, 후자는 실제에 근거한 내러티브에 맞물려 있다. 하지만 두 내러티브가 대칭성을 갖는 것은, 두 가지가 서로에 비추어볼 때 비로소 어떤 확인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이다. 허구는
현실에, 현실은 허구에 비추어볼 때 각자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 「삼성과 나」는 「서울특별시...」의 음모론적 세계가 편리한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내줄 수 있다. 음모론이 편리한 해결책인 것은, 여기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젝이 간파했듯이, 환상은 더 이상 도피처가 될 수 없다. 환상과 현실을 갈라놓는 간격 그 자체가 현실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삼성과 나」를 구성하는 것은, 음모 따위는 없으며 성공도 실패도 오로지 당신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자본주의의 목소리이다. 각종 성공사례로 도배된 매스컴의 이야기들은 개인이 노력만 하면 무엇이건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환상을 주입한다. 이 환상을 정말로 믿었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젊은 세대는 "너의 코리아는 나의 코리아보다 빛날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 공익광고에 냉소적 반응을 보인다. 음모론이 허구인 것처럼, 성공담 역시 허구라는 것, 아파트 살 돈과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스펙만 있으면 우리도 누구누구처럼 잘살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가 허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삼성의 비인간성을 탓하기보다 아버지의 무능력함을 탓" 수 밖에 없다.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딜레마는 그렇게 단단히 벗어날 수 있는 굴레가 아니다. 일찍이 그람시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람시가 몰랐던 것은, 인간이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도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현의 「삼성과 나」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협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왜 우리는 냉소와 자기위안 사이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지를 가장 개인적이고 불편한 지점을 곱씹는 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물론 이 작업은 어떤 대안이나 목표의 제시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인 작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젝의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가장 정치적인 행위는
'우리 자신의 환상과 대면하기'이다. 이 점에서 이상현의 작업은 충분히 정치적이다. 그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표현대로,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는, 혹은 그렇다고 오해받는 우리 세대의 접근법"을 통해 구성되는 "새로운 정치적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시 한번 '잠입액션'이라는 개념을 상기해보자. 새로운 정치적 접근방식이 '잠입'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비밀스럽게 숨어있는 어떤 것에 비밀스럽게 다가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적진에 인질로 잡혀있다면, 폭탄을 터트려서 건물을 파괴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 조선령
삼성과 나 (비윤리 가족) ● (본 작업의 제목은 GM과 정리 해고자들 간의 이야기를 그린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로저와 나'에서 따 왔습니다.) ● 나는 거대 기업이 한 개인이나 가정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우리의 삶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지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일종의 미시권력 관계를 통해 거대 권력을 바라보는 행위를 하고 있는 작업은 나와 우리가족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 후기 산업사회에서 거대 권력으로 서의 기업은, 경제영역은 물론 정치-사회 영역을 아우르며 체제 전반을 지배하는 제도로써의 기업기능과 그 역할을 가지고 있다. ● 케인즈 주의가 붕괴하고 흔히들 말하는 '신자유주의'경제가 득세한 포스트 산업 자본주의는 20세기 중반의 시민권 개념이 세워놓았던 상업화와 상품화에 대한 장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기업이 이윤 추구를 위해서라면 사회의 공공적인 부분이나 개인의 사적 부분까지 시장화 할 수 있다는 말로 결론된다. ● 작업에서 거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삼성은 가정과 각 주체들에게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작업 속 가정의 가족사를 관통하는 삼성은 가정의 지속과 위기 혹은 해체에 이르기 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각각의 개인에게 무의식적이고 밀접한 사회관계로 영향력을 행사해 모순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 나는 작업이, 이러한 기업권력의 무의식 적이고 필연적이며 모순적인 '권력 작용'이 미시권력 관계인 개인과 가정을 어떤 식으로 관통하는지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또 이에 머물지 않고, 나와 가정, 크게 보아 '우리'를 관통하는 그 모순적이고 불편한 지점들을 작업을 통해 제시 하며 자기비판의 지점 또한 찾기를 바란다. ■ 이상현
Vol.20090714d | 이상현展 / YISANGHYUN / 李相賢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