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저편

진성훈展 / JINSEONGHOON / 陳成勳 / painting   2009_0710 ▶ 2009_0722 / 월요일 휴관

진성훈_무제_종이에 유채_120×90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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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71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반디_SPACE BANDEE 부산시 수영구 광안2동 169-44번지 Tel. +82.51.756.3313 www.spacebandee.com

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이성복, 「그해 가을」 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 1. 진성훈의 이번 작업을 보고 있으면 얼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얼굴을 본다는 것, 그것은 그 얼굴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고 또 얼굴의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삶의 여정을 얼핏 만난다는 것, 혹은 얼굴 형상을 이야기로 되돌릴 수 있음을 의미할 터. 그러나 진성훈의 이번 작업에서는 타인의 얼굴을 본다는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얼굴이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가 포착한 얼굴이 현실적 얼굴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려진 얼굴이 현실과의 맥락을 상당부분 이탈해 있어서 저 얼굴을 통해 누군가의 얼굴을 떠 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그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얼굴이 아니라 얼굴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지평'이어서 정작 얼굴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얼굴의 원천'을 풀어놓기 위해 얼굴에 가 닿는다. 저 얼굴은 아직 얼굴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얼굴이며 동시에 어떤 얼굴이라도 될 수 있는 과정 중인 얼굴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저 구멍만 뚫린 '머리'일까?

진성훈_무제_종이에 유채_116×72.5cm_2009

일테면 진성훈의 캔버스에 형상이 구성되어 있음에도 마치 아직 기능이 부여되지 않은 '아이'의 '머리/얼굴'처럼, 진성훈이 포착한 형상을 '얼굴'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얼굴의 표면조차 제 자리를 잡지 않은 덕택이다. 즉, 그가 구성한 형상이 얼굴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우선, 얼굴 형상이 세포분열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그의 이번 작업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보면서도 어떤 확정된 존재를 만난다는 뉘앙스를 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기체가 '알'의 상태에서 세포분열을 통해 '개체'로 이행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가 구축한 형상의 표면이 실제로 포착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 자체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생물학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잘 알다시피 이미 개체화된 존재에게도 얼굴은 확정되고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화의 과정에서 얼굴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기 때문이다. 얼굴은 하나일 수 없고 이미 여러 개이다. 얼굴 표면이 현실과 만나는 접촉면이 되는 순간, 얼굴은 항상, 이미 다른 얼굴이다.

진성훈_무제_종이에 유채_120×90cm_2009

2. 그래서인지, 진성훈이 그린 형상이 존재론적인 변화의 뉘앙스로 표현되기보다 '데스마스크'처럼 차갑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 얼굴은 얼굴의 표면을 서서히 잠식한 '가면'으로 읽히게 만든다. 그의 작업에서 생의 활력을 잃어버린, 방부 처리된 '얼굴/가면'을 오랜 시간 쓰고 지낸 남성과 여성의 얼굴에서 표정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인 셈이다. 굳은 얼굴. 그러니까, 진성훈이 구성한 저 얼굴은 항상, 이미 가면이며 곧 얼굴과 가면이 분별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가령, 어두운 눈과 입 저 뒤편에 진짜 눈과 입이 존재한다고 믿기 어렵고 가면을 벗겨도 또 '얼굴/가면'이 있을 뿐, 진짜 얼굴이,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다고 믿기 어렵다. 입과 눈(감긴 눈을 포함한)의 저 어두운 공간에 '진짜' 얼굴이 존재한다고 믿기보다는 가면이 곧 얼굴임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가면 뒤에 진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가짜 얼굴, 가면이 진짜 얼굴을 보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저 '가면/얼굴'을 보면서 형이상학적 비약을 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문득 떠올리는 게 훨씬 중요한 것이 아닐까? 내 얼굴을 덮은 가면의 더께들! 그 역사들.

진성훈_무제_종이에 유채_120×90cm_2009

한편으로, 그의 가면 작업은 '얼굴/실체'와 '가면/이미지'의 오랜 대립에서 엿볼 수 있듯, '가면/이미지'가 비본질적인 것이며 심지어 우상(icon)으로 간주되어 우리들을 현혹하고 미혹되게 만드는 원흉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미지는 진짜가 아니므로 '실체'로부터 이미 멀어져버린 헛것이라는 것. 가령, 나무 '그림/이미지/가면'은 실제로 존재하는 나무를 그린다는 점에서 나무를 대리하는 이미지, 즉 진짜 나무를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피스트와 달리 플라톤은 현실 세계가 덧없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어서 이데아를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물론 나무 이미지는 '나무의 그림자'이지만, 동시에 나무는 '나무 이미지'를 통해서 되살아나는 기묘한 역설을 연출하기도 한다. 예컨대, 유년 시절의 사진에서 유년 시절의 자신이 되살아나는 것을 떠올려 보자. 서둘러 말해, 가면을 벗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 모른다. 그의 작업에서 여성의 가면 위에 머물고 있는 작게 그려진 군상들을 보라. 그럼에도 강선학의 지적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진성훈의 부조작업에서 "자유와 부자유"라는 두 층위가 공존하고 있다면, 그의 가면 뒤에 가면을 가능하게 하는 진짜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닐까를 따져 보아야 한다. 아니, '부조'의 형식이 형상과 그 형상을 원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지대와의 접속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가면'을 가능하게 하는 '얼굴'이 '가면'으로 가리지 못한 영역에 고스란히, 그러나 아프게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법하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 그의 부조 작업이 자유와 부자유라는 양립 불가능한 두 형식을 공존시킨 것처럼 가면과 얼굴을 동시적으로 존재하게 만들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고 가면만 보인다고 판단될 수도 있을 듯하다. 이런 방식을 따른다면, 얼굴은 가면 아래에 혹은 바깥에 없지만, 분명 '얼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면/껍질/이미지' 없이 '얼굴/본질/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전자가 후자를 이끌고 온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면은 얼굴의 원천이다. "껍데기는 기름기 다 빠진 존재의 힘/ 쓴맛 단맛 다 맛본 초월의 힘/ 알맹이는 가라!/ 껍데기는 탈진한 이판사판의 힘/ 쓴맛 단맛 다 뺏기고 없는 탕자의 힘/ 알맹이는 가라!"(최영철, 「알맹이는 가라」중) ■ 김만석

Vol.20090710b | 진성훈展 / JINSEONGHOON / 陳成勳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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